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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5:8-10

고후 5:8-10http://onlycross.net/videos/co2/co2-050810.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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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8.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설교>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세상을 떠난 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죄의 세계에서 구출되어 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미래적이 아니라 현재적인 것으로 이해해야합니다. 구원이 현재적이라면 신자는 구원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구원된 자로 산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곧 구원 안에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구원된 자로 산다는 말에서 갈등과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신앙 상태가 구원된 자로 산다고 말하기에는 심히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증거가 신앙생활의 열심과 함께 죄의 유혹을 극복하면서 선을 실천하는 자기 변화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가르침인데 현실은 죄를 극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죄에 매어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구원 받았다는 담대함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구원과 구원의 세계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죄의 세계에서 구출되어 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상태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이나 죄의 세계에서 구출되었다는 말을 죄를 극복하고 죄와 상관없는 인간이 된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신에게서 죄가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죄와 죽음에서 해방된 구원이 자신과는 무관한 일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 8:1-2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의 말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자는 정죄함이 없다는 성령의 법에 의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죄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죄를 극복하고 죄와 무관한 상태에서 의를 행하게 되는 것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구원의 세계를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의 세계에서 구출되었다는 것은 죄의 행위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죄로 깨닫게 된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세계는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규정하는 것처럼 세상의 법과, 윤리 도덕에서 벗어난 특정 행동을 죄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함과 불의를 인정하지 않고 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세상 자체가 죄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의 세계에서 구원된 신자로 사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7절에서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 말합니다.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 이유는 보는 것 중에 의로 인정될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은총으로 허락하신 믿음만이 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행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믿음에 의해 주도된 행함을 뜻하는 것이지 믿음을 가진 인간이 자기 의지와 열심으로 선한 실천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믿음에 의해 주도된 행함이 뭔가?’라는 의문이 따라올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죄를 죄로 알지 못했을 때는 자신이 믿음으로 살고 선을 실천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심으로 죄를 알게 되고, 죄 가운데 깊이 빠져들게 되면서 선을 실천할 수 없는 자기의 무능력에 대해 깊이 자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 믿음에 의해 주도되는 신자의 행함입니다. 이것이 의의 세계에서 구원된 신자로 사는 것이고 믿음으로 행한다는 바울의 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10절의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는 말도 기존의 일반적인 해석으로 접근할 수 없는 내용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상급 심판대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십자가 은혜로 구원 받은 신자가 몸으로 행한 행함의 여부에 따라 상급을 받게 된다는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행함의 의미를 상급에 두지 않는다 해도 구원의 믿음을 증명해주는 것은 변화된 삶이라고 하면서 인간의 행함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 지금의 기독교입니다.

 

 

유튜브에서 장신대 교수와 숭실대 교수가 은혜와 행위 문제로 토론한 것을 봤습니다. 두 분 모두 신약학 교수입니다. 장신대 교수는 구원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은혜로 받는다고 하면서 행함은 구원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숭실대 교수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는 십자가 대속뿐만 아니라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원칙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대속을 전체 구원의 한 측면이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의 피는 죄의 전부가 아닌 일부를 해결한 것이고, 그 일부는 과거의 죄를 말하는 것이지 미래의 죄까지 포함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 모두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말을 했지만 바울의 의도는 따라가지 못하고 구원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착각,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멸시하는 현장이었을 뿐이고 이들 교수에게서 배우는 신학생들의 미래가 암담하게 다가왔습니다.

 

 

은혜를 말하든 행함을 말하든 이들의 잘못은 초점을 인간에게 둔다는 것입니다. 인간 구원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은혜를 말하면서도 결국 행함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은혜로 구원이 완성되었다고 하면구원의 완성 속에서 인간이 마음대로 죄를 범하고 살아도 되는가?’라는 반문이 있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빙자하여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는 말을 바울이 하고 있다는 해석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지금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의문을 품고 비난하는 교회를 향해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사도된 나를 의심하고 비난하는 악한 행위는 나중에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드러나 그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는 경고성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일까요? 그런 의도라면 바울 역시 자기를 생각하고 인간의 행함에 매인 자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14:10-12절에서 바울은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는 말을 합니다.

 

 

형제를 비판하고 업신여기는 죄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드러나 무릎을 꿇고 자백하게 되고 그에 따른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은혜로 구원 받았다 해도 결국 형제를 비판하고 업신여긴 죄를 범한 죄인으로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심판을 받아야 할 운명에 있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잘하는 것 중의 하나가 형제를 비판하고 업신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롬 14장에서 음식과 날에 대한 문제를 언급합니다. 음식과 날이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로 야기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고기를 먹어도 된다 먹으면 안된다’‘한 날이 거룩하다 모든 날이 거룩하다는 것으로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떠나서 행함에 매어 있음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보이는 행함으로 형제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고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행함도 의의 근거로 내세울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옳다고 인정될 우리의 행함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기를 먹는 것이 옳다 먹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을 서로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논리 있게 주장한다 해도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인간은 사망의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기를 먹어도 먹지 않아도 사망의 존재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인간의 실상임을 잊지 않았고 고린도 교회는 잊었기에 바울에 대한 의문과 비난이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언변이 좋고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도라 해도 인간으로서는 사망의 존재이며 예수의 피로 구원 받습니다. 반대로 언변이 좋지 않고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않고 바꾸는 신뢰하지 못할 사람이라 해도 역시 예수의 피로 구원 받는 사망의 존재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죄의 세계에서 일치되는 것이고 예수로 말미암은 의의 세계에서도 일치되는 존재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망가하기 때문에 신자라면 이래야지라는 인간의 기준에 의해 비난이 양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서로 함께 하고 서로를 바라보면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8,9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몸으로 있든 떠나든 자신의 기쁨을 위해 힘씁니다. 몸으로 있을 때는 자기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 힘쓰다가 떠난 후에도 자기에게 기쁨과 만족이 되는 천국을 상상합니다. 천국에서의 상급도 자신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 힘쓰는 인간의 발상입니다. 즉 우리의 관심에 주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주께 관심을 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에 미련을 두는 사람이라면 주께 관심을 둡시다’‘주의 기쁨을 위해 힘씁시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의지로 가능하다면 저도 여러분께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인간에 대해 가능성을 열어 두고 평가한다 해도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며 나를 향한 관심을 주께로 돌릴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아마 짜증이 날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인간은 안된다고 포기하면 된다는 것인가?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없지 않은가?’이런 의문과 혼란이 돌고 돌면서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가장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며 논리적으로 생각되는 행함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 5:22-24절의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심판의 문제를 아들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영생이기 때문에 아들 공경의 여부로 인해 생명과 사망으로 구분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선한 행실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복을 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행함을 공경하고 높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로 인해 받을 것은 사망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의 세계에 있는 신자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관심으로만 살아가는 인간의 불의함을 깨닫고 그것으로 자신에 대한 아픔과 탄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탄식의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주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며 감사하게 하는 것이고 이것이 주를 공경하는 것이며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바울은 지금 구원의 문제나, 죽은 이후의 문제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보는 것을 근거로 하여 바울의 사도직에 의문을 가지고 비난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하는 것이기에 주께서 이루신 의만 바라볼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셨음을 고백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세계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모든 것을 부인하게 되면서 예수님의 행하심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고 이것이 주를 공경하고 주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두 교수의 토론은 모든 것이 허점투성이였고 모순된 내용들뿐이었습니다. 자신들의 허점과 모순을 가리기 위해 다른 성경 구절을 부지런히 인용했지만 모두가 자구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주를 공경하는 것이 아닌 인간 구원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구원될 수 없는 무능력하고 무가치한 존재라는 진솔한 사실로부터 시작하지 않은 것입니다. 때문에 그런 인간에게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일도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으로만 해석할 뿐 하나님의 영광에는 안중에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는 의의 세계에서 죄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죄의 세계에서 도무지 구원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열심히 예수를 믿으며 교회 생활에 충실하고 나름 신자다운 삶을 위해 애썼던 모든 공적이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무너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모든 공적이 무너졌을 때 비로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위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음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신 믿음에 붙들려서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게 되고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으며 감사할 수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타인의 티끌이 아닌 자신에게 있는 들보가 항상 감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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