에스겔
2016.05.07 17:12

(76강) 한 사람

조회 수 3288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겔 33:21-29http://onlycross.net/videos/eze/eze-33212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3.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4.인자야 이 이스라엘의 이 황폐한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많은즉 더욱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 하는도다

25.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고기를 피째 먹으며 너희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26.너희가 칼을 믿어 가증한 일을 행하며 각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하고

27.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황무지에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뜨리고 들에 있는 자는 들짐승에게 넘겨 먹히게 하고 산성과 굴에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게 하리라

28.내가 그 땅이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고 그 권능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산들이 황폐하여 지나갈 사람이 없으리라

29.내가 그들이 행한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그 땅을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면 그 때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라

 

<설교>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증거 하는 모든 내용은 우리에게 아무런 부담 없이 다가와야 합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은혜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에 좋고 감동을 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 하면 말 그대로 은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은혜라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심적으로 감동이 되고 눈물이 나오고 심지어는 코미디 같은 내용에 재미있게 웃은 것으로도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 합니다. 성경의 어느 한 부분도 은혜와 사랑과 무관하게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따분하다고 생각되는 레위기도,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에스더, 아가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가득 담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거의 모든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책망과 심판의 경고와 멸망 속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있습니다.

 

 

이처럼 죄에 대한 책망과 심판의 경고와 멸망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 한다면 과연 은혜와 사랑이 부담 없이 편히 들을 수 있는 내용으로 다가올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죄에 대한 책망은 할아버지가 귀여운 손자에게 ‘왜 이렇게 했어?’라고 야단치는 수준이 아니라 ‘폭로’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폭로하시는 것입니다. 죄가 폭로 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단 하나 ‘악인’이라는 실체뿐입니다. 거대한 쓰나미가 해변의 도시를 덮치면 아름답고 화려했던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비참한 잔해만 남겨 지는 것처럼, 하나님에 의해 죄가 폭로 되면 우리를 아름답게 포장하고 있던 의의 모습은 쓸려 나가고 추악한 죄의 잔해만 뒹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죄를 폭로 하시는 것이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하고자 하시는 것이라면 죄의 폭로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폭로가 없이 은혜와 사랑이 증거 되는 것은 없다는 것이고, 따라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둔감하면서 은혜와 사랑을 말하고 눈물을 흘리고 감동받았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주관적 생각이고 느낌일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은혜와 사랑에 의해 죄가 폭로 될 때 마음이 불편해지고 듣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비참함을 보게 된다면 그것이 진심으로 은혜 받은 증거란 사실입니다. 마음에 감동이 없고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은혜에 의해 죄가 폭로되고 비참함을 보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죄의 폭로는 인간의 비참함을 끌어내는 것으로 멈추지 않습니다. 비참한 존재에 지나지 않은 나 같은 자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폭로하시는 것이고, 은혜가 역사하는 것은 죄가 폭로됨으로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간과하게 되면 주관적 은혜에 빠진 채 하나님의 참된 은혜의 역사에 대해서는 무지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현실의 변동에 따라 은혜도 변하는 모습만 드러날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의인이라 할지라도 죄악을 범하면 죽고, 악인이라 할지라도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삽니다. 하지만 자신을 의인의 길로 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원칙은 불만으로 다가올 뿐입니다. 이들은 불만을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는 말로 표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섬겨온 공로를 생각한다면 설사 죄를 범한 것이 있다 해도 그동안의 공로를 생각해서 용서해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의인의 기준에 놓고 생각했던 이스라엘의 착각이 오늘 본문에서도 드러납니다.

 

 

21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포로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간 지 열 두해, 열째 달 다섯째 날에 예루살렘이 함락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온 한 사람에 의해 예루살렘의 함락 소식이 에스겔과 바벨론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바벨론에 포로 되어 있는 이스라엘에게는 언젠가 때가 되면 내 나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마저 꺾어버리는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예루살렘의 함락 소식이 바벨론의 이스라엘에게 전해지게 하셨을까요?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생각은 수정되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을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바벨론을 꺾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희망이라도 있어서 버틸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렘 28장에 보면 하나냐라는 선지자가 “내가 또 유다의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렘 28:4)고 말합니다.

 

 

하나냐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바벨론 왕이 빼앗아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고 바벨론으로 간 유다의 포로 역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같은 하나냐의 말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지킬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무너지도록 하나님이 간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무너졌습니다. 하나냐의 말은 거짓임이 드러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킬 것이라는 모든 이들의 믿음도 헛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누구시가를 몰랐고 자기들만의 깊은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지키시고 도우시고 은혜가 충만하게 하신다’는 말들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한 자들의 막연한 바램에 지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실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심에 의한 환상의 세계를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착각은 23,24절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이 이스라엘의 이 황폐한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많은즉 더욱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 하는도다”는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 폐허가 된 성에 남아 있는 자들이 한 말은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는데 우리는 수가 많으니 하나님이 더욱 이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 좋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보시고 이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면 믿음 좋은 사람이 많은 우리라면 더욱 이 땅을 기업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은 비록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지만 하나님은 자신들을 보시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을 다시 주신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특별히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 포로라는 고통에서 제외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즉 포로로 끌려간 것을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남아 있게 된 것을 자신들에게 문제가 없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으로 해석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사고방식은 겔 11:15절의 “인자야 예루살렘 주민이 네 형제 곧 네 형제와 친척과 온 이스라엘 족속을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하였나니”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예루살렘에 남아 있게 하신 것을 자신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은 수가 많다고 하면서 아브라함 한 사람보다는 낫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숫자를 기준하여 판단하는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는 하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전혀 알지 못한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깊은 무지를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숫자를 기준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판단하는 것은 지금의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가장 먼저 교인의 수와 재정이 많아지는 것을 은혜와 사랑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한국에 교회 숫자가 많아진 것도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쉽게 말합니다. 우리나라를 사랑하셔서 기독교가 번성하게 하시고 더 왕성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셔서 구원 받는 자가 많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한국의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고 있을까요?

 

 

저는 복음을 전파하는 참된 교회는 극소수라고 생각합니다. 도무지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교회에서 보기가 힘든 시대가 된 것입니다. 결국 숫자를 앞세우며 하나님이 마치 숫자를 보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무지의 극치를 드러내는 것이고 신앙이 아닌 종교의 길을 가고 있는 기독교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교회는 자신들이 복음을 전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을 베푸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본문의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의 착각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보시고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들을 믿음이 있는 자로 여긴 것입니다. 초점을 인간에게 둔 것도 모자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보시는지, 그리고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서도 무지했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그들의 말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보시고 기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약속은 하나님이 장래 일을 계획하시고 모든 계획을 하나님이 이루실 것에 대한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바대로 하나님이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과 달리 믿음이 좋은 의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약속을 어떻게 성취하시는가를 아브라함을 세우시고 그를 도구 삼아 증거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의미를 알고 약속을 믿고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하셨음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보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그 어떤 기대도 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죄 밖에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죄 밖에 없는 인간이었을 뿐입니다. 약속을 주셨지만 약속을 믿지 못했고 그 증거가 이스마엘이란 것도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모든 허물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믿음에만 의미를 둡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1-22)는 말씀처럼 이삭을 바치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기업을 주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의 배경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이것이 아브람이란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신 이유입니다. 자신의 힘과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자 했던 아브람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뜻에 순종하는 아브라함 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심을 그들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고기를 피 채 먹으며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는 악한 자들이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이 그들을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은 몰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에 함락되는 것을 보면서도 죄를 생각하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은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난 아니다’는 것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고기를 피 째 먹지 말라는 것은 창 9:4절에 처음 등장하는 하나님의 규례입니다. 고기를 피 째 먹으면 안 되는 이유는 피는 곧 생명이기 때문인데 생명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생명을 취할 수 없음을 고기를 피 째 먹지 말라는 규례에 담아 가르치신 것입니다.

 

 

레 17:10-11절의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 중에 무슨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를 먹는 그 사람에게는 내 얼굴을 대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는 규례도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이 되는 피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데 그것이 생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없이는 생명이 없다는 것을 고기를 피 째 먹지 말라는 규례에 담아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고기를 피 째 먹었다면 그것은 생명이 하나님이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고 하나님의 주시는 땅에서도 끊어질 존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렸다는 것도 생명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힘을 믿고 가증한 일을 행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는 악인들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이 기업이 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들이 있는 땅은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일 될 뿐입니다. 그것으로 그들은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보신 것이 아니라 약속을 보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장차 오실 한 사람을 향해 있음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한 사람을 보신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자기 의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성취로 오실 그리스도로 구원 받은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착한 사람도 많고 믿음으로 살고 그리스도로 인해 죽임을 당한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자기의 의로 구원되지는 않습니다. 믿음의 길로 갔다면 그 또한 믿음에 의해 가게 된 것이지 자신의 의지와 각오와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설사 복음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해도 신자는 복음을 위해 죽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게 됩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바라봅니다. 이 말은 선하다고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무리 많다 해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인간으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가 아닌 그리스도만을 보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지향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자격이 되어서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받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내가 아닌 그리스도만을 지향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88 에스겔 (87강) 에덴 동산 같이 신윤식 2016.07.23 3025
87 에스겔 (86강) 새 영과 새 마음 신윤식 2016.07.16 3496
86 에스겔 (85강) 더러워진 땅과 이름 신윤식 2016.07.09 3035
85 에스겔 (84강) 처음보다 나은 대우 신윤식 2016.07.02 2884
84 에스겔 (83강) 세일 산을 향한 예언 신윤식 2016.06.25 3057
83 에스겔 (82강) 화평의 언약 신윤식 2016.06.18 3010
82 에스겔 (81강) 한 목자 신윤식 2016.06.11 3067
81 에스겔 (80강) 양과 양 사이에 신윤식 2016.06.04 3060
80 에스겔 (79강) 내 양을 찾으리니 신윤식 2016.05.28 3236
79 에스겔 (78강) 자기만 먹는 목사 신윤식 2016.05.21 3265
78 에스겔 (77강) 이익을 따라 신윤식 2016.05.14 3183
» 에스겔 (76강) 한 사람 신윤식 2016.05.07 3288
76 에스겔 (75강)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 신윤식 2016.04.30 3762
75 에스겔 (74강) 파수꾼의 경고 신윤식 2016.04.23 3277
74 에스겔 (73강) 거기에 있음이여 신윤식 2016.04.16 3040
73 에스겔 (72강) 물을 맑게 하여 신윤식 2016.04.09 3230
72 에스겔 (71강) 바로에 대한 애가 신윤식 2016.04.02 3085
71 에스겔 (70강) 지하로 내려감 신윤식 2016.03.19 3343
70 에스겔 (69강) 앗수르 환상 신윤식 2016.03.12 3249
69 에스겔 (68강) 꺾인 팔을 꺾어서 신윤식 2016.03.05 3467
Board Pagination Prev 1 ... 22 23 24 25 26 27 28 29 30 ... 31 Next
/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