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9:1-5http://onlycross.net/videos/co2/co2-090105.mp4
<본문>
1.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2.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
3.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가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4.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가 준비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5.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설교>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바른 예배를 드리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예배는 우리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바른 예배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배당에 모여 의식적으로 행하는 예배를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로 여기는 것은 예배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바른 예배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예배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로 여기는 어느 것도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전도, 구제, 기도는 물론이고 고후 8,9장에서 바울이 다루고 있는 연보도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교인들에게 그것들을 신앙의 행위로 가르치며 실천을 강조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전도, 구제, 기도, 연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를 넘치고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한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돈에 매이지 않고 돈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연보는 우리 힘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분명한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항상 돈에 매여 있는 것이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보를 할 때도 연보를 해야 할지, 아니면 얼마나 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과 갈등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는 말을 합니다.
거의 모든 기독교인은 헌금의 의미를‘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로 인식합니다. 교회로부터 그렇게 배워왔고 도무지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헌금은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이기 때문에 정성껏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미리 준비하는 것을 정성껏 하는 헌금으로 이해하는 것이 헌금에 대한 한국교회의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연보를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연보 하려는 마음이 들었을 때 따로 떼어 모아 놓았다가 사도가 오면 연보 하라는 뜻일까요? 연보를 돈으로 인식하면 준비하라는 말은 돈을 미리 준비하는 것으로 이해될 것입니다. 물론 준비하라는 바울의 말은 표면적으로는 연보, 즉 돈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바울이 비록 연보를 말하지만 바울의 관심은 돈이 아니라 복음으로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돈을 목적으로 연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중심으로 표출되는 인간의 감정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인간의 모든 감정이 돈에 의해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변덕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고린도 교회도 처음에는 바울의 요청에 따라 연보를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약속을 그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연보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든 연보를 약속했던 처음 마음이 달라진 것이고 우리도 연보를 할 때 이런 변덕을 많이 경험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변덕을 지적하는 의미로 준비하는 연보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요? 연보를 결심했으면 결심이 변하기 전에 미리 준비하라는 뜻이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준비는 사실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연보를 미리 준비했다 해도 돈이 자기 수중에서 떠나지 않은 이상 돈을 향한 집착과 미련과 아쉬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6:2절을 보면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바울이 말한 미리 준비하는 연보는 매주 첫날에 각 사람이 자기 수입에 따라 미리 모아 두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연보를 미리 모아 둔다 해도 자신에게 큰 어려움이 있거나 돈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모아 둔 연보에 마음이 갈 것입니다.
‘우리 문제가 급하니까 먼저 모아 둔 연보를 사용하고 나중에 사도가 오면 그때 다시 연보 하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지극히 타당하고 합리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쨌든‘사도가 갈 때에 연보 하지 않게 하라’는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도대체 이런 연보의 방식이 복음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도의 말대로 각 사람의 수입에 따라 모아 둔 연보는 어떤 경우에도 사용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모아 둔 연보이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고린도 교회의 돈이 아니다.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사용하면 안된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연보의 참된 정신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개인의 문제로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의 말대로 매주 첫날에 수입의 얼마를 연보를 위해 모아 둡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고로 급하게 돈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도 모아 둔 연보는 이미 하나님께 바친 것이기 때문에 사용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일단 사용하고 나중에 형편이 되었을 때 한꺼번에 연보 하면 미리 준비하라는 바울의 말에 어긋나는 것일까요?
말씀드린 것처럼 한국교회는 연보를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로 인식합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이기 때문에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성의 일환으로 바울의 말에 따라 미리 준비할 것을 제시합니다. 심지어 예전에는 하나님께 바치는 연보는 깨끗한 돈으로 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돈을 물로 씻어 말리고 다림질을 하는 정성을 보여야 한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연보를 미리 준비하는 정성의 행위로 이해한 것입니다.
말 2:12-13절을 보면“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에서 끊어 버리시리라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봉헌물, 즉 연보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봉헌물이 적어서일까요? 아니면 정성이 부족해서일까요? 하나님이 봉헌물만 받지 않으시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영광을 돌리고 기쁘시게 하겠다는 온갖 명목으로 행해지는 절기를 지키는 것, 성회, 심지어 노랫소리, 즉 찬송까지 거부하십니다. 듣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암 5:21-23절의“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는 아모스 선지자의 외침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봉헌물과 찬송을 받지 않으신다는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하나님께 제사하고 바치는 것이 복과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그 이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선지자의 말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제사하고 봉헌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섬김이라고 고집하였습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말라기나 아모스 선지자의 말을 위시하여 성경에 등장하는 인간의 것을 받지 않으신다는 모든 내용을 무시합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는 등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었기에 받지 않으신 것이고 자신들은 문제가 없어서 기쁘게 받으신다고 착각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나 지금의 인간 됨이나 전혀 다르지 않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봉헌물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지금의 우리가 바친다고 하는 모든 것도 받지 않으십니다. 비록 정성을 다해 미리 준비하는 연보라 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죄를 자각한다면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연보를 포함해서 어떤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연보에 대해 길게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의 목적은 가능하면 여러 교회로부터 많은 연보를 거두어서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에 도움을 주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교회를 돕기 위해 연보 한다면 여러 사람이 참여하여 많은 액수의 연보를 거두어 가능하면 어려운 교회에 큰 도움을 주는 것에 의미를 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이 이해하는 구제와 다르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돕는 자가 있고 도움을 받는 자가 있는 것이 세상의 구제이고 그러한 구제에서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는 절대로 균등의 위치에 있지 못합니다. 반면에 바울은 연보의 의미를 서로의 넉넉한 것으로 서로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는 것으로 말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연보가 균등으로 연결되는 것은 복음의 시각이 아니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바울에게 연보는 돈을 거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약속을 어기고 연보를 하지 않은 것도 그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조성하신 기회로 여겼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연보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망이 없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자랑하였다는 것이 일 년 전부터 연보를 준비하는 소위 열심이었을까요? 바울이 말한 준비는 매주 첫날에 수입에 따라 모아 두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매주 첫날은 시작하는 날을 뜻합니다. 시작하는 날이면 수입이 없습니다. 수입에 따라 연보를 모아 두려면 매주 마지막 날이어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한 주간의 수입을 정리하여 얼마를 떼어 모아 두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수입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첫날에 모아 두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출 12: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유월절이 이스라엘에 새로운 시작이 되는 첫 달로 등장합니다. 애굽에서의 날은 모두 부인되고 어린양의 피가 새로운 시작이 되는 이스라엘의 탄생을 뜻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의 탄생은 이스라엘과는 무관합니다.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섬겨왔던 전통과 그들의 열심, 모든 것이 부인되고 오직 어린양의 피가 생명이 되는 은혜로 존재하는 이스라엘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 이스라엘의 모든 것은 어린양의 피의 은혜 안에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단 하나도 인간의 힘에 의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 안에서 모든 인간은 균등한 것입니다. 주어지고 손에 쥐고 있는 것이 각기 다르다 해도 가장 존귀하고 가치 있는 것은 어린양의 피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남보다 많이 가졌다 해도 어린양의 은혜 앞에서는 가치 없는 것임을 잊지 않는다면 서로를 은혜 안에서 은혜를 누리는 자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균등의 세계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바울이 말하는 매주 첫날의 의미를 생각하면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날은 시작을 의미합니다. 일한 것이 없는 날입니다. 그러한 첫날에 수입에 따라 모아 두라는 것은 연보는 우리가 일해서 얻은 수입에 따라 모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힘으로 일해서 얻은 수입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 수입으로 여기라는 것이고 그것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매주 첫날에 모아 준비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입을 은혜로 바라보는 것은 내 돈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실 가치가 없고 소유할 자격도 없는 인간이어서 본래는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데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매주 첫날에 모으고 준비하면서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매주 첫날에 연보를 준비하는 것은 내 힘으로 얻는 내 것이 있음을 부정하라는 뜻이고, 그런데도 내 것을 주장하고 싶은 죄의 욕망을 실감하게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는 바울의 뜻은 준비하면서 인간의 죄인 됨을 자각하면서 주의 은혜에 몰두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바울이 마게도냐인들에게 고린도 교회의 준비를 자랑한 것도 준비하는 열심 때문이 아니라 연보를 준비하면서 더욱 깊은 주의 은혜를 깨닫게 될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도록 권면하는 이유이며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참된 연보가 억지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연보하는 자신에게 의미와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연보를 할 수 없는 인간으로 연보에 참여하는 신자라면‘연보했다’는 의식으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연보에 의미와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연보로 도움받는 교회보다 더 낫다는 의식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도 내주 첫날에 연보를 모아 두는 것으로 은혜를 깨닫고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고전 16:3)라고 말하는 것도 준비하는 연보에 은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왜 필요했을까요? 인간의 삶이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배우고 깨닫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어느 하나도 본래 내 것은 없습니다. 내 것이어야 하는 것도 없고 내 것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전적으로 은혜 안에서 주어진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연보를 나의 소유를 떼어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그것을 믿음의 증거로 여기면서 자랑이 됩니다. 그래서 연보라고 행한 것이 참된 연보가 아니고 연보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무지로 인한 악함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악함을 조장하고 부추기며 선동하는 것이 지금의 교회 실상입니다.
바울의 말을 문자적 의미로 해석해서 매주 첫날에 수입을 모았다가 연보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설령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그것은 바울이 말한 준비의 의미가 아니고 참된 연보도 아닙니다. 오히려 매주 연보를 모으는 것에 의미와 가치를 두고 그것을 믿음의 행위로 간주하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자 됨이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의 시작임을 자각하며 주어진 것 하나하나에서 은혜를 실감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나를 살게 한다는 사실에 붙들리면 주님이 나를 돕는 연보가 되심을 알 것입니다. 이것이 준비하는 연보의 참된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