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8 16:10

(21강) 복음의 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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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4:1-6

고후 4:1-6http://onlycross.net/videos/co2/co2-040106.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3.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설교>

우리는 빛과 어둠을 잘 알고 구별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라고 말합니다. 생명이 되는 참된 빛이 세상에 와서 각 사람을 비추었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 빛이 자신에게 생명이 되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빛을 보고서도 빛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빛과 어둠을 안다는 생각부터 접어야 합니다.

 

 

사람이 빛과 어둠을 알고 구별할 수 있다면 빛이 세상에 왔을 때 빛으로 알아보는 이가 있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빛을 보고도 빛으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요한의 말대로 어둠이라는 증거입니다. 행동이 악해서 어둠이 아니라 빛을 깨닫지 못한 것 자체가 어둠인 것입니다. 따라서 행함을 선과 악으로 구별할 수 있는 것을 두고 빛과 어둠을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착각일 뿐입니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어둠에 속해 있습니다. 어둠이기에 빛을 깨달을 안목이 아예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악하고 어둠에 속했다는 증거는 악한 행함이 아니라 빛을 깨닫지 못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행동이 착하다 해도 빛을 깨닫지 못한다면 행동과 무관하게 어둠이라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둠에 속한 자라는 것은 행함의 여부가 아닌 빛을 깨닫지 못한 무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에 대해 파악해야 할 참된 진실은 우리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 수 없고 예수가 생명이라는 사실 또한 깨닫지 못하는 어둠의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나는 예수를 알고 예수가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는 것도 안다고 자신합니다. 예수를 아는 것을 교회에서 듣고 배우는 성경 지식을 갖춘 수준으로 인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빛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둠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어둠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어둠에 속한 인간의 문제 또한 알지 못합니다. 결국 빛도 어둠도 인간도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의 잘못된 시작입니다.‘나는 예수를 안다로 시작하기 때문에예수를 아는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믿음의 모습인가?’로 신자 됨을 확인하는 것이고 신자다운 행함을 세상에서 빛이 되는 조건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탄의 세계이며 어둠입니다. 다만 이것을 간파하는 사람을 찾기가 힘든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둠에 빛이 비췄을 때 나타나는 빛의 효력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어둠인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경험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경험하게 되면 인간은 모두 어둠의 존재이며 빛은 예수님뿐이라는 것을 믿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의 세계가 교회라면 교회에는 인간의 행함으로 인한 차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3:19-20절에 보면 그 정죄는 이것이 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행위가 악하다는 것을 안다면 어둠보다 빛을 사랑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오히려 빛을 미워하는 이유는 자기 행위의 악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정죄합니다. 빛이 아니라 자기 행위를 사랑하고 미련 두는 것을 정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행위가 선하다는 이유로 상과 복을 주시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행위에 선함의 의미와 가치를 둠으로써 행위의 민낯을 드러내고 보게 하는 빛을 미워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빛을 깨닫지 못하고 미워하며 어둠을 더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어둠이기에 어둠에서는 행위를 옳고 그른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고, 소위 선한 행위를 믿음과 결부하여 복을 받는 조건으로 가르치고 독려하는 것만 있게 됩니다.

 

 

이러한 실상에 대해 바울은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4)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의 사도직이 중심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의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바울은 어떤 사도보다 더 예수를 사랑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일생을 바친 위대한 사도로 각인되어 있다지만 당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은 바울에게 전적으로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과거 바울이 예수를 핍박하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가 도중에 예수를 믿게 된 일이나 바울의 외적인 조건, 고린도 교회를 다시 방문하겠다는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은 일, 신뢰할 만한 사람의 추천서가 없이 사도로 활동하는 것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단순히 교회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문제로만 보지 않습니다. 교회가 사도인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비방하고 의심하는 것에 대한 불쾌하고 섭섭한 감정의 대응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바울의 입장이었다면 교회가 사도를 비방하는 것을 잘못된 것으로 책망하면서 감정의 대립만 드러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모든 것을 복음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복음의 방식으로 해결합니다. 이러한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세상의 신에 의해 마음이 혼미하게 되고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했다면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빛을 사랑하지 않는 어둠이라는 것이고 어둠이기에 표면적인 조건과 행함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따지게 됩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세상의 신은 하나님 외에 또 다른 신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악한 세력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이 추구하는 신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탄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신이 사람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는 이유는 복음의 광채가 그 마음에 비치지 못하게 하여 여전히 어둠이라는 자신의 세력 아래 있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복음의 광채가 비췬다면 그로 인해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될까요? 이것을 성화로 연결하여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복음의 광채가 비췬다면 사람이 개과천선을 하여 성품과 행동에 변화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행동에도 변화는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했던 바울이 예수를 증거 하게 되었으니까 행동에 변화가 있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행동의 변화가 아니라 주의 빛이 바울에게 비췸으로 인해 속사람이 변화된 결과입니다. 하지만변화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될 문제는 아닙니다. 속사람의 변화는 자신에게나 세상에 대한 기존의 시각과 인식 자체가 무너지고 전혀 다른 복음의 시각과 인식의 출발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행동은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흔적일 뿐이기에 행동만으로 복음의 광채라는 말의 의미나 변화를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1:3-5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빛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빛이 있음으로 세상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드러나고 구분됩니다. 즉 빛에 의해서 어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고 빛은 생명임과 동시에 어둠을 인식하는 근원이 됩니다. 그래서 빛이 우리 마음에 비췬다면 우리가 곧 어둠에 속한 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광채가 비친 것입니다.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않았다면 복음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어둠이라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 채예수를 믿는다는 착각의 길을 가게 될 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이러한 현실로 봅니다. 그리고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는 것을 세상의 신에 의해 마음이 혼미하게 된 것으로 말한다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말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복음의 광채가 비친 것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실상이고 현실인 것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복음의 광채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한다 해도 복음이 빛이 되어 우리 마음에 비취지 않는다면 예수든 복음이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어떤 것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광채가 우리 마음에 비취면 우리 마음에 구축되어 있는 인간의 모든 가치와 가능성, 의로움은 무너지고 부인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6절에서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 말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지식과 능력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빛이 비출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에서 여러분이 분명히 인식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은 어둠 자체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어둠이라는 것은 우울하고 답답하고 근심 걱정으로 가득한 심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이 자기중심으로 단단하게 구축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이러한 마음으로는 빛을 깨달을 수 없는 것을 두고 어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둠의 마음에 비추는 빛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설령 얼굴을 본다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있다면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예수를 믿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은 마음에 빛이 비침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고 알 수 있는 영광이 아닙니다. 그렇다 해도 예수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안다는 말은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이 인식하는 영광의 범주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이 비추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2:10-11절에 보면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고 칭찬 듣는 행동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이 모든 것을 예수님의 공로로 돌리게 되는 것임을 생각하면 신자가 십자가만이 자기의 구원임을 고백하며 예수님의 공로 앞에서 자신의 모든 공로를 부인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복음의 광채가 비추는 것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십자가에 죽으시는 길로 가신 것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 얼굴에서 보게 되는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어둠에 있는 우리의 구원이 실행된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예수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면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았음을 자각하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광채가 비친 신자이기 때문에 신자는 자기 행위에 대한 공로가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복음의 광채로 인해 예수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성실하게 교회를 다닌다거나 착한 행실로 뭇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을 다 지워버리고 자신이 과연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인지, 예수님의 무엇을 믿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록 예수를 알고 복음을 안다 해도 실제로는 세상의 신에 의해 마음이 혼미하게 되고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한 자로 자신의 종교적 욕망과 자기 이름을 위해 예수를 찾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보면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1,2)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은 말씀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 증거 하는데 말씀을 이용해서 인간의 행함과 공로에 가치를 두고 그것으로 신자를 판단하고 격차를 둔다면 그것이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런 거짓 사도의 말에 의해 마음이 혼미하게 된 것입니다.

 

 

모세 얼굴에 있었던 광채는 사라지는 것이지만 예수님이 얼굴로 드러나는 광채, 즉 하나님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합니다. 그 영원한 영광이 구원될 수 없는 자를 구원하시는 긍휼로 인해 성취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수건이 벗겨지지 않은 자가 성경을 읽으면 하나같이 인간의 행함과 실천으로 접목하여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높입니다. 이 모든 것이 말씀이 혼잡하게 되고 마음이 혼미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의 어둔 마음에 복음의 광채를 비추시며 영광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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