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2 15:49

(52강) 심고 거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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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9:6-7

고후 9:6-7http://onlycross.net/videos/co2/co2-090607.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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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설교>

지난주에 말씀드린 내용은 바울이 연보의 의미를 미리 준비하는 것에 두고 디도와 다른 형제들을 보내어 고린도 교회를 권면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연보를 돈으로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연보 할 돈을 미리 모아 두라는 취지로 들리겠지만 바울의 의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고전 16:1,2절에 보면 매주 첫날 수입에 따라 연보를 모아 두라고 합니다. 하지만 매주 첫날을 일을 시작하는 날로 해석하면 수입이 없는 날에 연보를 모아 두라는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한 말이 됩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이 애굽의 달력으로 3,4월에 해당하는 아빕월을 이스라엘의 1월로 새롭게 시작하게 하신 것과 연결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출애굽은 단지 애굽의 노예 신분에서 벗어난 해방이 아니라 삶의 방식과의 단절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애굽 정신이 아닌 유월절 정신이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되어 존재하는 이스라엘로의 시작을 말합니다. 이것은 온전히 어린양의 희생 덕분에 존재하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이스라엘에 유지되어야 하는 것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증거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린양 희생 덕분에 애굽에서 나오게 되면서부터 그들의 존재에는 하나의 단서가 붙게 됩니다. 그것은 죽음의 존재가 어린양의 죽음으로 인해 살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도 죄 없는 어린양의 희생 덕분에 산다는 정신이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이며 이러한 이스라엘로 새로운 시작을 선포하는 것이 유월절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은 애굽에서 하나님을 신으로 섬길 때의 방식을 유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죽음과 어린양의 희생을 경험한 이스라엘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애굽처럼 자신을 유지하고 지키는 것이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로 나타나고 증거된 하나님의 은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나의 소유라는 것도 의미 없는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죽음에서 살게 하신 하나님의 것으로 소유권이 전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수고하고 일하면서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이라는 일하심 덕분에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증거 하기 위한 존재로 새롭게 시작하게 하신 모든 것이 유월절에 담긴 내용이며,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일하심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이 일하심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잘 믿어서 그 결과물로 원하는 것을 받는 방식은 죽음과 어린양의 희생을 경험하지 못한 애굽에서 신을 섬기는 방식일 뿐입니다. 따라서 열심히 일해서 얻은 수입에서 얼마를 모아 연보 하는 것은 유월절 정신에서 어긋나는 것이고 자신을 예수님이 일하신 결과물로 여기지 않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수입이 없는 매주 첫날에 수입에 따라 연보를 모아 둔다면 그 연보에는 나의 모든 것이 나의 수고와 일하심으로 확보한 나의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의미가 담기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의 유월절 정신이 유지된 연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생각하면 바울은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함으로써 신자가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으로 맺어진 열매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의 내용을 다시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6)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는 바울의 의도를 모르면 결국 세상의 계산법을 따라 해석될 수밖에 없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물론 적게 심었는데도 농사가 성공하여 많이 거둘 수 있고, 많이 심었는데도 실패하여 적게 거둘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심은 것만큼 거둡니다. 문제는 바울이 어떤 의미로 연보를 준비하는 것을 심고 거두는 것으로 연결하여 말하는지가 의문입니다.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은 복에 대한 우리의 통념적 사고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은많다를 복으로 연결합니다. ‘복 받았다많이 받았다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수입이 백만 원인 사람보다 천만 원인 사람이 더 많은 복을 받은 것으로 간주 됩니다. 그래서복을 많이 받으려면 많이 심어야 한다고 하면서 많이 심는 것을 헌금을 많이 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을 교회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7)는 말로 연결하여 적게 심는 것을 연보에 대한 인색함과 억지로, 많이 심는 것을 즐겨 내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연보를 돈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어색함이나 이상할 것이 없는 당연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도 바울이 돈에 의미를 둔 연보를 말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으로 본문을 대한다면 바울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놓치고 있는 것을 연보를 통해서 지적하고 가르치고 있음을 먼저 염두에 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의도가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둔다는 말의 의미를 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적고 많음에 대한 우리의 인식입니다. 우리는 많고 적음을 양적으로 인식합니다. 그리고 적은 것보다 많은 것을 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당연한 욕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주시는 분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자연히적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연보도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적게 바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 많이 바치는 것은 믿음이 있는 것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양적 개념으로 이해되는 연보는 이미 참된 연보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21:1-4절에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다 해도 약 천원에 해당하는 두 렙돈입니다. 부자들이 아무리 인색하게 헌금했다 해도 두 렙돈보다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과부의 두 렙돈을 부자들의 헌금보다 더 많이 한 것으로 말씀합니다. 가진 재산에 비례해서 적은 액수를 넣었기 때문일까요? 두 렙돈을 과부가 가진 생활비 전부라는 상징적 의미로 계산하면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헌금은 누구든 소유 전부를 바치는 것일까요?

 

 

그러면 연보를 심는 것으로 비유한다면 가난한 과부와 부자 중 누가 더 많이 심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난한 과부가 다른 부자들보다 많이 넣었다고 하신 말씀에 따르면 두 렙돈이 많이 심은 것이 됩니다. 그러면 부자들은 적게 심었다는 뜻일까요? 결국 이러한 논리도 적게 심은 것과 많이 심은 것을 믿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하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많이 거두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많이 심는다는 의미로 많이 헌금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것은 헌금의 결과에까지 인간이 개입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겠다는 지극히 악한 발상입니다. 헌금을 소유를 많이 확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헌금이 인간의 욕망과 악함을 드러내는 증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보 이야기에서 우리가 한가지 잊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적든 많든 연보 할 수 있게 하신 분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보를 하는 것만 생각하고 연보라는 행위에 의미를 두지만 중요한 것은 연보 할 것을 주신 분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심지 않은 것을 거두고 거둔 그것으로 연보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고후 8:15절에 보면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만나를 거둔 이야기인 것은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만나는 이스라엘이 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심은 것은 애굽에서 먹은 것을 그리워하며 불평하는 죄였을 뿐입니다. 따라서 심는 대로 거두는 세상 이치대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면 이스라엘이 거둘 것은 심판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심지도 않은 만나를 거두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 심으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어린양의 희생으로 흘린 피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 희생의 피의 은혜를 심으심으로 죄를 심고 죽음을 거두는 것이 마땅한 이스라엘이 죽음에서 건짐 받은 생명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만나를 거두게 하시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았다는 말의 참된 의미는 자신이 심지도 않은 것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심지도 않은 것을 거두었기에 많이 거두어 남았다 해도 내 소유가 아니고, 적게 거두었다 해도 거둔 것 자체가 은혜이기에 모자라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 안에 유지되어야 할 유월절 정신입니다.

 

 

이제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내가 심고 심은 대로 거두는 세상 이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심지도 않았는데 거두는 새로운 이치로 사는 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지 않았는데 우리 안에 심어진 것이 있고 심으신 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두는 모든 것은 적든 많든 나의 수고와 무관한 은혜로 자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연보가 인색함이나 억지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나의 수고와 열심을 심어서 얻은 결과이며 대가로 간주하기 때문에 내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고, 내 것이기 때문에 애착을 두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연보 하는 것이 인색함이고 억지입니다. 반대로 즐겨 내는 것은 심지도 않은 것을 거두게 하신 은혜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는 연보에 액수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은 이러한 연보를 외면합니다. 내 것으로 돌아올 결과물이나 보상이 없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으로 연보를 하는 것이 자기 것을 위해 자기 것에 충성하는 인간의 악함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25장의 달란트 이야기에서 주인으로부터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장사하여 받은 대로 남겼습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감추어 두었던 한 달란트를 그대로 내어놓습니다.

 

 

이 종은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25:26-29)는 책망과 함께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고통의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과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장사해서 남긴 것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까요? 다른 점은 장사해서 남긴 종들은 자기 것에 아닌 것에 충성한 것입니다. 종에게는 자기 소유가 없습니다. 주인에게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았지만, 종의 소유로 준 것이 아니라 맡긴 것입니다(25:14-15). 장사해서 얼마를 남기든 주인에게 다시 돌아갈 주인의 소유입니다. 따라서 주인이 말한 종의 충성은 장사해서 남긴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위해 일한 것을 두고 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무엇을 해서 남긴다 해도 내 것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땅에 감춰 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인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대로 돌려주면 된다는 의도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국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악함은 주인에게 종속된 신분으로 내 것을 위해 살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열심히 연보 한 행위를 하나님을 섬기는 헌신과 충성과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고 액수에도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을 외면하는 것이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심보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적게 거두든 많이 거두든 거두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다만 내 것을 내가 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것을 심으신 덕분에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는 것이 나의 의가 되지 않는 것이고 거두는 것이 나의 의에 대한 보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심고 거두게 되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 안에서 연보 하는 것을 즐겨 내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보의 의미임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것으로 여겼던 모든 것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순간도 내게 있는 것을 내 것이 아닌 것으로 여긴 적이 없는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예수를 믿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예수를 믿은 적이 한순간도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오로지 내 것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것으로만 가득합니다. 이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믿음을 심으신 은혜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믿음에 의해 나타나는 어떤 행함도 내 것으로 주장할 것은 없습니다.

 

 

이 믿음으로 연보를 한다면 하나님이 심고 거두게 하신 것으로 연보 하게 되는 기쁨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거두게 하신 것으로 연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에 거하는 자 부요한 자로 연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연보는 우리의 의지와 결심으로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연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연보의 참된 의미인 것을 알게 되면 연보를 포함해서 무엇으로도 자신을 자랑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집니다. 적게 거두든 많이 거두든 내가 심어서 내 힘으로 거둔 것이 아니 때문에 그 또한 자랑이 되지 못합니다. 자랑하고자 한다면 심으시고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만 자랑하십시오. 그래서 바울도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이 없는 자에게 연보는 자신의 의와 이름을 높이는 것으로 이용되는 것이 전부입니다. 연보 하는 자신을 생각할 뿐 연보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보 하는 순간만이라도 내게 있는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심지도 않는 것을 거두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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