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10:8-11http://onlycross.net/videos/co2/co2-100811.mp4
<본문>
8.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9.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하지 않게 함이라
10.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11.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
<설교>
가수 안치환이 부른‘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1986년에 전교 1등이었던 여중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남긴 유서가‘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였다고 합니다. 이 유서가 1989년에 영화로 만들어졌고 가수 안치환이 노래로 만들어 부른 것입니다. 당시에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일이기도 합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에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공부만 잘한다고 인간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도 합니다. 하지만 자녀를 둔 부모가 성적에 덤덤해지기는 힘든 일입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에 충분히 공감은 하지만 자기 아들과 딸의 성적 때문에 울고 웃는 것이 부모입니다. 세상 현실은 거의 성공은 성적순으로 되고 성공이 곧 행복의 관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학교 분위기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공부 잘하는 아이는 모범생으로 인정받고, 공부 못하는 아이는 문제아로 낙인찍히는 분위기였습니다. 성적이 품행을 결정하는 외적 조건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습성은 현재도 여전합니다.
문제는 이런 세상 기준이 아닌 다른 기준과 가치관으로 존재해야 할 교회가 스스로 형제, 자매라 일컫는 이들을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시각과 기준으로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교회 성공에 대한 판단 기준에서도 세상의 자본주의 정신이 선명히 드러납니다. 교회 규모로 성공 여부를 저울질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신자다움, 목사다움에 대한 평가 기준이 무엇인지도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세상 정신임을 생각하면 교회가 십자가의 정신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 1:13-14절을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세상의 정신이 곧 흑암의 권세입니다. 흑암의 권세를 세상이 악으로 규정하는 힘으로 이해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이해하는 악한 권세는 세상 기준으로 얼마든지 분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나 분모가 악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며 가까이하지 말라고 교훈하는 것입니다.
흑암의 권세가 심각함은 세상이 선호하는 좋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에 있습니다. 바울이 활동하던 당시 문명의 중심에는 로마가 있었습니다. 세상은 로마가 누렸던 문명을 원합니다. 지금의 목사가 한적한 시골에서 허름한 예배당에서 설교하는 것보다, 도시의 화려하고 웅장한 예배당에서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설교하는 것을 꿈꾸며 그러한 목회 성공을 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대 정신을 흑암의 권세로 파악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10절의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라는 말도 고린도 교회의 어떤 이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무시하는 시각입니다.
이처럼 외모적인 문제로 바울이 평가되는 것은 어쩌면 아볼로와 비교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아볼로파가 있었는데 아볼로는“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행 18:24)고 말한 것처럼 바울보다 언변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바울의 반대파들이 아볼로와 비교하면서 바울을 공격한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살펴보면서 바울이 자신의 사도 직분을 어떻게 이해하고 증거하는지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자 됨을 어떻게 이해하고 한 분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로 있게 된 교회를 어떤 시각과 기준으로 바라봐야 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중요한 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편지가 무게가 있고 힘이 있다면 그것으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여부를 판단하면 됩니다. 몸이 약하다거나 말이 시원하지 않은 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방해가 되거나 약점이 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의 외모를 지적하며 그것을 사도직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정신이며 흑암의 권세에 의해 드러나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바울의 외모를 지적했던 이들과는 다를까요? 자신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과연 외모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세상의 습성에서 온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요? 누구도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것은 외적인 것이고 내면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외모를 기준으로 내면까지 판단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얼굴이 선하게 보이면 마음도 착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존재 자체가 흑암의 권세로부터 지배를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은 흑암에 속한 기준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라는 사실부터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과 자신에 대해 깨어있는 시각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 됨을 항상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부름을 받은 것으로 말합니다. 자신이 자발적으로 사도직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만이 아니라 우리가 신자 된 것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의 몸과 말하는 것, 다시 말해서 외적인 조건을 보고 사도와 신자로 부르시는 것일까요? 누구라도‘아니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바울은 롬 9:11절에서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나기도 전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하신 것이 하나님의 택하심이며 이러한 방식대로 부름을 받은 것이 사도고 신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바울의 몸이 약하고 말이 시원하지 않다는 것을 빌미로 사도 됨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간의 시각에 의한 기준으로 판단하는 흑암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이 몸과 말하는 것을 내세워 자신을 판단하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변호가 아니라 복음이 방해되는 것을 방어하는 변호입니다.
만약 몸과 말하는 기술이 사도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면 자연히 육체의 조건이 좋은 인물이 사도다운 사도로 평가되는 심각한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의 내용보다 외적 조건이 좋은 사람 자체에 매력을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처럼 십자가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좋아하는 여러 가지를 기준으로 세우고 복음과 사람을 판단하는 흑암의 습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몸과 말하는 것으로 사도직을 평가하는 자들에게 바울은“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8절)고 답변합니다.
바울은 주께서 주신 권세에 대해 말합니다. 권세는 힘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주로부터 받은 권세가 사도이고, 그 권세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다스린다는 뜻일까요? 하지만 주께서 주신 권세는 바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에게는 주께서 주신 권세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권세를 실감하지 못합니다. 권세가 힘이라면 권세가 있는 자는 힘을 가졌다는 의미가 되는데 도무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힘을 가진 자로 실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주신 권세는 당연히 세상의 힘과는 무관합니다. 요 17:2절에서“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라는 말씀처럼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는 예수님이 정작 사람에게 힘없이 붙들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그것이 말해줍니다. 따라서 주께 있는 권세는 세상을 힘으로 이기는 무기가 아니며 주께서 주신 권세 또한 세상이 이해하는 힘의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주께서 주신 권세는 세상이 아니라 위로부터 온 하늘의 권세입니다. 우리가 하늘의 권세 앞에 선다면 무릎을 꿇게 됩니다. 이것이 위로부터 온 권세를 만난 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만약 권세를 세상의 힘으로 이해를 한다면 다른 사람을 자신에게 굴복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할 것입니다. 이것이 목사를 권세로 이해하는 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목사직을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강조하면서 일반 교인은 목사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권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고 말하는 것처럼 힘이 없는 사도였습니다. 몸이 약한 신체적인 힘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로 활동하면서도 사도직을 권세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바울에게는 권세가 없는 것이 주께서 주신 권세 있는 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바울의 권세는 권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권세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가 전부였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길을 갔던 바울에게 교회로부터 인정받고 사도로 대접받는 것은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사도 됨도 바울이라는 인간에게 초점을 두고 해석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바울을 다스리는 하늘로부터 온 권세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께서 주신 권세가 있는 신자는 권세 앞에 굴복하게 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이 부인되는 약한 자로 주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권세가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권세 없는 것이 권세가 있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바울의 몸과 말하는 것을 약점으로 삼아 사도 됨을 흔들고자 하는 것은 강건한 몸과 좋은 언변이 있으면 사도다운 권세를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의해서 세상이 높이는 것으로 자신을 포장하여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점으로 여겨지는 것은 감추고 장점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신자로서 좋은 말을 듣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주께서 주신 권세가 있는 자의 모습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께서 주신 권세는 위로부터의 권세이고 이 권세를 받은 자만 천국에 들어갑니다. 문제는 이 권세를 무엇으로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께서 주신 권세를 받은 자가 신자라면 권세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권세는 힘이고 힘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막 11:29-30절을 보면“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신 일을 두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라고 추궁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로 왔다는 것을 말씀하시며 그것을 권위로 세우시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세례 요한의 세례를 언급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문제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신 것에 대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메시아로 오셨기 때문에 그런 일을 행할 권위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흑암의 권세에 붙들린 세상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대통령이니까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입니까 사람으로부터입니까? 당연히 하늘로부터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이 요한을 보내셨고 하나님이 세례를 베풀게 하셨기 때문일까요?
그렇게 해석한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결국 세례를 행하는 요한이 권위자가 되고 요한의 세례가 권위 있는 세례가 되는 결과만 초래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의 교회가 성경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목사를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 목사를 권위자로 세우는 사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외친 말은“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입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해서 천국에 들어가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천국의 기준이 회개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에게는 회개가 필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성실하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죄와 무관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심판의 기준은 율법이었고 율법 있는 자신들은 심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던 그들에게 회개를 천국의 기준으로 세운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이 지키고 행하는 모든 것이 부인 되는 의미가 됩니다. 몸이 강건하고 언변이 좋다 해도 하늘의 세례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는 누가 뭐래도 심판의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권세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늘의 권세 앞에서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권세 없는 자가 될 뿐입니다.
요한이 막 1:7-8절에서“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고 말합니다.
하늘의 권세로 인해 천국의 기준이 회개로 확정되었지만 요한의 세례가 아닌 성령으로 베풀어지는 세례를 받은 자가 천국의 사람으로 구분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주께서 주신 권세로 이해하면 권세는 성령 세례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고, 성령 세례가 우리의 죄인 됨을 알게 하고 인간의 모든 의를 무너뜨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주신 권세를 받으면 세상이 힘으로 여기는 것을 힘으로 여기며 그 힘을 가진 자로 세상에 안주하고 싶어 하는 자신에게서 죄를 보게 됩니다. 그러한 자신을 무엇으로 포장한다 해도 십자가 앞에서는 저주받을 존재일 뿐임을 알기에 주의 은혜로만 마음이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주신 권세가 작용한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의 일상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위를 생각하지 않고 항상 옆을 보면서 사람에게 인정받을 조건을 갖추기 위해 애를 쓰는 여러분의 실상이 보이십니까? 그런 일상에서 자신도 모르게 타인에 대해 외적 조건을 기준으로 한 평가가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만큼 복음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에만 집중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께서 주신 권세가 여러분께 역사하며 권세 없는 권세를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