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7 16:43

(41강) 하나님의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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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6:14-18

고후 6:14-18http://onlycross.net/videos/co2/co2-061418.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4.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7.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설교>

사도 바울은 신자를 가리켜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합니다. 16절에서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내용에서 언급된 것처럼 신자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말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독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 외에도 고전 3:16절에서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하고, 2:21절에서도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라고 말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입니다. 그래서 신자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칭하는 것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답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에 실감이 되고 확신이 있습니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생각하면나는 하나님의 성전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거룩 보다는 거룩하지 못한 모습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도 바울이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우리는이라는 말에는 사도들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거룩한 성도 된 모든 교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도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많은 문제가 있었던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으로 말하는 것은 성전에 대한 바울의 개념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거룩하지 못한 삶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떤 의미로 신자를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으로 말하는 것일까요?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이 유일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이 친히 거하시는 가장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이방인 신자 역시 예루살렘의 성전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바울이 신자, 즉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칭하는 것은 새로운 성전에 대한 선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함께하는 모임이 성전이라면 예루살렘 성전처럼 보이는 건물은 성전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한국교회에 깊이 만연된 성전 개념은 유대인의 예루살렘 성전 개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예배당 건물에 집착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예배당, 성전에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유아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배당을 성전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고 집착하면서 자연히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바울의 의도는 무시되고 묻혀 버립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 개념으로 해석하는 오류만 범하는 것입니다.

 

 

성경 해석에 오류가 있다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마음 두기를 바라는 바울의 뜻도 무시됩니다. 다만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에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의미로 다르게 고쳐져 성경이라는 옷을 입고 사람들을 다른 길로 끌어가는 것입니다.

 

 

해석에 오류가 있다 해도 예수만 잘 믿으면 되지 않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오류가 있고 곡해된 성경 해석을 따른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세계 밖으로 나가서 자기의 길을 간다는 뜻입니다. 성경 해석에 오류가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르게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인데 오류가 있는 해석으로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만나게 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만 초점을 둔 바른 해석이 중요한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은 신학교에서 성경을 배운 목사 개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사이비적인 해석만 아니라면 괜찮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성경 지식에 부합되고 듣기에 좋은 말이면 옳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결국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본질을 놓치고 유대 종교와 다를 바 없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14,15)라는 말을 했습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말을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불신자와는 뭐든 같이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신자는 불신자를 사귀지 않아야 하고 동업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옳다면 바울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말하는 신자는 도무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할 수 없습니다. 미국에 코리아타운이 형성되어 한국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것처럼 신자들끼리 거주하는 도시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이 성경 해석의 전형적인 오류입니다. 문자에 치우친 자구적 해석의 표본인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고 생활할 수 없습니다. 좋든 싫든 사람을 만나야 하고 필요에 따라 사람을 사귀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믿는 자 믿지 않는 자를 구별해 가며 사귀지 않습니다. 물건을 살 때 하나님을 믿는지 묻고 믿는 자에게서 사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물건을 파는 사람이 누구든 가격을 비교하고 더 저렴한 곳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생활 방식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것은 현대와 동떨어진 말로 다가오기 쉽습니다.

 

 

그러면 지금의 시대 상황과는 맞지 않은 말로 간주하고 넘어가면 될까요? 하지만 성경은 시대 상황에 맞추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적용됩니다. 그 때문에 시대가 다르고 사회가 다르다 해도 사람이 다르지 않은 이상 성경은 모든 시대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신자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 때문에 세상을 사는 일에 불편함이나 불이익이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얻게 되는 이익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이라 해도 교회는 물론이고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는 아무 혜택이 없다고 생각되기에 시큰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성경의 내용으로만 기억되어 있을 뿐이지 성전으로 존재하고 성전으로 사는 문제에는 무관심한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방식은 자기 편리와 이익입니다. 사람을 사귀든 무엇을 하든 마음에 맞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살핍니다. 신자라고 하는 우리의 삶의 방식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세상을 사는 방식은 같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모두가 존재 가치를 자신에게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가치도 나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에서 찾습니다. 복을 받아 편안하고 부요한 삶을 살게 되지는 못한다 해도 힘들고 어려울 때 마음에 평안과 위로가 되고 힘을 주는 믿음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십자가만 추구하는 믿음은 인기가 없는 것이 자명합니다. 외면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하고 벨리알(가치 없는 자)과 조화되며, 어둠과 사귀는 것입니다.

 

 

다시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하고 벨리알과 조화하며 어둠과 사귄다면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모두가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16절에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는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두루 행하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두루 행하시는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이 신자를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거하시고 하나님이 두루 행하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의 백성 된 존재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가치 없는 저주의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거룩한 존재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신자라 해도 얼마든지 믿지 않는 자와 일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사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저 사람과 사귀면 내 인생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나에게는 두루 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 됩니다. 신자는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이 잘 안된다 해도 여전히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놓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루 행하신다는 사실보다 나를 위해서 하는 나의 일에 더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전인 신자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믿지 않는 자와 함께 할 때 항상나는 신자다. 나는 하나님의 성전이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안에서 사라지지 않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인간은 부정한 존재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부정함을 덮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였다는 은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은혜가 없는 믿지 않는 사람과 함께하고 대화를 한다 해도 조화되지 않고 같은 방향의 대화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 인생에 도움 되는 것에 가치를 둡니다. 현재의 삶을 평안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에 모든 가치를 두고 그것을 얻기 위해 열심히 살아갑니다. 만약 가치를 두는 그것이 없거나 남들보다 적으면 낙심하고 불행을 느낍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는 예수님에게 모든 가치를 두는 자로 존재합니다. 속에 그리스도가 계신 자로 사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무엇이든 속에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것이 신자의 정체성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전 5:9-10절을 보면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바울은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라는 말로 우리가 쉽게 범할 수 있는 오해를 차단합니다. 행함이 아니라 방향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신자는 믿지 않는 자와는 다른 내용을 가지고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 탐하는 자들, 속여 빼앗는 자들, 우상숭배하는 자들의 삶의 방향은 어디로 향해 있을까요?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즐거움과 이익과 행복에 목적을 둔 자기를 위한 삶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면나는 이런 사람과 다르다. 나는 음행하지 않고 속여 빼앗지도 않고 우상숭배도 하지 않는다며 자신에 대해 말한다면 바울의 말대로 세상과 멍에를 함께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믿는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음행을 피하고 타인에게 해를 주지 않는 삶에 힘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가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쉽게 잊는 것이 이것입니다. ‘무엇이 나를 그리스도께로 가게 하는가?’보다죄가 되는 악한 행동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악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께로 가는 삶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이것은 자신의 선행과 실천으로 그리스도께로 가겠다는 자신의 행함으로 맺어질 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가게 하는 것은입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세상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알았던 나 또한 나를 위해 하나님을 찾았을 뿐임을 알게 되면서 도덕과 선행이라는 껍질이 깨어지고 어둠에 속한 죄의 존재로 드러날 때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두루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5:20-21)는 말을 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것은 교회가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방향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가르치고 추구하는 것은 죄의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고, 불법과 함께하고, 어둠과 사귐에 있고, 벨리알과 조화하며, 우상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하면 과연 이해할 사람이 있을까요? 여러분은 이해되십니까?

 

 

죄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가게 하고 은혜를 더욱 넘치게 한다고 해서 죄에 대해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죄 자체가 그리스도께로 가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게 하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든 악하게 살든 인간은 저주받을 존재이고, 그 모든 저주를 대신 지신 예수님의 은혜가 속에 자리한 그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신자에게 유일한 가치는 그리스도입니다. 도덕적인 삶이 우리를 신자 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신앙생활의 열심이 신자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예수 안에서 거룩한 신자 되게 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인 신자는 세상의 조건이나 인간의 조건으로 사도다움, 신자다움을 판단하지 않게 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조건이나 실력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세상과 멍에를 함께 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악함을 판단하고 드러낼 자로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일은 성령이 깨닫게 하시는 우리의 악함에서 나 자신을 저주받을 자로 보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두루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기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마음이 향하게 됨을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인 신자로 사는 것이고 세상과 멍에를 함께 메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입장과 형편에 있든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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