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3:12-18http://onlycross.net/videos/co2/co2-031218.mp4
<본문>
12.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설교>
바울은 13,14절에서“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말씀을 받아 내려 올 때 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납니다.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은 얼굴의 광채로 인해 가까이 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모세는 그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이르신 말씀을 명령하여 말합니다. 그리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던 것입니다(출 34:29-35).
바울은 모세가 광채 나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것을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수건이 벗겨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우리의 문제입니다. 즉 바울은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오류에 빠져 있는가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어둠이면서도 어둠인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 우리의 잘못된 오류임을 안다면 빛이 어둠에 비취는 것이 무엇이며,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것은 마치 광채 나는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는 행동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관심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광채 나는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 얼굴의 광채를 보고 모세를 위대한 사람으로 착각하고 높이는 것을 거부하는 행동으로 이해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출 34:35)고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 얼굴의 광채를 봤을 뿐이지 모세를 위대한 사람으로 높였다는 말은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모세는 사람을 보지 말라는 의도로 얼굴을 가린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 얼굴의 광채는 지속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광채가 언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사라질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 얼굴에서 광채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가리기 위해 얼굴에 수건을 쓴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수건은 광채를 가리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광채가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 얼굴에서 광채를 봤던 사람들은 광채로 인한 영광, 즉 율법의 영광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의 영광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영광은 율법을 이루신 예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고 실천한다고 해도 영광과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여전히 구약을 읽을 때 수건이 벗겨지지 않은 상태라면 그것은 율법으로 인한 영광에 주목한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마음의 완고함으로 말합니다.
교회가‘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나아갈 방향을 잃기 십상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영광이 되는 삶에 대한 내용이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15절)는 말처럼 수건이 덮여 있는 상태에서의 말인 경우가 거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영광이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하나님의 영광된 말씀이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야 말로 그들이 하나님께 나타내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섬김이며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자신들의 섬김과 믿음을 하나님이 기쁨으로 받으시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 의심 없는 확신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것을 수건이 마음을 덮은 상태에서 모세의 글을 읽는 것으로 말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대개의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주일을 잘 지키는 등의 성실한 신앙생활과 함께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모범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도 당연히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바리새인과 동일한 착각에 빠져서 오히려 하나님의 일하심을 훼방하는 길로 가게 될 뿐입니다.
수건은 주께로 돌아가면 벗겨지게 되어 있습니다(16절). 수건이 벗겨진 것이 곧 자유이고 이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기에 성령 받은 증거는 자유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17절). 따라서 율법의 영광에 매여서 자신의 행함으로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라 사탄에게 매인 증거로 드러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행함으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하지만 종교는 우리를 행함이라는 틀에 붙들어 놓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수건이 가려져 복음과 종교를 구분하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의 사람들이 행함의 길에서 자기를 살피면서 말씀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본인은 말씀을 잃었다는 것을 모릅니다. 행함이 있으면 그것이 곧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행함으로 기울어집니다. 악한 행위와 선한 행위가 있으며 자신은 선한 행위를 실천할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 모든 것이 무너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행함이 아닌 예수님의 행함이 의로움이 되고 구원이 됨을 깨닫는 것이 복음이며 그리스도 안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는 저주 받을 자라는 자리에 자신이 있는가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저주라는 자기 현실을 잊어버리는 습성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저주의 자리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됩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어진 삶의 시간에서 주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