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12.03 17:46

(105강) 닫힌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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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4:1-3http://onlycross.net/videos/eze/eze-44010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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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의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혔더라

2.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지니라

3.왕은 왕인 까닭에 안 길로 이 문 현관으로 들어와서 거기에 앉아서 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고 그 길로 나갈 것이니라

 

 

<설교>

성경은 인간이 추구하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고 배울 수도 없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인간이 납득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성경의 주인공으로 세상에 등장한 예수님을 죽였다는 사실이 성경의 세계, 즉 예수님의 세계를 이해하지도 납득하지도 못했음을 입증해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의 세계입니다. 반면에 세상은 육의 세계입니다. 육의 세계가 영의 세계를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생각에서 나와질 수 없는 세계가 곧 영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의 세계인 세상은 성경이 증거 하는 영의 세계를 용납하지 않고 거부하며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세계가 이해된다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경 이야기가 이해된다면 그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을 인간이 주인공이 된 이야기로 변질시켰거나 아니면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중심으로 삽니다. 세상의 모든 일도 자기를 중심으로 이해하고 신앙생활 역시 자기를 중심으로 합니다. 때문에 자신을 힘들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모든 것은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신 또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러한 인간성에 충돌되지 않고 오히려 이해된다면 그것은 인간이 중심이 된 인간을 위한 해석을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영의 세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영의 세계는 육의 세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영의 세계는 거룩하지만 육의 세계는 불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영의 세계 앞에 선다면 필히 육신의 무너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경험이 있는 자가 영의 세계인 성경을 이해하게 되는데, 이 모든 일은 우리의 자발적 의지와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영의 세계인 성경을 이해하고 납득하게 된다면 그것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게 되는 것이야 말로 성령 받은 증거인 것입니다.

 

 

바울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다면 당연히 육신의 시각에서 자신의 취향을 따라 사람을 인정하고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관심은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됩니다. 관심이 그리스도께로 향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일에 온 마음이 향한다는 뜻입니다. 자연히 자신의 행함보다는 그리스도의 행함에 초점을 두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행함 앞에서 자신의 행함은 의미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행하심에 대해서만 얘기하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의 행함은 이야기의 내용에서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만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면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결론이 내려지는 것이 성령이 개입한 인간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행함에 대해서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성전 이야기에서 에스겔 선지자는 천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면서 새로운 성전에 대해 보고 듣는 입장에 있을 뿐입니다. 완성의 상태인 성전 안에서 에스겔이 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의 세계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이루신 성전에 초청받아 부름 받은 입장일 뿐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전 안에서는 선지자다운 특별한 인격이 요구되지 않고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도덕적 삶이 요구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성전을 보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 취지가 무엇인가를 알아 그 사실을 전하는 것이 에스겔의 할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새로운 성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이 에스겔의 성전 이야기를 자신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무관하다는 것이 드러날 뿐입니다. 저는 지금 성전을 포함하여 성경의 이야기가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로 다가오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경 통독을 강조하고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좋은 신앙인 것처럼 오해하여 가르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성경이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몇 번 읽었는가와 상관없이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성경을 읽었을 뿐이지 성경이 증거하는 영의 세계로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1절에 보면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의 동쪽을 향한 바깥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혔더라”고 말합니다.

 

 

겔 43:4-5절을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간 뒤에 하나님의 영이 그를 데리고 안뜰로 들어가서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보게 됩니다. 에스겔은 성전 안뜰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절에서는 다시 에스겔을 데리고 성소 동쪽을 향한 바깥문으로 간 것입니다.

 

 

바깥문은 닫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 이유를 2절에서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지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가 들어온 문이기에 아무도 그 문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닫아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여호와께서 들어오신 거룩한 문이 더럽혀지지 않게 지키는 것이 성전이 된 신자의 직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기 때문에 신자의 마음에도 하나님이 들어오신 문이 있으며 따라서 그 문으로 다른 어떤 것이 들어오려고 하면 즉각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른 어떤 것이 세속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의 심령에는 하나님이 들어오신 거룩한 문이 있기에 그 문으로 세상의 죄악된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성전인 신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지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높아지고자 하는 세속적인 것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하나님만 높이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신자의 거룩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럴듯한 설명이고 해석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의미라면 얼마든지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성화와 연결하여 이해하면 더욱 더 신자가 마음에 두어야 하고 지켜야 할 내용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결국 성전으로 불리는 신자가 스스로를 성전다운 모습으로 지키기 위해 죄를 용납하지 말아야 하고 그렇게 해서 성화되어가야 한다는 것인데 과연 그것이 가능 하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가 실천하고 지키고 행해야 할 것에 대해 언급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지키고 행함으로써 신자다워지고 신자답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거나 아니면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지킬 수 없는 인간의 무능과 불의함에 대해 눈을 뜨라는 취지입니다.

 

 

여러분은 둘 중의 어느 쪽이라고 생각합니까? 전자의 의미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천함으로써 하나님께 인정받고 복을 받아 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등장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율법을 받고 율법 대로 살려고 힘썼던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그러한 사람들이 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일단 인간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그러한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본문의 내용이 그렇게 해석되어 사람들에게 이해되고 납득 된다 해도 바른 해석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납득한다는 것이 수상할 뿐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은 영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지 않고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들어오신 문이기에 닫고 다시 열지 못하며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선언되는 것은 닫힌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신분의 차이는 물론이고 행위의 여부에 따라 열리는 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을 전혀 예상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온갖 정성을 다 보이며 애원하거나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행동을 하면 감동하셔서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따라 활동해 주실 것으로 기대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들어오신 문을 닫고 다시 열지 못할 것이며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조치는 신에 대한 인간의 예상을 무너뜨려 버립니다. 인간의 어떤 행함과 실천으로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성경에서 만나게 되는 하나님은 인간의 예상에서 항상 벗어나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성경을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예상의 중심에는 바로 자기 자신이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도 하고 욕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으로부터 비난 받을 일을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고, 반대로 칭찬 받을 일을 하면 그 칭찬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중심이 된 인간의 예상이지만 그 예상을 깨뜨리는 것이 문을 닫으라는 하나님의 조치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감으로 성전은 여호와의 영광으로 가득하게 됩니다(겔 43:4,5). 그리고 문이 닫혀서 아무도 그 문을 열고 영광으로 가득한 성전으로 들어갈 수 없게 하셨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전은 이미 여호와로 인해 영광이 가득합니다. 그 영광이 사람으로 인해 더럽혀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가 문을 닫고 열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경우는 없다는 뜻입니다.

 

 

성전의 문은 닫혀 있습니다. 누구도 열 수 없습니다. 이러한 성전에 또 다른 문을 만들어 세우려고 하는 것이 현대 교회의 실상입니다. 닫힌 문이 아니라 인간에게 열려있고 인간 또한 얼마든지 그 문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다른 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가짜 문이기 때문에 비록 본인은 그 문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난다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착각이며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진 것일 뿐입니다.

 

 

문이 닫혀서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누구도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아 버린 것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국을 지금의 교회가 교회에 와서 예수 믿는다는 말만 하면 들어가는 곳으로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거기에 정성과 봉사 등의 헌신을 더하면 추가로 상급과 복을 받아 누리는 인간의 생각에 맞는 천국 아닌 천국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면 문이 닫힌 것으로 모든 문제는 종결되는 것입니까? 3절에 보면 “왕은 왕인 까닭에 안 길로 이 문 현관으로 들어와서 거기에 앉아서 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고 그 길로 나갈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아무도 하나님이 들어가신 곳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은 왕인 까닭에 문으로 들어가 여호와를 만나고 음식을 먹으며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나간다고 하는 것을 보면 닫힌 동문은 오직 왕에게만 열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왕이 바로 다윗, 우리의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닫힌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행함과는 무관하게 오직 그리스도의 지체로 선택 받은 자들에게만 허용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에는 예수님의 은혜 앞에서 인간의 행함을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평함을 누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누구에게나 가능한 보편적인 행함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고 뭔가를 보충하려고 합니다. 믿음을 행함과 연결시켜서 좀 더 믿음다운 믿음으로, 인간이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믿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욕구와 포부와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가능성들이 버무려진 가짜 믿음이기에 그 끝은 심판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계 3:7-8절을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그 분에 의해서만 열리고 닫히는 문이 있고 그것이 천국의 문이라면 우리는 천국 앞에서는 모두가 동일한 존재로 설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천국의 문을 열 수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심은 자연히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이 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구원의 문이라는 것은 다 안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방식으로 예수를 믿고자 하는 습성을 버리지 않습니다.

 

 

좀 더 인격적이어야 하고 선한 모습이 있어야 그리스도인답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것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게 관심을 두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것일까요? 선악과 먹은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자기관심의 증거들일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성령 받은 것으로 위장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성령 받음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아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죽은 자인 자신에게 예수님이 함께 하셔서 나를 데리고 천국에 들어가심으로 구원 받은 자가 되었음을 압니다. 말씀 또한 자신이 지킬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능력으로 살아 계신 말씀이 나를 예수님의 은혜의 은혜 됨을 증거 하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믿을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신자에게 현실은 밥 먹고 살아가는 일상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 일하심에 붙들려 있는 것 자체를 뜻합니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기 행함으로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서 천국에 갈 수 없는 자를 들어가게 하시는 은혜를 알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행함을 더해서 믿음을 믿음답게 만들어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죄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법을 모릅니다. 믿음은 자기 가치 향상을 위한 도구로 이용될 뿐입니다. 이것이 성령 받지 못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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