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6:1-2http://onlycross.net/videos/co2/co2-060102.mp4
<본문>
1.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설교>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것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신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음으로 홍수심판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물론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다는 행위에 관심이 가기도 하겠지만 방주를 만들게 된 것 또한 은혜 입은 상태임을 생각하면 노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창 6:9절의“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는 내용 때문에 노아가 본래 하나님과 동행할 정도로 믿음이 출중하여 의인이며 안전한 자로 인정될 정도였기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구원하신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간과한 것입니다.
노아도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는 인간에 대한 선언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노아의 구원은 노아의 자질이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당대에 완전하다는 인정을 받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의로움과 구원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 시대의 모든 인간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지 못함으로 심판을 받은 것이 됩니다. 따라서 노아 홍수는 악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보여주고 경고하고자 하는 취지라기보다는 세상이 존재하는 모든 이유와 근거가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 6:11-13절에 보면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당시 세상을 심판하신 이유였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노아 시대보다는 부패함이 덜하고 인간성도 나아져 좀 더 선한 상태로 개선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의 세상도 노아 시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 그때의 상태가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부패와 포악함을 따진다면 지금 당장 심판을 받아도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결과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보존되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는 단지 세상을 보전하겠다는 취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를 인간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은혜받을 수 없는 자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전파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은혜받은 나’가 아니라‘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초점을 두게 되는 것이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절에서 바울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어떤 의미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대개는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을 은혜받은 자다운 행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이유가 열매를 얻기 위해서인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교훈으로 눅 13장에 있는 포도원의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인용하기도 합니다.
눅 13:6-7절의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는 비유에서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을 은혜를 주신 것으로, 열매를 은혜 주신 자에게서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은혜를 주셨는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노아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말과 함께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열매 맺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노아 이야기는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잠든 것을 두 형제에게 알린 함을 저주하는 불편한 내용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런 경우 노아는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일까요? 아니면 은혜의 선한 열매를 맺음으로 인생을 마쳤다고 할 수 있을까요?
노아만이 아닙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한 것으로 해석한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인물들 모두가 은혜를 헛되이 받은 자로 심판에 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같이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전부를 생각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전부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지 못하면 한 구절 한 구절을 인간이 말하고 싶은 의도에 따라 왜곡하는 결과만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것이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았기에 은혜를 헛되게 하는 해석만 난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고자 해서 받게 되는 것이 아니고 받지 않겠다고 해서 거절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희망이나 선택, 수고와 노력의 여부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과 선택으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방법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바울도 은혜를 제대로 받으라는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1절은 2절의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는 말을 근거로 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2절을 이해하려면 바울이 인용하는 사 49:8절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는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사 49장은“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 곳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1절)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보면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핵심적인 방식입니다. 하지만 선택과 부르심을 구원에 초점을 두고 생각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선택과 부르심이라는 구원 방식은 단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방법을 설명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자신을 태에서부터 부르셨고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이름을 기억하셨다고 말합니다. 아직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이 이사야와 전적으로 무관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성품과 행위와 노력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행위에 의한 것이 선택과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에 태어난 후의 인간 됨에 의해 변동되지 않습니다. 애당초 아담 안에서 죽음의 존재로 태어난 인간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택과 부르심은 곧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인간의 조건과는 무관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지금까지 계속 들어왔던 내용이기 때문에 흘려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조건과는 무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받은 자로 존재하는지에 대해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은혜를 헛되이 받았음을 나타내는 방향으로 가게 될 뿐입니다.
사 49:6-7절을 보면“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왕들이 보고 일어서며 고관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신실하신 여호와 그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택하여 부르신 종이 있는데 그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셨다는 것이 8절의 내용입니다.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은 죄로 인해 바벨론에게 멸망 당한 형편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는 구원될 수 있는 어떤 조건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종을 택하여 부르시고 언약으로 삼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부르신 종이 구원의 언약이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종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사 49:9절을 보면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헐벗은 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가 택하시고 언약으로 삼으신 종으로 인해 혜택을 입은 자는 잡혀 있고 흑암에 있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구원에 눈을 뜨게 된다면 그것은 바벨론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이스라엘의 멸망이라는 흑암으로 집어넣으신 그 뜻을 알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단지 환경이 흑암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죄에 사로잡히고 흑암에 붙들린 상태였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의 때, 구원의 날로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착각했던 형식적인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구원은 이스라엘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약으로 삼으신 메시아로 베풀어지는 은혜의 사건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스라엘 되게 하시려고 바벨론에 사로잡히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때고 구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바울이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지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선함과 수고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는 지금의 때를 말합니다. 따라서 지금이 은혜받을 만할 때요 구원의 날이라는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변하지 않은 세상의 형편인 것입니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우리의 선함과 수고로 의를 이룰 가능성이 있는 때를 살아온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아시겠습니까? 아신다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왜 이런 말을 하는지도 아실 것입니다. 바울의 외적 조건을 핑계 삼아 바울의 사도 됨을 비난한 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언약으로 삼아 은혜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것을 헛되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비난한 행동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비난 자체가 여전히 인간의 외적 조건에 가치를 두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의 선함과 수고 등 외적 조건과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헛되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이 촉구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구원에서 날마다 죄의 권세에 붙들려 끌려가는 자신의 현실을 보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아는 자가 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는 말을 현재의 시대적 상황이 은혜를 받아야 하고 구원을 위해 힘쓰고 수고해야 하는 때인 것처럼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사고로 은혜와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나 은혜받았다’라고 자부한들 모두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심으로 인한 구원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 칭했습니다. 그리스도로 완성된 구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 안에 있는 신자가 할 일은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구원된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죄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고 끌려가면서 죄의 흔적만 나타내는 자신을 보면서 구원의 신비함을 느끼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형제를 판단할 자기 기준도, 형제를 비난하고 책망할 눈도 없습니다.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고 구원될 수 없는 나에게 베풀어진 은혜와 긍휼을 알고자 하는 것만으로도 쉴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금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0-21)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도 그리스도이고 하나님과의 화목도 그리스도 안에서 통용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신자로 부르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의 행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높이지 말고 하나님이 의로 여기실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만 모든 시선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께로만 향하고 그리스도만 높이는 것이 신자 된 자의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도구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만 높이는 것이 신자의 할 일이라고 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도 합니다. 할 일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면 실천하겠다는 그러한 발상이 은혜를 헛되이 받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말하면서도 시선은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에게 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할 일은 성령의 간섭으로 나와지고 맺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해서 지금의 자신의 처지가 죄의 권세에 붙들려 있는 것임을 알게 되고 구원의 은혜가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연히 형제를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이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임을 알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인해 나타나는 신자의 일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십자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사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사는 심판의 존재로 그리스도께로 끌려나가 은혜와 구원의 세계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와 구원의 세계를 배우고 알게 될수록 자신의 실상은 더 분명하고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형제를 비난하고 판단하는 자신에게서 그리스도를 판단하고 죽였던 유대인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에 머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