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10:7http://onlycross.net/videos/co2/co2-1007.mp4
<본문>
7.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설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모든 문제를 십자가로 연결해서 해석합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 우리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예외가 아닙니다. 바울이 무슨 의도로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7절)라는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됩니까?
‘너희는 외모만 본다’는 말만 떼어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될 것입니다. 본문은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자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울의 신체 조건이나 말하는 것을 트집 잡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분명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아닌 바울의 외모, 외적 조건만 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라는 말 다음에 어떤 말이 이어져야 우리의 이해와 부합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도‘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고 속마음이 어떤지를 보는 것이 사람에 대한 바른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도 ‘외모만 보지 말고 사람의 속 중심을 보고 판단하라’라는 말로 이어진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외모만 보는 것을 지적하면서 신자가 그리스도께 속한 줄을 믿는 믿음을 언급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는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8절의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는 말로 이어집니다.
이 모든 내용이 사람을 외모를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우리의 도덕 관념에는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은 신자답지 못한 잘못된 행동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잘못된 행동에 대한 책망이 있고 난 뒤 바른 행동을 권면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 우리의 시각에 부합되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시각으로는 사람을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주께서 주신 권세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과 우리의 시각이 전혀 다르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고후 5:12절을 보면“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이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로 규정한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받은 추천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자신들처럼 권위 있는 추천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무시했습니다. 만약 여러분 앞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떤 말로 답하겠습니까?‘외모로 자랑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라는 말로 충고하겠습니까? 아니면 ‘신자는 외모가 아니라 예수를 자랑해야 합니다’라는 말로 권면하겠습니까?
바울이 외모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고자 하는 말을‘인간은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는 말을 하는 이유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외모를 자랑하는 것은 믿음의 모습이 아니라고 하면서 예수를 자랑하라는 등의 충고를 하였다면 이것은 복음의 시각에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지금의 교회에서 들을 수 있는 수많은 말들이 온통 이런 종류의 내용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악을 배제하고 선을 행하자’라는 교훈으로 가득합니다. 먼저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고 무엇이 선인가를 가르치고 실천을 강조하면서 선을 행하는 도덕적 인간으로 세우는 강좌로 가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복음이 아닙니다.
교회의 이런 현실을 볼 때마다 답답한 것은 분명히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십자가가 증거 하는 인간의 분명한 실상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증거 하는 우리의 분명한 실상은‘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죄 안에서 죽음의 존재로 태어난다는 사실을 아예 무시해 버립니다.
물론 기독교인이라면 인간이 죽음의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은 인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피로 죄가 용서되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죽음과 상관없게 되었다며 마치 죄의 문제는 더는 거론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 구원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교회는 누구보다도 십자가 복음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이 왜 그토록 죄와 죽음의 문제를 언급하는지의 의도보다 나에게 유익을 주는 십자가로만 속에 두고 싶어 하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의 현실이 난무하는 현장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으로까지 전락 된 것입니다.
복음을‘모든 사람은 죽었다’라는 본질에서 시작해 보십시오. 죽은 자란 말 그대로 죽었기에 모든 것이 정지되어있습니다.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찾아갈 능력도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 나와 예수님의피를 바라보며 죄를 자복하며 애통해할 자질도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권위 있는 추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이 발행한 추천서가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 피의 은혜가 가장 권위 있고 가치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하는 추천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추천서를 들먹이며 외모를 자랑하고, 몸의 약함이나 말하는 것을 조건으로 사도직에 대해 트집을 잡는 것은‘모든 사람은 죽었다’는 인간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기에 ‘외모만 본다’며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매주 설교에서 빠지지 않고 반복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아마 이러한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가 지겹고 지루하다는 느낌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십자가가 여러분의 마음에 법으로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밖에서 복음이라는 이름의 이론으로 자리하는 수준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마음의 법으로 자리한다면 끊임없이 우리를 죽음의 존재로 선언하며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이론이 아닌 생생한 현실임을 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의 은혜가 이론이 아닌 현실이 되고 그 현실에서 자신을 죽음의 존재로 자각하는 신자라면 세상이 추구하는 그 어떤 외적 조건도 생명의 문제 앞에서는 무용지물이고 헛된 것임을 모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외적 조건에는 마음을 두지 않게 되고 자신을 위한 가치 있는 것으로 높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는 말에는 ‘너희를 살리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며 너희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으며 구원을 얻었는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외모만 보는 것이 신자로서 관심을 두고 봐야 할 것을 보지 않는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외모만 보는 것을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는 믿음의 문제로 연결하여 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 자발적인 의지와 선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방식이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십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는 모든 일에 인간의 조건은 고려된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인간의 외적 조건을 보시고 부르신다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자는 누구도 없게 됩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 이후로 외적인 조건 기준으로 의롭다고 인정될 자격을 갖춘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방식을 알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의 관계에 있게 된 내막에 집중한다면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체도 같은 방식으로 부름을 받아 교회 되었음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사람을 외모를 보고 평가하지도 않으리라는 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신자 되었다고 하면서 사람에게서 외모를 보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되고 그 사실을 믿게 된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경은 단지 이론일 뿐입니다.
삼상 16: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마다 외모는 차이가 있습니다. 얼굴 모습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외적 조건이 모두 같지 않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다고 하면서 사도 됨을 멸시한 자들이 있었지만 몸이 약하고 강한 상태를 명확하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까요? 몸이 강하다 해도 그 안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더 강한 자와 덜 강한 자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말도 시원하지 않다고 했지만 말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 중에서도 역시 차이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만약 하나님이 외모를 보신다면 부름을 받은 자 안에서도 차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상급에 차등이 있다는 것 또한 이러한 시각에서 나온 이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합니다. 우리의 중심을 어떻게 말하는 것이 옳을까요? 악한 것이 있지만 선한 것도 있다고 해야 할까요? 우리의 중심은 악함으로 가득합니다. 때문에 선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능력합니다. 문제는 이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가 부정하는 것입니다. 선에 대해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였지만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능력으로 선을 실천할 능력 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이 품고 있는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을 실천할 능력을 힘껏 발휘하여 소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는 사탄이 심어준 환상입니다. 이러한 환상이 문제는 사라지고 사랑이 충만한 아름다운 교회를 꿈꾸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환상을 꿈꾸면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믿음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 구원을 위한 이론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외모를 기준으로 하는 시각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악함만 있는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게 하신 은혜가 있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남들처럼 몸이 강하지 못하고 말이 시원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을 자신의 부족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신 은혜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는 새로운 관점인 것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관점 그대로 세상과 자신을 보게 되면 사탄이 만들어 놓은 외모로 인한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누가 더 믿음이 좋은가?’‘누가 더 성경을 많이 아는가?’‘누구의 교회가 더 큰가?’‘누가 더 예수님을 위해 헌신을 많이 하는가?’라는 전쟁에서 외모만 보면서 서로를 평가하는 지옥의 모습만 드러낼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단순히‘믿는다’로 끝내지 마시고‘내가 어떻게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었는가?’‘무엇이 나를 그리스도께 속하게 했는가?’라는 생각에 깊이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의 실천으로 여기는 모든 것이 부인 될 수밖에 없는 분명한 내막을 찾으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그 내막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외모만 본다는 것은 그 중심에 십자가가 없다는 뜻입니다. 중심에 십자가가 없는 사람이 몸이 강건하고 말을 잘한다고 해서 사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는 말에는 외적인 조건을 번듯하게 갖춘 인간을 높이고 긍정하는 내용만 담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모는 십자가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대화 주제가 되고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와 재미가 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것이 나에게 있고, 더 잘하는 것이 있을 때 그것으로 자존심을 세우고 자기 과시를 하는 재미로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교회를 그런 용도로 이용하는 것이 지금의 기독교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교회가 자신에게 관심 두지 않을 때 교회가 싫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나라는 존재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음을 지키기 위해 외모를 내세워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고 허물에 대해서는 변명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십자가를 훼방하고 복음을 가리는 것이기 때문에 외모만 보는 것에 대해 지적하고 거론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 5:15-16절에서“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죽음에 있는 자를 살리는 구원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가 용서되고 거룩한 자로 생명에 속하게 된 것은 맞습니다. 신자는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나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구원받은 자신에게 마음을 두는 것은 예수님을 대신 죽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살리시고 구원하여 대신 죽으시고 살아나신 예수를 위해 사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 중심에 남기신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선하고 착한 행실이 아니라 외모를 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은혜는 나의 외모가 아니라 십자가를 세우는 것으로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은혜 주시는 것도 우리의 유익이 아니라 예수를 대신 죽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알지 못함으로써 믿음도 은혜도 신자 됨도 오해 한 것입니다. 외모의 모든 것을 온갖 멋진 것으로 갖추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도 절대적인 것은 죽음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두 글자로 시작하여 여러분 자신을 해석한다면 외모는 아무 가치 없는 것으로 부서질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에 은혜가 있게 하시고 십자가 앞에 세우시는 것은 세상이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는 외모와 상관없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있음을 증거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를 부르시고 그리스도 안에 함께 하게 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