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7:12-16http://onlycross.net/videos/co2/co2-071216.mp4
<본문>
12.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13.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14.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15.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16.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설교>
성경의 내용이 우리의 상식적 이해나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은 성경을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 20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랄 땅에서 아내인 사라를 누이로 속인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은 사라를 아브라함의 누이로 알고 데려가 아내로 삼고자 했는데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셔서‘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시고 사라가 남편이 있는 여자임을 밝히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비멜렉이 사라를 양과 소와 종들과 함께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면서 아비멜렉의 땅에 아브라함이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게까지 합니다.
이 일에서 억울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우리의 이해와 통념은 아비멜렉이라고 합니다. 아비멜렉은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인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아브라함 말대로 누이로 알고 아내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오히려 아비멜렉을 속인 것을 아브라함입니다. 따라서 모든 책임은 당연히 아브라함이 져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통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전혀 지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 집의 모든 태를 닫았다가 출산하게 하심으로 사라로 인한 벌은 아비멜렉에로만 돌아갑니다. 이것은 예를 하나 들었을 뿐 성경은 이처럼 우리의 통념으로는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우리에게 깊이 박혀 있는 이해와 통념으로 접근하여 해석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참된 뜻을 드러내는 것보다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억지로 조작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됨을 주지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에 일치되는 해석을 오히려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12절을 보면 바울이“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사건과 문제들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합니다. 교회 문제에서도 불의를 행한 자가 있으면 불의를 당한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가해자, 불의를 행한 자를 비난하며 피해자나 불의를 당한 자를 옹호합니다. 약자로 여겨지는 사람 편을 드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불의를 행한 자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다면 가장 먼저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지적하며 고칠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교회의 교회 됨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인데 불의를 행한 자로 인해서 그것이 훼방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상적인 바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불의를 행한 자가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도라면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 대해 들었을 때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불의를 행한 자에게는 회개하여 잘못된 행실을 고쳐야 한다며 권면이라는 것을 할 것이고, 불의를 당한 자들에게는 불의를 행한 자들을 용서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변화, 회개, 용서, 사랑이 있는 교회를 꿈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문제 있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썼던 것을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고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교회나 사람을 위해서 편지를 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바라보는 바울의 시각이나 생각이 우리와 전혀 다름을 보여줍니다.
바울이 교회에 편지를 쓴 이유는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불의를 행한 자를 권면해서 변화되게 하거나 문제 있는 교회를 문제없는 교회로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와 사람에게 관심을 두기 때문에 바울의 복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보다는 교회가 마음에 있으므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보다 유용성 있는 말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엇을 위해 편지를 쓰는 것일까요? 바울의 마음은“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라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바울을 향한 고린도 교회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고린도 교회 자신들에게 나타나게 하려고 편지를 쓴다는 것인데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9절의“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을 보면 바울을 기쁘게 한 것은 교회의 회개입니다.
지난주일 회개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단순히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뉘우치고 반성하여 고치는 것을 회개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고‘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호소한다고 회개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령과 상관없이 우리의 인간적인 양심과 감정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롬 2:1-2절을 보면 바울이“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판단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남을 판단하지 않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임을 알 수 있는데도 그러한 사실은 무시해 버립니다. 그로 인해 복음이 판단하지 말라는 세상 윤리로 변질합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행동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과 윤리는 전혀 다른 것이고, 윤리를 토대로 복음을 해석할 수 없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불의를 행한 자가 있고 불의를 당한 자가 있습니다. 누가 판단하는 사람이고 누가 판단을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불의를 행했다면 어쨌든 타인을 향한 판단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불의를 당한 사람은 판단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과연 판단을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믿음 없다는 판단을 받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맞습니다. 저는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라며 자신에 대한 판단을 순순히 인정할까요? 아마 내색은 하지 않는다 해도‘너는 얼마나 믿음이 좋아서’라며 반응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같이 판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판단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불의를 행한 자나 당한 자를 위해 편지를 쓰지 않은 이유입니다.
우리는 불의를 행한 자를 보게 되면 판단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의를 행한 자와 같이 불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불의를 행하고 당하는 자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같이 불의를 행한 자라는 것이 인간을 바라보는 바울의 시각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불의로 인해 예수님이 죽으셨음을 생각하면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인간은 가해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바울이 불의를 행한 자를 책망하고 불의를 당한 자는 위로하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면 회개가 있었다 해도 그것은 불의를 행한 자들에게서만 나타났을 것입니다. 불의를 당한 자는 자신을 피해자로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회는 회개해야 하는 자와 하지 않아도 되는 자로 구분될 것이고 불의를 당한 자는 불의를 행한 자를 판단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판단이라는 불의를 행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롬 2:4절을 보면“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회개를 단지 용서를 구하고 용서받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타나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회개가 바울에게 기쁨이 된 이유입니다.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도받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도받는 은혜의 현실을 깨닫기를 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에서 불의를 행한 자를 구별하여 그들을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것에 뜻을 두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자신들이 믿음으로 살고 있다고 여겼겠지만, 바울이 보기에는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믿음이 행위로 나타나는 것으로 알지만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행위가 아닌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호 6:6절을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제사와 번제는 행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행함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하나님을 아는가?’보다는‘행함이 있는가?’에 더 마음을 둡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확인하려는 것인데 이것이 믿음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행하므로 나타난다면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실망과 낙심의 대상일 뿐입니다. 편지도 불의를 행한 자들을 책망하는 내용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회개를 했다 해도 그들의 불의가 모두 사라지고 참되고 이상적인 교회로 변화하는 수준까지 도달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본문에서처럼 그들의 회개로 위로를 받았고 기뻐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바울의 복음을 따라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13절을 보면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라는 말을 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디도는 고린도 교회로 말미암아 마음에 안심함을 얻은 것이 있었고 그것이 디도에게 기쁨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디도의 기쁨은 바울이 받은 위로 위에 더하여져 더욱 많은 기쁨으로 다가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기쁨과 위로가 무엇으로 인한 것인가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14-16절의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는 말도 다르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불의함에 초점을 두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자랑이고 기쁨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에게는 있었던 것이고, 심지어 그토록 문제 많은 교회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한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 바울의 생각과 의도를 알게 됨으로써 우리 자신이 믿음에 있지 않은 자였음을 알게 되는 것이, 복음이 우리에게 역사하고 이루어짐으로써 나타나는 열매인 것입니다.
13절에서 디도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고린도를 향해 가는 디도에게 뭔가 불안감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디도를 불안하게 했을까요?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디도의 위치입니다. 디도는 바울에 비하면 한없이 낮은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과 디도의 말 중 누구의 말을 더 무게 있게 받아들일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습성도 사회적 위치와 권력 등을 고려하여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디도가 고린도 교회를 찾아가서 바울의 편지만 전하고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고후 12:18절의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라는 말을 보면 디도가 사도 바울과 동일한 성령으로 행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면 디도의 불안은 바울과 비교해서 낮은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의 말을 고린도 교회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라는 것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의 회개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편지와 디도가 전하는 말을 받아들임으로 회개가 이루어졌음을 생각하면 그것은 디도의 신분을 보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디도가 얻은 안심과 기쁨이었고 이 기쁨이 바울에게 더욱 많은 기쁨이 된 것입니다. 디도의 신분을 보지 않았다는 것이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면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룹니다. 그리고 회개는 인간이 죄로 인해 얼마나 비천한 존재가 되었는가를 아는 자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회개가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자신의 비참함을 절감한다는 뜻이고, 비참한 존재임을 알았기에 복음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간절하게 되고 죄에 대해 분함이 있으며 자신을 죽은 자로 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가 하나님 앞에서 고린도 교회에 나타나게 하려는 뜻으로 편지를 쓴 것이 바울의 의도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루어진 회개가 바울에게 큰 기쁨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가 회개했다는 것에 초점을 둘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회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인도하심을 나타내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나타난 고린도 교회의 회개는 그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도받고 있다는 증거물이었고 그것이 바울이 교회를 신뢰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사람을 신뢰한 것이 아니라 인자하심으로 불의한 자를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한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하면서 서로에게 불의를 행합니다. 그런데도 불의를 당한다고만 생각합니다. 수시로 남을 판단하면서도 그것이 불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비천하고 더러운 자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결국, 회개를 한다 해도 믿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종교적인 형식과 위선일 뿐이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지 못하고 믿음 없음을 알지 못하는 죄만 나타날 뿐입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좋은 행실이 있는 교회, 신자 되는 것이 바울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은 죄가 무엇인가를 알고 죄로 인해서 비천하고 더러운 자로 하나님 앞에 서는 신자 됨에 있습니다. 비천하고 더러운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자신을 인도하고 있음을 알고 그것이 기쁨과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쁨과 위로를 아는 신자가 행복한 것입니다. 이 행복이 여러분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