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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5:18-21

고후 5:18-21http://onlycross.net/videos/co2/co2-051821.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8.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반복하여 말하는 단어는화목입니다. 사도에 대해서는화목하게 하는 직분이라고 하고, 사도가 받은 복음은화목하게 하는 말씀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화목을 인간관계에서 서로 틈이 벌어지지 않고 마음이 서로 통하며 친분을 유지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화목을 인간이 함께하는 모든 단체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며 교회에서도 믿음의 열매, 믿음의 관계로 화목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세계에만 관심을 두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교인들의 관계에 다툼이 없고 서로 깊은 친분을 유지하는 것이 교회로서 바람직한 모습이고 좋은 교회라는 자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의 가정 또한 화목으로 믿음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은신자는 다툼이 있는 곳에서 화해를 일으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은신자는 다툼을 일으키는 말이 아니라 화목하게 하는 덕이 있는 말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하면서 하나님과 화목하면 다른 지체와도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고 연결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말하는 화목에 인간관계에서의 화목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까요? 만약 사도라는 직분에 인간관계의 화목을 기뻐하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고, 그것을 위해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주셨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독교를 인간이 만들어낸 수많은 종교 가운데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고 인간의 행복은 화목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가 기독교를 그러한 종교로 무너뜨리는 일에 부지런하다고 말하면 여러분은 과연 제 말을 이해하고 수긍할 수 있겠습니까? 제 말을 이해하고 수긍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드리는 말씀을 통해서 현대 교회의 실상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바울은 18절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셨다는 말이 여러분에게 관여되는 일로 익숙하게 다가옵니까?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말이 익숙하게 다가오려면 가장 먼저 매일의 일상이 하나님과 다투는 것이었음을 실감해야 합니다. 화목은 다툼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다툼이 없는 관계에서 화목이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화목을 이루신 일에는 인간을 하나님과 다투는 존재로 여기신다는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일상이 하나님과의 다툼이었음이 인정된다면 하나님과의 화목이라는 복음의 세계에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바울이 말하는 화목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생소하고 낯선 세계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 자체가 낯설고 생소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어떻게 화목할 수 있고, 화목하다는 것은 또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가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에 있고자 하는 우리에게 매우 어려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보이는 것으로 접근하고 확인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매 주일 하나님께 예배하고 생활비를 쪼개어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금을 하며 봉사의 일에도 힘을 쓰는 자신의 신앙생활을 근거로 하나님과 다투지 않고 화목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면 신앙생활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평안한 삶의 환경이 더해지면 하나님과 화목하기에 누리는 복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없고 화목하기 때문에 평안의 복을 주신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고 화목하지 않는다면 평안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어야 한다는 지극히 종교적이고 인간적인 사고에 고정된 것일 뿐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과의 화목을 잘 안다거나 화목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모두 인간이 꾸며낸 거짓일 뿐입니다. 화목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생활에 익숙해 있는 것을 화목으로 잘못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사도 바울이 증거 하는 화목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종교의 틀에 갇혀서 자기를 바라보며 스스로 옳다 인정하는 잘못됨에 빠지는 것입니다.

 

 

20절의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드린 것처럼 화목은 불화의 관계에 있음을 전제합니다. 때문에 우리 자신이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다투고 불화한 관계에 있음을 알지 못하면 화목이라는 새로운 신앙 세계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불화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비록 신앙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고 열심으로 무장되어 있다 해도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불화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정확한 판단입니다.

 

 

불화가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뜻하는 것이면 화목은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화목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화목의 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인간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면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바울의 외침은 교회에게 하나님과 화목해지도록 노력하고 힘쓰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죄에서 구원받은 신자로서 무엇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촉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목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에 그리스도가 등장합니다. 18절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하고, 19절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심으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과의 화목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에 그리스도가 등장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구약을 배경으로 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물론 성경을 공부하신 분들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죄가 용서되고, 죄가 용서됨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졌다고 쉽게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구원과 화목의 가치가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은 상태로 우리에게 머물러 있고, 그리스도의 죄 용서로 이루어진 화목을 누리고 경험하는 자로 살아가는가입니다.

 

 

17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받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리스도의 죄 용서로 하나님과 화목 된 새로운 피조물, 새것으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자가 인간의 외적 조건이나 행함이라는 틀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판단할 수 없는 관계로 들어왔음을 뜻합니다. 그것이 서로가 지체로 존재하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존재하는 신자는 서로를 그리스도로 인해 새것이 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예전의 습성을 따라 타인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삶의 방향은 그리스도로 향하지 못하고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만 반복되는 것 때문에 바울이 화목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20:24절에 보면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번제와 화목제의 다른 점은 번제의 제물은 죄로 인해 바치며 제물의 전부를 태워야 하지만 화목제 제물은 죄를 용서받았다는 의미로 드리는 것으로 제물을 드리는 자가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목제물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잔치가 되는 것이고 이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제물의 희생으로 인한 죄 용서 때문이지 제물을 바친 자의 의로움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제물로 인해 누리는 혜택이라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화목은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시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누구도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율법, 즉 인간의 행위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의를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다름은 행위가 아니라 죄인에게 죄를 돌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아는가 모르는가로 드러납니다. 그 말은 우리는 행위의 선악을 따지며 판단하는 세계에 들어와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화목의 세계이고 이 세계를 세상에 드러내는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하지만 자기의 행위로 신앙의 정도를 파악하고 그러한 시각으로 타인을 판단하며 비난하는 모습들을 보면 율법 실천을 신앙의 최고 가치로 삼았던 유대 종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아니라 대한유대교장로회로 지칭한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형편에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화목의 세계에 있지 않은 것이고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은 분명 우리의 행함, 실천 등과는 무관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의한 은총입니다.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그리스도께 돌리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인정되는 것이고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잘 아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내용에 따라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한마디의 말로도 내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파악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말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모든 내용들이 하나같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행함, 실천, 열심, 선함, 양심,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거나 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랑할 우리의 것이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 안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한 하나의 관계에 있습니다. 같은 것을 받았고 그것은 전혀 차별이 없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모든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같은 대접을 받는 관계에 있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교회 됨에서 벗어났을 때 고린도 교회의 수많은 문제가 우리 자신에게서 목격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목에 대해 말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바울은 한마디로 볼품없는 사도였습니다. 그것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비난을 받는 이유였습니다. 사도로 높이고 대접할만한 조건들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라는 말로 사도에 대해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사도를 그리스도를 대신할 사신으로 부르시고 교회에 권면하시는 것이 사도인 자신이 맡은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이 교회로부터 인정받고 높임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존재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셔서 존재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자라는 그릇으로 존재하는 데 있어서 우리 힘으로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이 순전히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 담긴 그릇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서로 그러한 관계로 함께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행함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것에 마음을 두고, 그것으로 신자 됨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부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바울의 말은 우리의 죄를 우리가 아닌 그리스도에게 돌리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마음을 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 의로움이 되는 길을 가는 것이지 우리가 의를 만들어내어야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길이 어떻게 다른지는 잘 알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의로움이 되는 길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의만 높이고 자랑하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의를 만들어내는 길을 가는 것이면 서로 자신이 만들어 낸 의를 자랑하고 자신의 것보다 못한 의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것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현실은 과연 어느 쪽일까요?

 

 

우리에게 어떤 행실이 있다 해도 변하지 않은 현실은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있지 않으면 우리는 다만 멸망의 자식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무엇을 실천하고 행한다 해도 다 무용지물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과연 어떤 심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면서 저도 바울의 심정에 서서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로 대신하게 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긍휼과 자비하심이 여러분이 가야 할 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 길에만 마음을 두시고 하나님과 화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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