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5:20-21http://onlycross.net/videos/co2/co2-052021.mp4
<본문>
20.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
기독교인들은 교회가 세상에서 선한 모습을 드러내어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을 하나님이 교회를 남기신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이 인정하는 선한 활동을 전도와 함께 교회의 사명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교회의 존재 가치를 따지고 확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가 진리의 말씀에 관심이 없을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사회적인 일을 통해서 좋은 평가를 받는 교회가 되었다 해도 그것은 진리의 일이 아니라 사람, 즉 종교인으로서의 일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대개의 교회는 이웃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에 교회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둡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봉사와 헌신을 통하여 주변인으로부터‘저 교회는 정말 좋은 교회입니다. 제가 만약 교회를 나가게 된다면 저런 교회로 나가고 싶습니다’라는 인정과 칭찬받는 것을 교회에 의로움이 되고 하나님도 기뻐하실 믿음의 실천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리의 말씀에는 아예 관심이 없음을 나타내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세상에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에 대해 누구도 그 어떤 의문을 갖지 않고 교회가 행해야 할 사명으로 받아들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우리 교회는 믿음으로 살고 믿음을 실천하는 참된 교회입니다’라는 것은 이웃과 사회를 위한 봉사와 헌신이라는 명목 아래 그것에 걸맞은 일을 하는 것으로 된다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의 의로움처럼 여기는 이웃과 사회를 위한 봉사와 헌신의 문제에 시비를 걸면 발끈하게 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의 가치와 믿음을 증거 하기 위해 필수적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믿음의 실천이고, 교회의 의로움이 되는 선한 일이라는 생각이 깨어지지 않는 바위처럼 단단히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2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 못한 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이유가 우리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이해가 됩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죄 용서와 구원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하여 천국에 있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 모든 기독교인이 답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을 죄 용서나 구원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는 것이 예수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다는 것을‘하나님의 의가 되기 위해 의가 되는 일을 해야 한다’라는 뜻으로 오해합니다. 이런 오해가 이웃과 사회를 위한 선한 일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되고, 그것이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잘못된 해석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이웃과 사회를 위한 봉사와 헌신은 좋은 일입니다. 교회가 어려운 사람 도와주겠다는 것을 막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런 일에 관심이 있고 여력이 된다면 열심히 하시면 됩니다. 다만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는 것은 교회의 교회 됨을 나타내는 기준으로는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문제와 연결해서‘믿음의 실천’‘믿음의 열매’라는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별이 없다면 봉사와 헌신이 믿음의 판단 기준으로 자리하게 되고 교회의 가치와 자랑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은 예수의 개인적인 의로 끝날 뿐 교회와는 무관한 것이 됩니다. 결국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의로 인정하는 윤리와 도덕을 자기 의로 여기고 그것을 보람으로 삼고 믿음을 확인하는 심각한 사태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실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오늘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의를 하나님의 의로 오인하는 잘못됨이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말하되 십자가의 은혜를 멸시하고, 예수를 말하되 예수를 부인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심각한 사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의라고 생각되는 행동을 하기 전에 예수 안에서 이미 완성된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되었으니 의로운 일을 실천해야 하는 것 아니냐? 라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이러한 발상이 성경을 인간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신 이유는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창 6:1-12)는 말씀처럼 온 땅이 죄로 인해 부패하여 악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땅의 상태가 어려운 이웃에 대한 봉사와 헌신이 사라지고 살인, 강도와 같은 악한 범죄만 가득했다는 뜻일까요? 그러면 홍수심판 이후 수천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의 땅은 선한 일을 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으로 그때보다 선한 상태로 개선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창 18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창 18:23)라며 심판의 부당함을 제기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죄악이 성행하여 악하다 해도 그곳에는 악인과 다른 의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의 숫자를 두고 하나님과 타협을 한 내용을 아실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죄악이 성행한다 해도 그래도 의를 행하며 사는 의인은 존재한다는 것이 아브라함이 인생을 살면서 터득한 상식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웃에도 선하고 착하다고 할 사람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생각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 해도 이웃을 돕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고 선한 일에 힘쓰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는 것이 상식처럼 굳어진 우리의 판단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그런 사람에 대한 소식을 수없이 듣고 목격하고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악을 행하는 사람이 벌 받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벌이 아니라 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일맥상통한 태도입니다. 이유는 착하고 의롭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기준과 상식과 시각을 그대로 교회에 적용하기 때문에 죄와 의가 바르게 분별 되지 못하게 되고 결국 교회의 의로움이 성경을 벗어나 세상의 의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하나님과 다르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다만 자신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부당하다고 느꼈고 그에 대해 호소한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부당함을 수시로 느낄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선과 악에 대한 우리의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 기준에 맞는 선을 따라가면 거기에 우리가 원하는 구원과 복이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무너지면 하나님의 부당함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말대로 의인이 악인과 함께 심판받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드린 것처럼 의와 악에 대한 분별이 하나님과 다른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하나님께 의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의가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인정할 수 있습니까? 인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세상에도 의가 되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 여러분의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인간은 죄인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다’는 말이 불만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하나님이 의로운 것으로 인정해주시는 것이 있고, 믿음 있는 신자는 의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를 행하는 것으로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 더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시각에는 소돔과 고모라의 의인 숫자를 두고 하나님과 타협을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어떻게든 심판을 막아보려는 사랑과 헌신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의와 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신 또한 심판을 받아야 할 악에 속한 자임을 깨닫지 못한 채 심판의 부당함을 고하는 교만한 자였을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고 우리 모두의 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타협한 숫자는 의인 열 명입니다. 하지만 의인 한 명으로까지 타협했다 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있는 단 한 명의 의인도 없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세상이 추구하는 수준 높은 의를 동원하여 인간을 가르치고 훈련 시켜도 하나님이 의롭다 인정하실 이가 나타날 가능성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의인과 악인은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고 악하다고 하시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의인과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복과 저주는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분별하시는 의인과 악인에 대한 심판, 복과 저주는 반드시 실행될 것이고 실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가 되고 악이 되는 것은 언약의 관계에서 도출됩니다. 아브라함이 비록 하나님의 언약을 받긴 했지만, 언약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세상의 시각에서 의인과 악인을 이해했던 것입니다. 언약의 관계에서는 자신도 심판을 받아야 할 악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약을 모른 자는 의인과 악인에 대한 개념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세상 기준에 의한 의인과 악인을 그대로 고수한 채 하나님의 일과 믿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교회가 진리와 무관한 길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의 관계서 드러나는 의인과 악인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언약을 주시는 것은 인간의 힘과 방식으로는 하나님께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는 안되는 일을 하나님이 언약의 방식으로 이루시겠다는 의미가 언약입니다. 그리고 언약의 완성자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언약을 알았다는 것은 인간의 힘과 방식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언약이라면 의인은 인간의 의와 방식을 포기하고 언약의 완성자로 오신 그리스도만이 의가 됨을 믿는 자를 뜻합니다. 반대로 악인은 인간의 의와 가능성을 믿고 인간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가고자 하는 교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신자라면, 신자는 자기의 의와 죄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요? 구원받고자 하고, 세상에서 복과 평안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눈치채게 됩니다.
언약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현장에 들어와 있는데 그 현장을 바라보면서 자기 구원과 복에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예수 안에 있다면 심판이 당연한 죄인의 죄를 대신하신 예수님의 의와 은혜에만 마음이 집중되고 감사함만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죄 없는 의인으로 인정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되어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의를 위한 도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의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지 우리가 의로운 일을 함으로써 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님을 주지해야 합니다. 교회가 이것에 무지하기에 의로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의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울은 5:1절에서“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말합니다
육신은 무너질 장막 집이기 때문에 육신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것으로 의와 믿음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거할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집으로 우리에게 오셨고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영원한 집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안이 우리가 머물고 있는 세계라면 무엇보다 예수 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신 예수 안에 있는 관계로 함께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하나님의 언약, 언약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죄를 대신하신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 이 모든 내용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상태에서 교회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는 수준의 믿음만 나타내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의로 돌아오는 행동을 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에게 큰 손해가 될 만큼의 의는 피하고 적당한 수준에서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어떻게 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믿음의 열매가 되는 것인가?’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믿음이 있다면, 성령을 받았다면,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그냥 되는대로 살아도 되는가?’라는 자기 생각에 붙들려서 믿음에 걸맞은 행동을 찾아 고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의로운 행함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로운 행함을 도구로 사용하여 영광 받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죄를 알지 못한 분을 우리에게 보내어 죄를 대신 지게 하시고 그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알고 믿는 것이 하나님께 의가 되는 것이고 우리를 의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 예수를 아는 믿음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주의 드리고 싶은 것은 믿음을 여러분이 알고 있는 상식의 범주에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상식처럼 알고 있는 믿음의 세계가 있는데, 이 믿음의 시각에서 자신을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예수를 믿는다’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예수를 믿을 수 없고 믿지 않을 악한 존재가 자신임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라’는 믿음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가‘믿음 이후’를 말하며 하나님께 의가 되도록 말씀을 실천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믿음 이후는 없고 믿음의 능력에 붙들려서 자신의 죄인 됨을 자각하고 죄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가 기쁨이 되는 길을 가는 것만 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기 전의 인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선악과를 먹기 전의 인간은 죄인일까요? 의인일까요? 죄인도 의인도 아닌 그저 죄 없는 인간이었을 뿐입니다. 아직 선악과를 먹지 않은 죄 없는 인간이었을 뿐이지 의인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죄 없는 상태에서 삶을 살았지만, 의인으로 인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의인의 기준이 인간의 행함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 없는 인간이 아니라 의인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의가 되는 의인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향한 뜻입니다. 그래서 택한 자를 예수 안에 부르시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예수 안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신 예수님의 의가 넘치는 세계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증거된 예수님의 의를 믿게 하시고, 예수님의 의를 믿는 자를 의인으로 칭하시고, 하나님이 칭하신 의인으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예수 안에서만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말의 의미를 아시고 자기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만 찾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