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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7:10-11

고후 7:10-11http://onlycross.net/videos/co2/co2-071011.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0.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설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우리를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믿음을 마음의 근심과 염려를 물리치고 평안을 누리는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고, 그 근심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는 바울의 말은 사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낯선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개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말은 회개가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이 되고, 회개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면 이 근심이 없이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가 없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자연히 관심은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무엇인가?’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이 단지 회개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기독교인이라면 수시로 회개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도 한 주간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라는 말을 빠지지 않고 합니다. 물론 그러한 회개는 형식적이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라고 할 수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형식적이지 않은 회개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금식하고 눈물 흘리며 진심으로 죄를 자복하는 것처럼 보여야 합니까? 이것은 행동을 의미 있는 것과 의미 없는 것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에 의미를 두고 그 가치를 나누고 차별하는 것이 의미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행동에 차별을 두지만 하나님께는 결국 심판받아야 할 목이 곧은 악한 자의 행동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행동을 모두 동일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악한 행동과 선한 행동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시각이고 안목이지 하나님도 동일한 시각과 안복으로 우리의 행동을 보시고 평가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 행동에 의미와 가치를 두며 목을 매고 자신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자기 변화에서 마음을 거두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대개나는 예수님을 안다’‘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언급된 예수님의 탄생이나 가족, 하신 일 등에 대한 정보를 습득한 객관적 지식이 있거나, 단지 교회 예배 모임이나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두고 예수님을 안다, 믿는다고 말할 수 없다는 이들도 많습니다. 문제는그러한 것을 제한다면 무엇으로 예수님을 알고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인격적인 만남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 , 의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지, , 의 세 가지 영역에서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있어야 진심으로 예수님을 알고 믿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도대체 지, , 의라는 인격적 만남이란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그런 만남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요?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많이 듣지만 그런 만남의 경험이 없이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니라는 말은 저로서는 성경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그야말로 금시초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 , 의의 만남, 인격적 만남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지식적으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가치관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제껏 세상을 살면서 자기가 경험하고 옳다고 여기며 배웠던 지식보다 예수를 통해서 얻게 된 지식을, 성경의 말씀을 더 신뢰하고 이 말씀이 정말 옳구나, 맞구나하며 동의하고 감탄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식의 만남의 경험이 있는 게 지식적으로 예수님을 만난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 경험보단 다른 누구의 말보다 성경에서 하는 말이 맞고, 옳다고 여겨서 그대로 따를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갖는 것이 지식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만나는 것은 인간이 제거할 수 없는 근원적인 불안감과 욕심, 또는 시기심과 자기비하, 절망감 등이 예수를 만남으로 인해 그 근본적 원인이 제거되고 그래서 얻게 되는 안정감 속에서 이전에 못 느꼈던 평안과 기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린이건 노인이건 누구든 살면서 감정적인 부분에서 상처를 경험합니다. 부모로부터의 거절감, 친구로부터의 거절감 등등의 감정적인 상처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런 불안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만지심으로 제거되고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감정적으로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의지적으로 만나는 것은 내 안에 다른 선한 의지를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일하심으로 내가 바라고 원하는 내 뜻이 분명함에도 내 의지가 꺾이고 성령이 원하는 뜻을 따르게 되는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경험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의지적인 경험은 선택의 상황에서나혹은 죄를 지으려 할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분명히 별거 아닌 A라는 죄를 지으려고 하는데 마음에서부터 이에 대한 반발이 생기고, 너무나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내 안에 다른 의지가 있다는 것을 성령이 계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세 가지의 경험이 모두 있을 때, 우리는 예수와 인격적인 만남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 한 가지만 있다면 건강하지 못한 신앙이기에 세 가지 영역에서 모두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런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은 이것이 한국 교회의 보편적인 수준이고 신앙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이 내용을 보면서도 성경에서 벗어난 오류가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럴듯하고 참고해야 할 신앙적인 내용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에 대해서, 여러분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줄곧 복음을 말하고 듣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복음의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나 지, , 의의 만남에 대한 앞의 말을 보면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좀 더 나은 인간 되는 것입니다. , , 의의 만남을 윤리와 도덕을 동원하여 멋있게 설명하고 포장한다 해도 드러나는 결론은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으로 변화하자는 것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에게서 변화가 없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도 믿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에게 변화는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인정하고 알아주는 가치 있는 인간으로의 변화는 아닙니다. 그러한 변화를 예수님과 만남의 결과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있게 되는 변화는 회개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우리에게서 이러한 회개를 이룬다고 말한 것입니다.

 

 

회개는 구원될 수 없는 무가치한 자로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예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용서의 은혜에 온 마음이 점령당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의 행동을 회개하고 고침으로 행동이 변화되는 회개는 사실 성경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회개는 인간의 종교성에 의한 자기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회개라는 자기 행동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행동을 의미 있는 것과 의미 없는 것,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으로 나누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자기 존재를 부각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행동에는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그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자신이 더 나은 인간으로 인정받기를 기대합니다. 즉 의미 있고 가치 있는 행동을 누가 더 많이 행하고 반복하는가로 인간의 존재 가치를 다르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르치고 강조하는 행함도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 좋은 신자임을 나타내는 증거로 여겨지는 행함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실천할 것을 가르칩니다. 물론 그 실천은 일회성이 아니라 반복적이어야 합니다. 필수적인 윤리와 도덕에 기독교가 신앙으로 인정하는 행함을 추가함으로써 신자다운 신자상을 구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의 변화가 없이는 참된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함께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회개와 함께 변화되는 것을 참된 신앙으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행동의 변화에 초점을 두고 그것을 신앙으로 생각했다면 고린도 교회에도 죄를 뉘우치는 회개와 함께 지금까지의 잘못된 행동을 고치는 변화를 촉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단순한 행동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지 않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결과로 나타나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게 되는 교회 됨에 마음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11절의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되는 근심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근심은 삶의 조건과는 무관합니다. 근심은 없을 것 같은 최적의 조건에서 생활한다 해도 하나님이 개입하여 간섭하시는 신자라면 반드시 있게 되는 근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근심이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룬다면 근심이 없는 것은 복이 아니라 심판이라는 결론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근심을 동원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으로 이끌어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근심은 우리로 하여금 간절하게 하고 변증하게 하고 분하게 하며 두렵게 하며 사모하게 하며 열심 있게 하며 벌하게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근심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근심하는 이유는 일맥상통합니다. 돈 때문이든 자식 때문이든 자신이 기대하고 원하는 삶을 살고 싶은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현실이 근심으로 자리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일이 근심이 될 때 그 내막을 파헤쳐 보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서 멀어지는 현실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세상 근심이 이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근심거리를 들고 기도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근심거리가 해결되면 자신의 존재 가치 또한 훼손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근심하면서 놓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아야 하는 비천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22:6-8절에 보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로 인해 조롱과 비웃음을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사울에게 다윗은 근심거리였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로 백성들의 인기가 다윗에게 집중되자 왕의 자리에 불안감을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자리라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 내려올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이 지켜야 할 자기 자리로 붙들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위협이 되는 다윗을 제거해서라도 왕의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 사울에게서 나타난 세상 근심입니다.

 

 

다윗에게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이 근심거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을 피해 도망치면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깊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사울은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을 상대하고 있다고 한다면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을 상대하는 사울은 자신의 근심거리인 다윗을 죽여서 왕의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근심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것을 세상 근심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처럼 근심거리인 사울을 상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능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과 사모함이 있게 되고 자신이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는 무가치함을 깨닫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근심입니다.

 

 

인간의 존재 가치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우상입니다. 그래서 우상 앞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비록나는 벌레와 같은 존재입니다라는 말을 한다 해도 속셈은 자신의 겸손과 믿음을 나타내려는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속셈은 욥 친구인 빌닷의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25:4-6)라는 말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자신의 가치는 놓지 못하면서 신앙적인 말로 욥을 이기려는 얄팍한 속셈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를 근심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 수많은 일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십자가의 은혜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할 것입니다. 세상을 상대하고 사람을 상대하면서 자신의 현재로 인해 낙심하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을 자격조차 없는 비천한 나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은혜로 감사하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 회개를 이루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근심입니다.

 

 

세상을 상대하고 사람을 상대하면 우리는 나로 인한 근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라는 인간이 본래 하나님께 미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사랑받기만 기대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고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이러한 인간의 무지에서 우리를 구출하시고 인간의 비천함을 아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근심입니다. 근심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라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결과로 나타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바울이 교회의 문제를 교회를 상대하는 것으로 해결하고자 했다면 교회로 인해 근심하는 것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잘못된 행동을 고치는 것으로 근심을 해결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교회의 문제에서 하나님을 상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문제 여부와 상관없이 심판받아야 할 비천한 인간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간섭이 기쁨과 위로가 됨을 말한 것입니다. 신자로 부름 받은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모든 일에서 세상도 사람도 아닌 하나님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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