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6:11-13http://onlycross.net/videos/co2/co2-061113.mp4
<본문>
11.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12.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설교>
인간의 성품과 기질을 두고‘마음이 넓다’‘마음이 좁다’라고 많이 표현합니다. 누군가의 실수에도 화내지 않고 이해심도 많으며 힘든 일도 웃음으로 넘기는 사람을 가리켜 마음이 넓다 하고, 반대로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고 상대방을 이해하려 하지 않으며 자기밖에 모르는 편협한 사람을 가리켜서는 마음이 좁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마음이 넓어야 한다는 말도 많이 듣습니다. 마음이 넓은 것이 곧 기독교인다운 성품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보다 좋은 성품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들이 많습니다. 바울이 말한 성령의 열매도‘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 5:22-23)이기 때문에 신자가 성령을 받고 성령의 열매가 있게 되면 당연히 마음이 넓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벧후 1장에서도 신성한 성품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고 말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기독교인다운 성품이 따로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마음이 넓어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사실 지금의 기독교인에게는 마음이 좁은 것보다 넓은 것이 기독교인다운 성품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증거 해야 하는데 사랑과 용서는 좁은 마음이 아니라 넓은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이 좋으면 마음도 넓어야 한다는 뜻인데 과연 신앙이 인간의 성품, 넓은 마음으로 나타나는 것인지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바울도 마음을 넓히라는 말을 합니다. 11,12절의“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는 말을 보면 마치 바울이 마음을 넓혀서 교회의 비난에도 책망하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도 마음을 넓혀서 바울에 대한 비난을 그치라고 당부하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파벌을 만들어 서로 다투는 분쟁하는 교회였습니다. 자연히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 공격하게 되고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게 됩니다. 바울을 향해서도 예수를 만나기 전의 행적을 빌미로 비난하고, 글은 잘 쓰는데 말은 못 한다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마음이 좁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서로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그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의미로 마음을 넓히라는 당부의 말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는 말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넓은 마음을 뜻하는 것일까요?
빌 2:2-4절의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는 내용을 보면 우리가 이해하는 넓은 마음, 좋은 성품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말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품이 좋고 마음이 넓은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해야 할까요?
바울이 전한 복음은 우리 죄를 대신하신 그리스도 안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은 인간의 성품이나 성질과는 무관합니다. 이점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바울이 결코 좋은 성품을 가지라는 의미로 마음을 넓히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러한 해석은 십자가와 무관한 다른 복음입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이 신자다운 좋은 성품에 대한 미련을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그만큼 신앙을 성품적인 것으로 이해하도록 학습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면 성품이 예수님과 같이 변화되어야 한다면서 그것을 마음이 넓어지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소위 마음이 좁은 사람, 사소한 문제에도 화를 내고 관대하지 못하고 옹졸하며 다투기를 잘하는 것은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까? 이러한 생각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좁은 것으로 해석되는 인간의 기질과 성품이 예수를 믿게 되고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우리의 실상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13절)는 말의 의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우리가 스스로 마음을 넓힐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우리의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습니다. 분명히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는데 마치 주인이 따로 있는 것처럼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설령 마음을 넓히라는 말이 좋은 성품을 의미한다 해도 그 또한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관대하고 용서하는 성품의 마음을 우리가 원한 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에게는 소위 성직자라고 하는 목사에 대한 기대치가 있습니다. 거룩한 성직자로서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사다움이라는 말로 규범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목사는 항상 온유하고 겸손하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신자를 대하면서 예수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기준에 의해서 목사가 목사답지 못하다고 생각되면 ‘목사가 왜 저래?’라며 비난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바울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비난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주어졌던 고난이라는 여러 형편이나 사정들, 그리고 말이 시원하지 못했던 것을 포함하여 과거의 행적들까지 바울의 약점이 되어 비난으로 돌아왔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비난에 비난으로 부딪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온유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일까요? 본문의 내용처럼 마음을 넓혔기 때문일까요?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복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고전 1:1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라고 말합니다. 고후 1:1절에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일에 바울의 조건은 전혀 고려된 바가 없음을 말합니다. 세상 기준으로는 사도 될 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만이 아니라 신자에게도 해당됩니다. 신자 역시 하나님의 뜻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이러한 신자 됨에 담긴 과정과 뜻을 안다면 타인의 성품이나 행동에 시비를 걸며 ‘십자답지 않다’는 비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비난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예수 안에서 거룩한 성도로 부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 되게 하신 취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무지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고 교회가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알지 못하는 무지가 바울의 약점으로 생각되는 것을 트집 잡고 비난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너희 심정에서 좁아졌다는 말은 바울이 그들의 마음을 좁아지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부르심을 받아 신자 된 깊은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들에게 세워져 있는 가치관과 기준으로 바울을 판단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앙은 윤리와 도덕의 세계로 넘어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신자의 성품은 신앙과 비례 된다고 하면서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한다면 그 증거는 성품의 변화로 나타나야 하는 것으로 깊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성품이나 타인에 대한 태도들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합니다. 이 또한 자기 안에서 좁아진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의 성품을 염두에 두고 마음을 넓히라고 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넓은 마음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시고 이루시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구원의 세계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생각하면 우리가 가치 있게 여겼던 모든 것이 우리의 심정에서 전혀 가치 없는 것이 되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고 이루시는 영원한 세계는 곧 구원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의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은‘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에 관심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구원의 세계는 이미 십자가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예수 안에 부름 받은 신자는 자신이 어떻게 구원의 완성에 참여되었는가에 마음을 두면 됩니다. 이것이 마음을 넓히라는 말에 담긴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까?’에 마음을 두면 시선은 자연히 자신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안다 해도 자신이 믿음 가운데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신앙생활을 살피면서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채워야 한다는 것이 구약적 관점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믿음으로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이 이미 나름대로 구축되어 있습니다. 거의 모든 교회가 모범적인 신앙생활로 인정하는 주일성수, 기도, 헌금 등입니다. 이러한 기준으로 자신을 살피고 타인을 살피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비난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 구원에 관심을 두고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심정 안에서 이미 좁아져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 5:59-60절에“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입니다.
스데반을 죽인 사람들은 마음이 좁고 편협하고,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하는 스데반은 마음이 넓었다고 해야 할까요? 스데반은 자신을 죽인 자들이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를 보지 못하는 어둠으로 본 것입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에 대해 넓어진 마음이고 이 마음으로 자신을 죽인 자들을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에 대해 넓어진 마음은 자신 역시 어둠의 존재이며 예수님이 아니면 구원될 수 없는 불쌍한 존재로 보게 합니다. 성품이 좋고 신앙생활에 열심이 있다 해도 그러한 것들이 자신을 불쌍함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음을 알게 합니다. 사람의 불쌍함이 보이는 세상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어둠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8-10절)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마음을 넓히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둠에 속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셨고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비밀을 알게 하시면서 가치 없는 불쌍한 존재를 끌어가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존귀하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날마다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어둠이라는 실상이 폭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둠이라는 자기 실상을 보지 못하는 소경 된 자들은 자기 기준에 가치 있는 것을 도구 삼아 신앙이 좋은 것처럼 행세하게 됩니다. 그것이 어둠인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의 약점을 찾아 비난하는 것입니다. 좋은 성품을 신앙의 성숙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성품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성품이 좋지 않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격이 왜 그래?’라는 말로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 영광을 모독하는 어둠의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현대 교회의 실상입니다.
누가 신자일까요? 무엇이 마음이 넓은 것일까요? 사도가 고백한 것처럼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시고 거룩한 신자로 부르신 주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결코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과시하고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주만 바라보기 때문에 타인의 어떤 조건이나 모습을 두고 판단하고 비난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말씀으로 폭로되는 자신의 악함을 고백하며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감사하는 것이 마음을 넓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