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1 16:28

(30강) 우리의 대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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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5:11-12

고후 5:11-12http://onlycross.net/videos/co2/co2-051112.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1.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12.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설교>

구원을 쉽게 말하면 죽음에서 구출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의미를 아는 신자라면주께서 나를 죽음에서 구출해 주지 않으셨다면 나는 여전히 죽은 자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죽은 자를 살리는 십자가를 무엇보다 소중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현재적인 복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 구원을 아는 신자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죽은 존재임을 알지 못한 사람에게 이러한 구원은 가치 있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죽음을 현재적인 상태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현재적인 구원 또한 알지 못하고 미래의 사건으로만 접어 둡니다. 그리고 현재의 가치 있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여 추구하는 것만 있게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신앙인이 세상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인으로 하는 말은 있겠지만 그 말이 영원한 것, 진리 가운데 있는 신자다운 것인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12절에서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신자라는 칭호가 의미하는 영광과 가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부르신 거룩한 자가 신자인데 풀이하자면 죽음이라는 저주의 세계에서 구출되어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의 교리적인 의미로만 기억하고 있는 것과 자신의 실제적인 영광과 가치로 알고 자랑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향한 신자의 대답은 항상 신자 됨의 영광과 가치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데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과 같이 외모로 경쟁하고 자랑하여 이기려고 하므로 신자로서의 영광과 가치가 상실된 결과만 초래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예수의 피로 거룩하게 하신 신자라는 이름값도 못 하는 현실이 된 것입니다.

 

 

먼저 외모로 자랑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외모로 자랑한다는 말에 대해 어쩌면 대개의 사람은 자신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자랑할만한 외모도 없고, 자랑하지도 않는다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자랑할 만한 외모가 있기를 원한다는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외모로 자랑하는 자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삼하 6:20절에 보면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다윗이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여호와의 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기고 석 달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옮기면서 뛰놀고 춤을 추었는데 그 장면을 본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맞이하면서 그 일을 책망한 것입니다. 왕으로서의 체통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삼하 6:21)고 답합니다.

 

 

미갈은 다윗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의미하는 가치와 소중함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궤를 옮기면서 춤추고 뛰노는 다윗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미갈의 시선에는 여호와의 궤보다는 많은 백성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춤추는 왕 다윗을 보며 조롱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다윗의 행동을 왕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 같습니까? 왕이 많은 백성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춤을 뛰노는 것과 그것을 본 미갈이 책망하는 것과 어느 쪽이 당연하게 다가옵니까? 가령 지금의 코로나 문제가 해결되어 종식되었을 때 대통령이 기뻐하며 춤을 추며 뛰논다면 그것을 본 사람들은 어떤 평가를 할까요? 물론 이런 경우도누구 편인가?’의 문제로 갈리겠지만 설령 대통령 편이라 해도일국의 대통령이 너무 체통 없이 행동한다는 비판을 속에 품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것이 외모로 자랑하는 자와 같은 속성입니다.

 

 

미갈은 다윗의 부인입니다. 때문에 다윗이 왕으로서의 권위가 떨어지면 그 영향이 왕비인 자신에게까지 미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왕비라는 신분의 가치와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다윗이 백성들에게 권위 있는 왕으로 인정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다윗에게는 백성들에게 대접받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자신의 체통이나 미갈의 입장보다 여호와의 궤에 대한 소중함과 가치만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미갈에 대한 다윗의 대답인 것입니다.

 

 

다윗이 춤추고 뛰놀면서 백성들이 자신의 기쁨을 알아주기를 원했을까요? 아니면 함께 춤추며 뛰놀기를 원했을까요?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자신과 함께 춤추고 뛰놀기를 명령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궤의 의미와 가치를 알지 못한 자들이 다만 다윗을 따라 하는 수준일 뿐입니다. 다윗처럼여호와 앞에서가 아닌 사람 앞에서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외모로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속성인 것을 생각해 보시면 결국 우리의 문제임을 알 것입니다.

 

 

삼상 16:7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고 말합니다.

 

 

외모는 사람의 노력으로 가꾸고 만들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생각하는 사도다움이라는 외모 역시 바울이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원하는 사도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신다는 중심, 즉 마음은 사람이 원하는 대로 가꾸거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우리의 중심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찾으신다는 것인데 그것을 사람이 만들어 갖출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중심에는 죄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중심을 보게 되면 외적인 것의 차이와 무관하게 죄의 존재라는 본질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중심이 아닌 외모를 보기 때문에 외적인 것으로 자기를 자랑하고 우월감을 가지거나 타인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이것을 잘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외모가 아닌 자신의 중심을 보면서 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들어가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얻어야 할 답은 죽음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삼하 12장에 보면 하나님이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 밧세바를 빼앗아 아내로 삼은 일에 대해 추궁합니다. 그리고 나단이 돌아간 후에 밧세바가 다윗에게서 낳은 아이를 치심으로 앓다가 죽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낳은 아들이 솔로몬입니다.

 

 

삼하 12:24-25절을 보면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의 이름을여호와께서 사랑하셨다’‘여호와의 사랑을 입었다라는 의미의여디디야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윗의 중심에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남겨 두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무엘에게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다윗의 중심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중심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만들어 남겨 두기 위해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외모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이고 모두가 다 중심을 보며 함께 해야 하는 관계에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시선은 자기중심이 아니라 외모로만 향해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에 대한 비난과 함께 여러 문제로 드러났던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은 십자가로 확증된 사랑, 하나님의 용서, 죄에서 구출되어 거룩의 세계에 속하게 된 신자 됨의 비밀 등을 내용으로 합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세상의 모든 일에서 항상 답으로 제시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자신의 외모로 신자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에 남겨 놓으신 비밀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신자 됨에 관심이 희박하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나의 이름과 가치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자신에게 득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인간의 습성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바울의 중심에 남겨 놓으신 것이 인생의 답이 되어 바울을 살게 했기 때문입니다.

 

 

1:15-18절에 어떤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붙들려 갇혔을 때 바울을 시기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바울에게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바울을 깎아내렸습니다. 그러자 바울을 따르던 사람들이 바울 편을 들자 바울을 중심으로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됩니다. 이들에게 바울은 자신이 비난을 받든 옥에 갇히든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면 기뻐하고 기뻐하겠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답을 가진 신자의 믿음입니다.

 

 

바울에게는 자랑할 것이 속에 있었습니다. 신자 또한 자랑할 것은 속에 있습니다. 결국 속에 자랑할 것이 없는 자가 외모로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 대해 신자가 대답할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 즉 십자가가 유일합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게 되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높아지고 인정을 받는다고 해도 중심에는 죄만 있을 뿐인데 그러한 자를 사랑하신 사랑만이 모든 인생에서 답이 되어 우리를 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함께하면 하나님의 사랑이든 십자가든 가르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중심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구원이 되었음을 감사하고 자랑하면 됩니다.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11절에서 바울은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고 말합니다.

 

 

주의 두려우심을 안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 밖에 있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고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되는 것이 반드시 있을 현실이라면 십자가 용서를 전하는 복음이야말로 유일한 희망이고 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복음이 전부였고 복음만 전하는 사도로 남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복음을 위한 사도로만 하나님 앞에 알려진 것처럼 고린도 교회에도 알려지기를 원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인정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외적인 것으로 사도를 평가하는 것이 신자로서 세상에 대해 대답할 것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라서 그리스도의 심판대와 주의 두려우심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행함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용서가 구원이 됨을 믿는 믿음의 길로만 가는 자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자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십니까? 예수 믿고 천국 가기 위해 교회 다니는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로 완성된 십자가가 인생의 답으로 굳어져 있지 않다면 천국 가고 싶어 교회 다니는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심각하게내 모든 인생에 있어서 답은 무엇인가?’‘내 중심에 답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외모로 자랑하는 세상에 나는 그리스도의 용서인 십자가로 대답하는가?’에 대해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온 믿음의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알고 있는 복음을 따라 잘 살았다고 생각합니까? 우리 중에 누구도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매일매일 나에게만 집중하고 나의 일만 소중히 여기며 살았습니다. 현실이 힘들면 이스라엘처럼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각각의 인생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게 되면 할 말이 없게 됩니다. 외모를 보면 할 말이 있을 것인데 속 중심을 보면 입을 다물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여러분의 힘으로 살아온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론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왔다고 주저 없이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잘난 척합니다. 매일매일을 죄만 드러내는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어제도 오늘도 십자가를 믿는 믿음 가운데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닌 내 것을 드러내는 일에 부지런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제적인 인생입니다.

 

 

인생을 믿음으로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성실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성실할 수 없는 인간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시각에서는 성실하게 사는 것처럼 여겨진다 해도 하나님께는 자신을 위한 인생에 매달리고 있는 심판의 존재일 뿐입니다.

 

 

인간은 매일의 삶을 살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루하루는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이 사실을 세상에 대해 대답하는 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 신자입니다.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죽음이 존재로 십자가에 나오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은 사랑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심으로 세상에 대해 대답할 것이 있는 신자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벧전 1:17-19을 보면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가치 있는 것으로 알았던 것은 은과 금입니다. 은과 금이 우리의 외적인 것을 포장하고 가치 있는 자로 높여주는 일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망령된 행실에서 우리를 구속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입니다. 하나님은 은과 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고유의 가치가 되게 하시고 세상에 대한 대답으로 남기시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하는 방식의 가치 있는 인생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가치는 무너져야 할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가치를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은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저주받은 자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코로나로 세상이 피폐해지고 삶이 힘들어진다 해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 있다면 하나님은 왜 코로나를 빨리 사라지게 하지 않으신가?라는 의문이 세상의 생각입니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고유의 가치로 자리한 신자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은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이 된다 해도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 또한 제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 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용서라는 생명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러한 답을 가진 자로 세상에 남겨 놓기 위해 위기와 어려움이 있는 길로 이끌어 가십니다. 어려움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나아가는 신자의 다름이 증거되는 것이지 매일매일 평안과 행복한 삶만 계속된다면 하나님이 우리 속 중심에 남겨 놓으신 사랑을 확인하고 그 사랑으로 인해 감사하고 기뻐할 기회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신자는 죄만 있는 중심에 하나님이 남겨 놓으신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이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인생에서 유일한 답입니다. 이 답을 가진 신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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