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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7:5-11

고후 7:5-11http://onlycross.net/videos/co2/co2-070511.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5.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6.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8.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설교>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방식으로 구원하신 뜻이 무엇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기독교인에게는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답으로 굳게 학습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뜻에 대해서는 아예 고민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십자가에는 죄 용서도 있고 구원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본래의 뜻이 인간의 죄 용서와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을 보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누구라도 십자가를 죄 용서와 구원의 시각에서 이해하는 것을 정답으로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의 존재 가치를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의한 이해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서 인간의 가치는 죄가 용서되고 구원받는 것으로 확보됩니다. 이러한 욕망이 십자가를 자기를 위한 죄 용서와 구원을 위한 도구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피 흘려 죽으신 것도나의 구원을 위하여가 됩니다. 이러한 인간의 욕망 때문에 외면당하는 것은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본래의 뜻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십자가를 자기 구원과 영광을 위한 것으로 움켜쥐고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자기를 위하여라는 욕망으로 가득한 것을종교라고 합니다.

 

 

1:13-14절에 보면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믿음과 구원과 성령의 인치심과 죄의 속량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한 것으로 말합니다. 우리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바울에게는 자기 영광이 없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잡으러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도 십자가를 전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알았을 뿐 자기 영광은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복음은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1:10-11)라는 말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교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의의 열매를 가득히 맺을 수 있도록 성령의 도움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의의 열매로 가득한 자신을 꿈꿉니다. 이유는 의의 열매로 가득한 것을 신앙인으로서 가치 있는 모습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 위한 의의 열매를 말하는 것이지 인간의 존재 가치에는 그 어떤 의미도 두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믿음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자 된 자신의 가치와 영광을 얻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해 예수님은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12:43)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자신의 가치와 영광을 추구하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이것은 죽는 순간까지라도 놓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래서 자기 영광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신앙생활에 매진하여 믿음 좋은 기독교인으로 인정받는 것으로 자기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이 인간의 욕망으로 연결됨으로써 말씀을 실천하고 선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를 훼방하고 멸시하는 결과로 초래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태의 이유는 죄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죽은 자일 뿐입니다. 이것이 죄에 대한 안목이 있는 자가 알게 되는 인간의 존재성입니다.‘인간은 죽었다는 것으로 인간은 쓸모없는 존재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자신의 가치와 영광을 챙기고자 하는 것이 선악과 먹은 피조물의 피조물 됨을 알지 못하는 무지입니다.

 

 

하지만 무지하다는 자신의 현실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마치 복음을 알고 예수도 알고 믿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참된 믿음의 세계를 훼방하는 것이 종교인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교회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으면서도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의 자식으로 취급받았던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훼방하고 멸시하는 것을 고린도 교회처럼 분쟁과 파벌과 부끄러운 수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지 마십시오. 물론 고린도 교회에서 드러났던 문제들은 교회로서 옳지 않은 것들입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벗어버릴 수 없고 극복할 수도 없다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 말은 고린도 교회와 같은 문제가 실제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고린도 교회와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도록 드러나지 않았을 뿐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교회가 고린도 교회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는 우리에게 보낸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편지를 받아서 읽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편지를 보는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지금은 아무 문제 없다는 태도로 읽는다면 바울의 편지는 고린도 교회를 교훈 삼아 자신을 지키고 경계함으로써 문제없는 교회로 만들기 위한 취지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성경이 좋은 교회 되기 위한 하나의 지침서로 전락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멸시하고 훼방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는 우리의 감정과 판단으로 쉽게 대할 것이 아니라 바울의 안목이 무엇인가부터 먼저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교회를 바라보는 안목으로 교회로 함께 하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썼을 때의 형편은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5)는 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어려움과 환난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심적인 두려움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문제는 바울을 낙심하게 하기에 충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바울처럼 믿음 좋은 사람이 낙심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믿음의 역사와 역할이 우리를 두려움과 낙심이 없는 자 되게 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한다면 바울이 낙심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바울을 위로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6,7)라는 말로 보여줍니다.

 

 

문제만 있었던 교회가 오히려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위로로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 교회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위로에 대해서도 쉽게 생각합니다.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9)는 말에서 바울의 편지를 받은 고린도 교회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이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교회가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였으니 이제는 바른 교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로 위로가 된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편지가 교회의 잘못을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하였다는 것 때문에 위로가 된 것일까요? 어느 쪽이든 그러한 위로는 인간의 행함을 의지하는 것일 뿐입니다. 교회가 회개하였다는 행함, 회개하게 하였다는 자기 행함에 초점을 두는 것일 뿐입니다.

 

 

9:32-33절을 보면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시온에 두신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는 십자가를 말합니다.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함을 의지하여 십자가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부딪칠 돌에 부딪혀 깨어질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회개든, 기도든 믿음의 행위로 간주하는 것을 들고 십자가로 나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를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자기 공로와 의를 내세워 복을 받아 챙기는 수단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신앙을 의지하는 인간에 의해서 십자가는 멸시받는 것이고 이것이 악한 마귀의 속성인 것입니다.

 

 

8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편지를 아예 무시해 버린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처음의 편지에는 교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책망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편지로 인해 교회가 근심하게 된 것을 알고 후회했던 것 같습니다. 교회를 근심하게 하려는 의도로 책망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쓴 바울의 의도는 교회가 십자가 은혜를 알고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전 4:14)는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런데 바울의 의도와 달리 교회가 자신들을 부끄러워하고 근심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편지를 쓴 것을 후회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후회는 잠깐이었습니다. 편지가 그들을 잠시만 근심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9,10절을 보면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근심이 근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회개함에 이르게 하였고 그것이 바울에게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으로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근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처음에는 자신의 편지가 교회를 근심하게 했다는 것 때문에 후회했습니다. 하지만 디도를 통해서 교회가 회개에 이른 것을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근심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하나님의 일이었다는 사실이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가 근심하는 것을 믿음 밖에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근심이 되는 어떤 일에서도 근심하지 않고 마음이 평안한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을 믿음이 강하고 구원받은 신자의 증표로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근심을 극복할 수 없음을 생각한다면 결국 자신이 근심한다는 것이 또 하나의 근심으로 자리할 뿐입니다. 근심하는 자신을 근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근심하지 않고 근심을 이기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시각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세상 근심이고 사망을 이루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근심에는 십자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근심으로 인해서 자기에게 집착하며 자기를 위해 살았던 죄를 알고 자신이 깨어지는 십자가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사망을 이루는 근심으로 말합니다.

 

 

만약 믿음도 회개도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회개를 이루는 근심은 필요 없는 일이 됩니다.‘회개하라고 말씀하고 그 말씀대로 회개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믿음이 있고 회개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의 일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결과를 위한 과정이 있음을 생각하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라는 결과를 위해 근심이라는 과정을 동원하시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결과로만 마음이 갑니다. 결과를 이루고 결과를 만들어 믿음 있는 좋은 신자라는 자기 이름과 가치와 영광을 이루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라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신에게 매달려 살아가는 욕망의 흔적이라는 사실에 눈이 열리는 것이 죄를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십자가는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지하고 나아가야 할 은혜의 현장이라는 사실이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믿음과 인간성이 좋은 사람으로 바꾸어 놓지 않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목적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깨어짐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의 피로 증거되고 확인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담긴 그릇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뜻이 우리를 근심하게 하는 것이고 근심이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룬다는 것이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11절을 보면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되는 근심은 단지 심적으로 불안한 상태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를 간절함과 변증과 분함과 두려움과 사모함과 열심에 있게 하며 깨끗함의 자리로 끌어갑니다. 다시 말해서 근심으로 인해 감정이 파도처럼 요동치는 것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행위와 공로와 의를 의지했던 모든 것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자신이 깨어지는 것과 함께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의가 됨을 고백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회개이며 신자의 깨끗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우리의 깨끗함을 나타내는 십자가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근심하게 해서라도 십자가로 데려가 죄를 보게 하시고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셔서 주만 자랑하고 높이는 인생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어진 인생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십자가를 믿는 것으로 감사하는 그가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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