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4:8-12http://onlycross.net/videos/co2/co2-040812.mp4
<본문>
8.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설교>
고난을 원하거나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고난이 없는 순탄한 인생을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초월적인 힘을 찾아 고난을 회피하거나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종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도에 따라 발생하는 종교는 자연히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이 필요로 하는 종교입니다.
하지만 어떤 종교도 맹목적으로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누릴만한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 기준으로 요구되는 것이 신에 대한 충성과 함께 인간의 도덕성입니다. 신을 잘 섬기고 도덕적인 삶을 살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 인간에게 만족이 되는 종교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종교의 시각에서 고난은 신의 진노로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고난을 신에게 잘못한 것이 있거나 죄를 지었을 때 그에 대한 벌로 내려진 징벌의 시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고난에 대한 그러한 시각이 잘못된 것임을 확인시켜줍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누구의 죄 때문인지 물은 제자들에게 ‘누구의 죄도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2-3)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고난의 이유를 죄로 연결하여 이해하는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분명히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가를 안다면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탄식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슬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영광의 세계에 소망을 두게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8,9절)라고 말합니다.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다는 말이 마치 우겨쌈을 당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싸이지 않고 순탄한 길로 가게 된다는 뜻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인생이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가득해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바울의 말의 의도는 전혀 다릅니다.
바울은 자기를 위한 자기 인생을 살고 있지 않습니다.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과 예수의 생명이 몸에 나타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에 붙들려 있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고난이라는 환경으로 데려가십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그러한 환경에 처해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그의 처지가 딱하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시는 큰 것이 담겨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겪는 고난을 부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바울을 누구보다도 복음 전파를 위해 수고한 사도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바울로 인해 세워진 교회를 기억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바울은 위대한 사도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사도로 부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복음을 전하는 모든 것도 자의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도구로 사용된 것이었기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보상을 요구할 자신의 업적이 없었습니다.
고난이 부당하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은 자신이 한 일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 있으니 보상을 받는 것이 마땅한데 왜 고난을 주십니까?’라는 불만이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인간이 행하고 살아가는 것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한 분별이 무지한 까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행하고 살아가는 것은 죄 밖에 없습니다.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실패자이고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원수이고 방해물입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도 인간이 자초한 일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항상 실패하고 죄를 지으며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와 죄를 도구로 사용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죽음, 즉 십자가는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임으로써 모두가 죄 아래 있는 사망의 존재라는 증거물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몸으로 선을 행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산다 해도 죽음 아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면 우리는 단지 내 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죽인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죄의 몸으로 사는 것이고 사망의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 몸으로 행하는 어떤 것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이 십자가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무지 십자가의 세계를 이런 시각으로 접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자기 구원의 수단으로만 생각할 뿐이지 내가 사망의 존재라는 자기 확인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보상과 대가를 기대하는 것이고 타인에 대해서도 그가 행한 일이나 처한 환경으로 복과 벌을 나누는 큰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으로써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면 예수의 생명으로 나타난다는 것인데 이런 말을 하는 바울의 의도를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 것은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졌다면 그 몸은 어떤 경우에도 예수를 죽인 사망의 몸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몸에 고난이 주어진다 해도 당연한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의 죽음을 짊어진 사망으로 살면서 세상의 복과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 예수 죽인 것을 도외시하는 죄가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기 몸의 가치를 위해 일하는 것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신자가 자신의 신앙 가치를 위해서, 즉 타인에게 인정받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 사람들이 인정하고 높이는 조건을 갖추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밀쳐 낸 것이 됩니다. 이것은 본인 스스로 예수의 생명과 무관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고난이 오면 믿음으로 고난을 이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으며 여전히 신앙생활에 열심을 다함으로써 고난에 지지 않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시험이기 때문에 고난을 이기는 것이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고, 시험을 통과하면 그에 대한 상으로 복을 주신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분명 그러한 계산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순탄하지 않는 고난의 삶을 살다가 인생을 마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의 인생이 그러하고 예수님을 비롯하여 열 두 제자와 사도 바울, 세례요한이나 스데반의 인생을 생각하면 고난을 이기면 상으로 복을 받는다는 인간의 계산법과 무관합니다. 그래서 고난에 대한 기존의 시각은 반드시 수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대로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는 자가 신자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을 죽은 자로 보게 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도 말합니다.
죽음에 넘겨진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행하는 자발적인 일이 아니라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죽음에 넘기심으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몸은 사망의 몸이지만 단순히 사망의 몸이 아니라 생명이 담긴 몸이 됩니다. 이것이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예수의 생명을 죽음의 몸에 담아 나타내신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보배를 질그릇에 담는 것이 우리의 방식이 아니듯 예수의 생명을 죽음의 몸에 담아 나타내는 것은 우리의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의 생명을 담은 그릇이라면 멋있고 귀하고 화려한 그릇이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배를 보지 않고 그릇을 보게 되면 그릇의 가치를 따지면서 보배를 담을 자격 여부를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의심하고 비난했던 무리들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의 생명이 담긴 그릇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사명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는 것이고 이것을 위해서 항상 죽음에 넘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는 고난은 우리가 예수의 생명으로 살고 있음을 확인하게 하는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조그만 환경도 뛰어넘을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에서 죽음을 실감하면서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가 왜 생명이 되는가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난을 믿음의 실력과 수준을 평가하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고난 때문에 낙심하게 되면 ‘내가 이런 믿음으로 천국 갈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탄에게 우겨쌈을 당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발생하는 사태 하나하나가 우리의 믿음 없을 확인하게 하는 하나님의 일로 다가옴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종코로나 문제 또한 단지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이 퍼지는 사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 없음을 알게 하고 지금껏 살아온 것이 예수의 생명이 담긴 은혜 때문이었음을 확인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신자에게는 모든 것이 감사로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자로 세상에 나타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믿음에 대해 실패하는 자들일 뿐입니다. 이것을 경험하고 확인할 수 있는 환경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쉬지 않고 죽음에 넘겨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과 실패가 본질인 우리에게 예수의 생명을 담아 나타내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죽음과 실패를 하나님이 생명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은 성령이 주시는 지혜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인간의 모든 관심은 그릇으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 27:52-53절을 보면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하늘에서 천사들이 등장하며 나팔과 노래를 부르며 멋있게 증거 한 것이 아니라 무덤이 열리고 무덤에서 나온 성도의 몸으로 증거 되었습니다. 무덤에서 자던 성도의 몸이 빛이 나는 멋있는 몸으로 변화한 것이 아닙니다. 썩은 냄새로 가득한 몸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증거 되는 일에 우리의 몸의 가치는 전혀 요구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덕성과 실천으로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사태에 직면하게 됩니다. 신종코로나 문제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생에서 경험하는 지극히 사소한 일부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사태에서 믿음은 우리를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해준다거나 우겨쌈을 당하는 환경에서 건져주는 능력으로 역사되지 않습니다. 믿음과 상관없이 누구나 병에 걸리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다만 신자가 다른 것은 고난이 우리를 죽음에 넘기면서 예수의 생명을 확인하게 하는 길로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낙심하고 절망하고 염려하고 불안해하며 삽니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도 그렇게 살아왔고 이후에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돈 때문에 자식 때문에, 그리고 생존을 위한 여러 일들로 인해 염려와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천국을 믿는다는 것이 부질없는 교만으로 드러나도록 삶은 우리를 흔들 것입니다.
그런데 염려와 불안이 우리 안에서 하는 일이 있음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죽음에 넘기는 것입니다. 때문에 만약 고난이 없고 염려와 불안이 없는 순탄한 삶이 계속된다면 자신이 죽음에 넘겨지고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일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죽음의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나 일하심은 고난이 없는 순탄한 삶으로 증거 되지 않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있는 일에서 두려움이 생기고 낙심하고 염려하게 되면서 내가 주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믿게 하시고 주가 일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냄새나는 죽음의 존재라 해도 십자가 은혜로 인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기쁨을 포기할 수 없다는 믿음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