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8:16-24http://onlycross.net/videos/co2/co2-081624.mp4
<본문>
16.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17.그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18.또 그와 함께 그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19.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20.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21.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22.또 그들과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는 그가 여러 가지 일에 간절한 것을 여러 번 확인하였거니와 이제 그가 너희를 크게 믿으므로 더욱 간절하니라
23.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24.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에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라
<설교>
신앙인과 종교인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앙인과 종교인은 다르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고, 신앙인은 구원을 받지만 종교인은 구원에서 멀어져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구별을 위해 신앙인과 종교인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종교인에 대해 이런 글을 썼습니다.
“종교인은 교회보다 건물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편리한 시설, 좋은 문화프로그램, 식당 등등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 등 어렵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그들을 치유하고 소망을 주셨지만 종교인들은 돈 많고 권력 많은 사람을 상전에 앉히고 대접합니다. 종교인들은 더 나아가 전도하고 선교하고 구제하는 일보다 교회 내에서 알콩달콩 자기들끼리 당을 지어 놀러 다니는 것을 더 좋아하고 교회 내에서 행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종교인들은 교회 안에서 사랑한다고 생색을 내지만 밖으로 나가면 냉랭하고 엄격하고 이중잣대를 들이댑니다. 종교인들은 구제를 통하여 자기만족에 도취하고 자기성과에 열을 올리고 드러내고 존경받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쓴 사람은 신앙인을 어렵고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을 치유하고 구제하고 복음을 전한 예수님을 본받아서 이웃을 사랑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도우며 예수님의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신앙인과 종교인에 대한 시각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신앙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모릅니다.‘종교인은 교회보다 건물에 관심이 더 많다’는 한 줄의 글에서도 신앙인에 대한 무지가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그의 글을 바꾸면‘신앙인은 건물보다 교회에 관심이 더 많다’라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로만 향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본인 자신이 신앙인에 대해 모르고 종교인의 자리에 있으면서 신앙인과 종교인을 구분하고 나름 종교인을 비판하는 글을 쓰는 것이 우습기만 합니다.
자신을 신앙인으로 간주하고 나름대로 무엇이 종교인인가를 설명하여 신앙인의 길로 가기를 촉구하고자 하는 의도로 쓴 글이겠지만 글의 내용은 같은 종교인의 행동을 두고 선한 행동이 있으면 신앙인, 선한 행동이 없이 자기만을 위해 살고 자기 인생을 즐기는 것이면 종교인으로 규정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면 신앙인과 종교인은 어떻게 구별될까요? 신앙인과 종교인의 공통점은 모두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인은 죄의 자리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의지하게 되는 것이고 종교인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차이를 알겠습니까?
이처럼 신앙인과 종교인이 소위 선한 행동의 여부로 구분한다면 어려운 교회를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연보는 신앙인으로서 신앙인임을 보여줄 수 있는 바람직한 행동으로 부각 될 것입니다. 결국 연보의 행위가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실천해야 한다는 정당성을 앞세우며 강요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돈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보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연보 하는 것이 더 선한 것이고 신앙인다운 행동이라고 했을 때 누구도 반박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종교인의 행태로 보고 종교인에게서 벗어나 신앙인의 길로 가기를 촉구하기 위해서 연보를 요구하는 것일까요? 고린도 교회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를 약속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신앙인다운 모습이라는 뜻일까요?
바울은 사실 교회가 연보를 하고 하지 않는 것에 목을 매지 않습니다. 연보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해서 교회가 교회 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사소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부분에까지 언급합니다. 심지로 연보로 인해서 자신들을 비방하지 못하게 하는 것까지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비방하든 말든 묵묵히 복음만 전하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20-21절을 보면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연보는 선한 일입니다. 그런데 선한 일이라는 것 때문에 조심하는 마음이 둔해질 수 있습니다. 신앙적인 선한 일이라면 신앙인은 당연히 참여하고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게 되고 무조건적인 실천만 요구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의식하는 것인지 조심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바울이 조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16-19절을 보면“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또 그와 함께 그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먼저 하나님이 디도에게 고린도 교회를 위한 같은 간절함을 주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디도 역시 사도와 같은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사도의 지시에 억지로 간 것이 아니라 간절함에 의해 자원하여 고린도 교회로 간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디도와 함께 한 형제를 보냈는데 그 사람은 복음 전하는 일로 인해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며 사도가 맡은 은혜의 일로 함께 동행하는 자라고 합니다. 디도와 달리 이름은 언급되지 않지만 복음을 위해 힘쓰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디도와 디도와 함께 한 형제는 바울에 의해 고린도 교회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말을 전하고 연보를 촉구하면 될 것인데 이들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굳이 언급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23절의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라는 말에서 디도를 사도의 동역자, 교회의 사자,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을 높이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의 말인데 디도를 이렇게까지 소개하는 이유가 궁금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연보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것인가를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연보를 하기로 약속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연보를 할 수 없는 형편이 있었겠지만, 만약 예수님이 연보를 받기 위해 천사를 보냈다면 어땠을까요?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하얀 옷을 입고 등에 날개 달린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부탁한다 해도 돈이 아까워서, 아니면 정말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연보를 거절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거절하지 못할 것입니다. 형편이 어려워 지금 가진 돈이 없다면 이웃에게 빌려서라도 연보 할 것입니다.
이유는 뻔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천사가 나타나 연보를 부탁한다면 내가 한 연보는 분명 예수님이 받으시고 예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연보 하는 것이지만 그의 생각에는 온통 예수님만 자리하면서 예수님에게 연보 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형편에서든 연보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은 자기 이익과 함께 사람만을 생각한다는 뜻이 됩니다. 사람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가 어렵지만 나도 어렵다는 이유로 연보에 주저하게 하거나 참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연보를 사람의 일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로 등장하는 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연보를 받으러 예수님이 오셨거나 천사가 왔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연보를 사람의 관계에서 생각하면 아무리 많은 액수의 연보를 한다 해도 그것은 종교인의 선행이고 실천일 뿐입니다. 이것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인으로 활동하는 것이 전부인 것을 신앙생활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보는 사람의 관계에서 실천되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로 인해 드러나는 것임을 전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디도, 그리고 디도와 함께 한 형제를 동료와 동역자의 관계를 넘어 교회의 사자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지칭하는 이유입니다. 디도나 그의 형제가 대단한 사람인 것을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간섭으로 인해 나타나는 일이라는 것에 시선을 두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죄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죄의 자리는 인간이 의를 선택하거나 만들 수 없는 무능력의 자리입니다. 저주가 당연하며 그리스도를 주로 믿을 가능성조차 없음을 실감하는 자리입니다. 이러한 죄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의미는 세상이 만들어 낼 수 없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가 활동하시는 현실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연보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일하시는 현실에 눈을 뜨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문제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이 일한다는 시각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됩니다. 파벌이 발생하고 은사로 인한 경쟁과 다툼 모든 것이 그리스도가 일하시는 현실을 부인함으로 나타나는 죄의 모습들이기 때문입니다.
20절에서 거액의 연보라는 말을 하는데 바울이 어느 정도의 액수를 거액으로 표현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연보를 두고 사도를 비방한다면 사도를 보내어 일하시는 예수님이 아닌 사람을 생각한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바울이 조심하고자 하는 것은 연보를 사람의 일로 바라보지 않게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실감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부문이 있고 하나님이 하시는 부분이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통합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우리가 일하는 것은 뭔가?’라는 불만이 있겠지만 우리가 일한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으로 유지되는 것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을 두고 경건하다거나 믿음이 있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구제를 위한 연보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닌 사람이 행하는 사람의 일이라는 시각에서 보게 되면 어려운 교회를 돕기 위한 연보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믿음의 행위로 높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신자는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하늘에 속했다는 것은 하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로 인해 하늘의 생명을 가진 자로 산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신자 됨이 연보나 기도 등의 행함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신자 된 신분과 혜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이라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연보와 같은 행함에서 벗어나지 못할까요? 그리스도를 말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절대로 세계에 대한 인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보지 않은 조건 없는 은혜가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하늘의 생명에 속한 자가 되게 하신 인생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시로 나에게 없는 것, 부족한 것을 생각하고 그것이 아쉬움이 되고 한탄이 되는 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쉬움과 한탄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나 홀로 사는 인생입니다. 홀로 살기 때문에 채우고 싶은 것으로 가득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은 연보 할 수 없다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연보로 나타나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어려운 교회를 외면하고 연보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돈이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살게 하는 참된 현실이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명 안에 있는 것이 신자 임을 하나님이 살게 하신 삶에서 배우지 못하고 놓친 것이 연보를 통해서 드러난 것이고 바울은 그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디도를 교회의 사자,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말하지만 디도가 그의 형제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뜻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일하심에 의해 움직이고 그리스도를 전하고 나타나는 도구라는 점에서 사자,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고린도 교회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는 여러 교회의 사자,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디도는 바울에게 동료인 것이고 동역자입니다. 바울 역시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믿기 전을 생각하면 디도는 바울에게 동료, 동역자로 불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함께할 수 없는 적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바울이 디도처럼 예수 믿는 사람을 자신의 동료와 동역자로 말하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일하심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존재하는 신자 됨이기 때문에 세상이 추구하는 돈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않고 은혜로 충만한 신자 됨에만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 연보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신자 됨을 생각하십시오. 비록 우리가 세상에 몸담고 있긴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도 그리스도의 일하심 안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진다 해도 그 또한 은혜로 충만한 신자 됨에 마음을 둘 기회로 다가옴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에게는 주어진 삶의 형편과 무관하게 은혜의 충만함이 실제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엡 1:22,23절에 보면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가장 존귀한 것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를 다시 살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십자가 은혜가 질서가 되고 서로를 대하는 마음이 되어 함께 하는 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십자가 은혜의 충만함을 소원하게 되는 것이고 이 교회를 두고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 수나 돈과는 관계없이 오직 십자가 은혜의 충만함 소원하는 교회만이 참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예배드린다는 것으로 교회된 것이 아님을 주지해야 합니다.
우리를 충만하게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은혜이며 은혜의 충만이 신자의 부요입니다. 그래서 연보는 돈이 아니라 은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일하시는 것이 참된 현실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의 형편에 아쉬워하고 한탄하는 것이 무엇을 바라보지 않는 무지함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