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8:10-15http://onlycross.net/videos/co2/co2-081015.mp4
<본문>
10.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11.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12.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13.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14.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15.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설교>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를 보면 교회가 많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마음을 두고 생명이신 예수님을 사모하며 참된 믿음의 길로 가고자 하는 신자는 찾아보기 힘든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서 우리는‘믿음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나 자신에게 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런 물음을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고 지금껏 믿음 생활을 잘해왔고 잘할 것이라고 스스로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고린도 교회에 은혜의 연보에 대해 말한 바울은 본문에서 균등이라는 말을 합니다.“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13,14절)라는 내용을 보면, 연보를 넉넉한 자의 넉넉한 것으로 부족한 자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서로를 균등하게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균등이라는 말은 한국어 사전에“어느 한쪽으로 더하거나 덜함이 없이 고르고 가지런함”라는 뜻으로 풀이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연보를 넉넉한 것으로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주는 것으로 해석한다면‘어려운 사람을 돕는 연보는 서로를 균등하게 한다’는 말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열 개를 가진 사람이 두 개를 가진 사람에게 네 개를 보충해주면 서로 여섯 개를 가짐으로 균등하게 되는 숫자적인 의미에서는 분명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연보가 이러한 숫자의 틀에서 완벽하게 맞춰질 수 있을까요? 세상에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십억의 사람과 수많은 교회가 있는 상황에서 과연 숫자적인 균등이 가능할까요? 절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수십억 사람의 소유를 균등하게 맞출 수 없는 것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 습성은 비록 넉넉하다 해도 더 채우고 더 높은 넉넉함에 오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은 자신의 생존 문제입니다. 단지 생존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는 여유 있는 생존을 원합니다. 그래서 소유의 넉넉함에 마음을 두고 많이 소유하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제는 기독교인으로서 선한 일을 했다는 만족과 보람으로 삼을 뿐 다른 이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은혜의 연보를 할 수 없으며 균등하게 하는 연보도 할 수 없는 불의한 자로 확인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보를 언급하는 바울의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불의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불의를 도무지 확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드러나는 모습들 하나하나가 죄의 흔적밖에 없는데도 자신의 실체를 보지 못합니다. 충실히 교회를 다니며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면 과연 예수님을 살려 주는 영으로 바라보며 의지하게 될까요?
벧전 3:18절에서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의인이신 그리스도가 불의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부요하신 이로써 가난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불의한 우리의 죄를 십자가의 피로 덮으시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신 것이 가난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불의한 인간이 자신의 불의함에 관해 관심 두지 않고 아예 무시하는 태도를 가진다면 그리스도가 부요하게 하신 부요에 가치를 두고 부요를 나타내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에도 무관심하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떤 뜻으로 균등이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연보라는 방식으로 숫자적인 의미의 균등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면 바울은 한마디로 망상가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소유의 균등이 이루어진 곳은 없고, 많고 적음의 차이는 필연코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소유를 균등하게 하려는 목적의 연보라면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던 마게도냐 교회에는 연보를 부탁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그들은 넉넉하지 않고 부족했으므로 보충을 받아야 하는 형편에 있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시각이고 판단입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연보를 해야 할 형편’‘연보를 받아야 할 형편’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전히 세상처럼 소유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불의라는 것을 생각하십니까? 결국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은‘나는 불의하다’는 흔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불의함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습성으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다는 것에 대해서도 무관심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15절의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로 출 16장의 내용을 인용하여 균등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출 16장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배불리 먹던 때를 그리워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저녁에는 메추라기와 아침에는 만나를 주시면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각 사람이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그같이 하였더니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였는데, 오멜로 되었을 때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이 먹을 만큼만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바울이 말하는 균등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요?
만나는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었기 때문에 각 가정의 가족 수에 따라 거두는 양에 차이가 있게 됩니다. 가족이 다섯 명이면 다섯 오멜, 두 명이면 두 오멜을 거둡니다. 따라서 거두는 양의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남은 것도 부족한 것도 없습니다. 한 사람이 한 오멜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남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된 이유가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걷게 하신 소위 공평의 결과라고 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만나를 각 사람이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가족 중에는 어린아이도 있을 것이고 먹는 양은 어른보다 적습니다. 먹을 만큼만 거둔다면 단지 사람 수에 따라 거두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먹는 양도 계산해서 조금 적게 거두어야 합니다. 이렇게 거두었을 때 남은 것도 부족한 것도 없는 결과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만나를 배부름을 위한 양식으로 본다면 먹을 만큼 거두는 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더 많이 거두어 소유하고 싶은 탐심이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주셨다는 것보다 많이 거두는 것에 관심을 두고 남보다 적게 거두면 공평하지 않다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은혜가 아니라 배부름을 위한 양식으로만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서 많이 거두든 적게 거두든 남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세계의 경험은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육신의 배부름을 위해 먹는 양식으로 여기지 않았을 때 가능합니다.
신 8:3절을 보면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만나를 주신 하나님의 뜻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새로운 인간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신 것은 양식이 아니라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만나를 자기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거두었을 때 썩게 하시면서 하나님이 주신 만나가 인간에게 소유되지 않고 다스려지지 않음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배불리 먹던 때를 그리워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것은 자신들이 원하는 환경의 세상을 달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만나가 주어지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배부르게 하시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 일하시는 것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이런 오해를 차단하기 위해 만나를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고 남겨두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 먹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따라 삽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천국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은혜는 만나처럼 차별이 없습니다. 세상은 많이 거두고 적게 거두는 것에 차별을 두지만, 세상에서 거두고 남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많이 거두고 적게 거두었다는 차별도 의미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남지 않고 모자람이 없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 말을 부인하고 싶을 것입니다. 많이 거두어 많이 남은 사람이 있고 적게 거두어 모자란 사람이 있는 것이 세상 이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시각에서 자신을 보게 되면 모르긴 몰라도 많이 거두고 많이 남은 것이 아니라 적게 거두고 늘 부족하게 살아간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는 바울이 말하는 연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나도 부족해서 남을 도울 여력이 없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바울이 말하는 균등은 만나가 의미하는 새로운 세계를 말합니다. 소유한 재산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똑같이 만드는 균등을 의미하지 않는 것입니다. 설령 그러한 균등이 가능하고 이룬다 해도 문제는 자기 소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소유를 100으로 균등하게 만들었다 해도 자신에게 있는 100을 자기 소유로 여긴다면 그것은 자기 것으로 살아가는 불의한 세상일 뿐입니다.
바울은 연보를 통해서 균등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말합니다. 새로운 세계는 자기 소유가 없기 때문에 소유한 것으로 사람의 가치가 평가되고 차별되지 않습니다. 많이 거두고 적게 거두는 차이는 있지만, 그 또한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차별의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신자는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인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많이 거두고 적게 거둔 것이 천국을 바라보는 믿음에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남는 것도 없고 모자란 것도 없는 것이 인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균등의 의미입니다.
세상은 많이 거두고 적게 거둔 것의 여부로 사람과 인생의 가치를 저울질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말하는 우리도 세상의 습성대로 많은 것을 거두기 위해 삽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면서도 주신 분이 있음을 잊은 채 좀 더 많은 것을 거두기 위해 모든 힘을 기울입니다. 주신 분이 있음을 잊고 있기 때문에 무엇 때문에 왜 주시는지도 생각하지 않고 많이 거두었다는 것에만 가치를 둡니다. 이것이 우리가 불의한 자로 살아가는 선명한 흔적입니다. 이렇게 선명한 흔적이 있음에도 보지 못하고 세상이 말하는 윤리라는 선과 종교 생활 안에 자신을 감추고 신자인 척하는 것입니다.
균등은 세상에는 없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우리가 가치 두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 천국이 균등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연보에는 천국이 담겨 있습니다. 많은 소유를 가치로 인정하는 세상을 거부하며 균등의 세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각기 다른 것을 다르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서로 다릅니다. 하지만 똑같이 주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를 같은 천국을 사모하고 바라보게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로 부요한 넉넉함으로 다른 이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균등의 세계는 그리스도가 모두에게 만족이 되고 감사가 되는 새로운 나라입니다. 많이 거두고 적게 거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바라보면 거두어서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은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사라짐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을 매일 거두게 하시면서 배우게 하시는 은혜의 세계입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에 대한 바울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2,3절)라는 말에서 마게도냐 교회의 부요와 넉넉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아 부요하고 넉넉한 것이 아니라 소유에 가치를 두지 않는 부요이고 넉넉함입니다. 이 넉넉함이 예루살렘 교회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연보는 소유에 가치를 두는 우리로는 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소유가 아닌 영원한 생명에 존귀와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될 때 가능한 연보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부요해지기를 원합니까? 이 물음 앞에서 과연‘믿음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늘 불의하고 부끄럽고 초라한 자로 십자가 앞에 나올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대신 지신 주의 은혜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부요로 인도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부요에 참여하게 된 것이 균등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