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8:1-6http://onlycross.net/videos/co2/co2-080106.mp4
<본문>
1.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6.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
<설교>
성경에서 연보, 혹은 헌금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면 설교자는 연보를 통해 증거되는 그리스도의 은혜보다 교인들에게 헌금을 독려할 성경적 근거로 사용하는 것에 관심 두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연보를 목사의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로 강조하여 교인을 연보라는 행함의 틀에 가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목사는 행함의 틀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인한 행함이라고 반박할 것입니다. 하지만 연보를 은혜받은 증거로 가르치고 인식하는 것 자체가 연보라는 행위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연보에 담긴 복음의 의미보다 행위에 더 가치와 중요성을 두면서 은혜를 빙자하여 연보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결국, 관심은 돈에 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믿음이 행함으로 증거된다는 말은 한국교회에서 거의 성경으로 굳어져 있습니다. 야고보서의“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라는 말을 내세워 행함을 믿음의 증거물로 당연시합니다. 하지만 과연 야고보가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헌금, 주일성수, 구제 등의 행함을 언급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런 것이면“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5-17)는 말씀 앞에서 행함에 대해 정당하다고 자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쓸 것보다 자신이 쓸 것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1,2절)고 말합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환난으로 인해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음에도 기근 때문에 어렵게 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연보 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난한 형편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한 마게도냐 교회의 본을 받아 고린도 교회도 연보에 풍성해질 것을 가르치기 위함일까요?
바울의 관심은 연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향해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해 증거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액수를 의미하는 풍성한 연보, 또는 강요가 아닌 자발적이라는 연보의 태도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는 AD 50년경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가뭄으로 인해 어려움에 빠졌던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교회를 돕기 위해 그리스와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고전 16:1-2절을 보면“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와 함께 고린도 교회에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를 부탁합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고린도 교회가 연보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게도냐의 연보를 내세워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았으면 어려운 교회를 도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면서 연보할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연보라는 행함만 있으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연보를 행함에 속한 것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연보는 행함이 아니라 은혜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연보라는 행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연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돕기 위한 연보는 사실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생활이 넉넉하다 해도 내 것을 타인을 위해 내어놓는 것은 아까운 일인데 본인 또한 생활이 어렵다면 더 힘든 것이 연보입니다. ‘나부터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을 두고 잘못되었다고 책망할 수도,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나를 버리고 남을 살리는 방식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에는 특이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2절에서 말한 것처럼 그들도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으면서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초점은 자연히 풍성한 연보를 한 마게도냐 교회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과 은혜받음을 보여준 실천을 칭찬하며 교인들의 연보를 유도하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특이하다고 하는 것은 자신들도 시련 가운데 있으면서도 연보를 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러한 연보를 가능하게 한 것을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으로 말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하게 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극심한 가난이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가난이라는 형편은 기쁨이나 연보가 아니라 낙심과 원망과 불평으로 이어지는 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마게도냐 교회에 시련과 극심한 가난이 있었던 것은 당시 그리스 지역에도 가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분명한 것은 어떤 상황이든 마게도냐 교회는 다른 교회를 위해 연보 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다는 것은 자신들의 형편보다 더 많은 액수를 연보 하였다는 의미의 표현은 아닙니다.
눅 21:1-4절에 보면“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풍족한 중에서 헌금합니다. 헌금해도 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기에 하는 것이고 만약 헌금을 하지 않는다면 생활에 지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 수중에 있는 돈이 아깝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가난한 과부와 같은 헌금은 불가능합니다. 생존을 위해 일하는 우리가 생존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헌금을 한다 해도 예수님의 뜻에 맞는 헌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자들 수준의 헌금이기 때문에 오히려 헌금에 대해 지적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다고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교회는 헌금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헌금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모조리 싹 다 갈아엎어야 하는 심각한 상황에 있다는 것입니다.
헌금이든 연보든 우리는 돈을 연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 헌금 하는 것도,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연보를 하는 것도 모두 돈을 바치는 행위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돈을 바치는 행위를 두고 믿음으로 인정하는 것은 없습니다. 때문에, 지금은 우리가 기독교에 굳어진 용어를 따라 헌금이라는 말을 하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들에 대해서는 헌금을 넣었다고 말씀하시는데 가난한 과부에 대해서는 헌금을 넣었다고 하지 않고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하심으로 부자의 헌금과 구별하십니다. 즉 돈으로 자신의 부요와 믿음을 과시하는 것을 돈을 넣은 헌금으로 규정하신 것입니다. 또한 헌금을 통해서 하나님께 복 받기를 기대하는 것도 돈으로 복을 확보하고자 하는 헌금일 뿐이기에 오히려 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연보라는 용어에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연보는 헬라어로‘값없이 주는 선물’을 뜻합니다. 한자로는 연(捐)은 버릴 연, 보(補)는 깁다, 돕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자신을 버림으로 남을 돕는다는 뜻입니다. 이것만 봐도 연보는 단순히 교회에 돈을 바친다거나 돈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 행위로 연결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남을 돕는다고 해도 값없는 선물로 주지 못하고 버린다는 뜻으로 돕지 못하는 우리에게 참된 연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연보를 신자에게 얼마든지 가능한 믿음의 행위로 가르치는 것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오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값없이 주는 선물로서의 연보, 자신을 버림으로 이웃을 돕는 의미로서의 연보는 예수님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연보로 인해서 구원받은 신자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매일 같이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의 은혜의 연보 덕분에 구원의 길로 가는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며 이 은혜는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넘치는 기쁨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성취됨으로 우리는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9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요와 가난이 재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소유한 재산을 가지고 부요와 가난을 따지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있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이 부요하시다는 것은 땅의 것이 아닌 하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영광이 예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모두 버리시고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예수님의 가난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가 용서되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은혜를 입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한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내용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삶에서는 실감하지를 못합니다. 이유는 세상과 똑같이 재물로 자신의 부요와 가난을 저울질하면서 신자에게 가장 중요한 생명에 대한 시각이 어두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말하면서도 그리스도 안이라는 생명의 세계에 대한 영광과 가치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계 2:8-9절을 보면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고 말씀합니다.
현실은 환난과 궁핍인데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합니다. 이유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안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는 교회는 환난과 궁핍과 시련 가운데서도 부요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알았고 그것을 세상의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부요라는 것을 알았기에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연보를 하는 것이며 이것을 두고 얼마를 연보했든 상관없이 풍성하고 넘치게 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연보의 의미인데 연보를 돈으로 연결하여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은혜의 연보를 멸시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속한 부요를 멸시하는 악한 죄입니다.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면서 관심은 돈으로 향해 있는 악한 사탄의 소리일 뿐입니다.
요 17:8-9절을 보면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에게 주신 것은 말씀입니다. 단순히 성경을 남기셨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아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이 구하는 것을 구하고 세상이 찾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알지 못하고 관심도 두지 않는 말씀에 마음이 향하고 말씀으로 전달되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으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이 기쁨은 환난의 시련에서도 굳건하기에 이 기쁨이 마게도냐 교회로 하여금 연보를 하게 한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 됨의 가치는 결코 세상의 것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부요와 가난으로 구분되지도 않습니다. 환난과 시련과 극심한 가난의 상황에 있다 해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자됨에는 변화가 없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속했다는 것 역시 변함이 없습니다.
때문에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둔다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생명에 속한 기쁨 가운데서 어려움에 있는 교회를 위해 연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연보는 연보 한 사람의 믿음의 행위로 자랑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일하시는 현장으로 확인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면 내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내 것, 나의 소유라고 할 것이 없다면 소유 때문에 분류되는 부요, 가난도 의미 없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으로부터 나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의 새로운 세상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를 통해서 신자가 속하고 거하게 된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연보 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거나 연보 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로 성취된 은혜의 세상에 속한 신자 됨의 부요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읽으면서‘연보를 하자’라거나‘가난해도 연보는 풍족하게 넘치게 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은혜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참된 연보를 하지 못합니다. 내 손에 있는 것을 내 것으로 간주하고 버리기는커녕 붙들고 지키는데 온 힘을 다하는 우리는 값없이 주고 버리므로 도와주는 연보를 하지 못합니다. 다만 예수님만이 가능한 연보 덕분에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먹고 마시는 것도 예수님의 연보 덕분입니다. 그렇게 가진 것이 없어도 부요한 자로, 많은 시련 가운데 있다 해도 그리스도가 넘치는 기쁨이 되어 오늘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극심한 가난에서도‘나는 가난하니까 남을 도울 수 없다’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부요 하게 된 부요로 연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약속받았고 성취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자는 하늘의 영광에 속한 부요한 자입니다. 이것을 믿고 부요한 자로 산다면 세상처럼 세상 것으로 자신의 부요와 가난을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로서 참된 부요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부요를 느끼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성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