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10:12http://onlycross.net/videos/co2/co2-1012.mp4
<본문>
12.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설교>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태도를 표현하자면 마이동풍(馬耳東風)이라는 말이 적절할 것입니다. ‘말의 귀에 동풍이 불어도 말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뜻처럼 성경이 무슨 말을 해도 귀 기울이지 않고 지나쳐 흘려버리는 것이 우리가 성경을 보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다거나 건성으로 읽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열심히 성경 읽고 묵상하고 필사까지 한다 해도 자기 몸을 위해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는 상태에서는 성경의 어떤 내용도 결국 자신의 몸을 위해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성경을 보는 초점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심적 위로와 편안함을 누리는 것으로 향해있기에‘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 두지 않는 것이 우리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리면 입으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철저하게 무시하고 업신여깁니다. 히 4:12절에서“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단지 종이에 인쇄된 글로 대한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떳떳할 뿐 저주의 존재로 판단 받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는 항상 몸과 몸을 비교하면서 높고 우월한 자리에 있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드러납니다.
딤전 6:9-10절을 보면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떳떳한 마음으로 읽고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앞에서 말씀드린 히브리서 내용대로라면 우리의 생각과 뜻은 언제나 죽음에 합당한 자로 판단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이 가치를 두는 무엇으로 서로를 비교한다 해도 모두가 죽음의 존재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몸과 몸을 비교하는 것이 말씀의 판단을 무시하고 판단 받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바울의 외적 조건을 이유로 사도직의 정당함을 판단하는 것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이유입니다.
롬 14:8절에 보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말합니다.
골 2:16-17절에서는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주의 것이며 몸도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우리의 몸이 주의 것이니까 전도와 선교와 같은 주의 일을 위해 몸을 쓰라는 것일까요? 그런 뜻이라면 우리는 모든 일상을 포기하고 전도만 하든지 아니면 선교사가 되어 타국으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선교 헌금으로 선교사를 돕는 그것도 선교하는 것으로 말하지만 성경은 어디에서도 돈과 전도를 일치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의 것이고 몸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우리의 몸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나의 영광과 이름을 위한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사용될 도구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몸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 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몸은 내 것이라는 굳은 의식으로 내 몸을 잘 관리하여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둡니다. 몸은 주의 것이며 주를 위한 몸이라는 의식은 없고 오직 자기를 위해 사는 것만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불의함에 관해 판단 받지 않고 몸과 몸을 비교하면서 말씀을 훼방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무시하는 태도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몸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자기 인식으로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12절)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들이란 예루살렘 교회의 초청장을 가지고 온 자들을 가리킵니다.‘나는 바울에게 없는 초청장이 있다’라며 자신을 높이는 것을 두고 자기를 칭찬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초청장을 받았다면 이들도 사도였을 것입니다.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복음이 아닌 초청장을 근거로 자신을 높이고 판단하고 바울과 비교하는 것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는 지혜 없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그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변호하고자 했다면 초청장 대신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누구보다 많은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업적과 수없이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열심히 복음을 전한 헌신 등이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 9:16-17)는 말에서 드러난 것처럼 복음을 전한 모든 일을 자신의 의지와 힘에 의한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사도로 부르시고 복음에 대한 사명을 주신 하나님이 하신 일로 여겼고 바울 자신은 다만 복음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았기에 자기 업적으로 과시할 수 있는 일은 바울의 의식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들과 더불어 바울도 자기를 칭찬하는 방식으로 싸우는 싸움에 짝하여 지혜 없는 자의 길에 함께 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들’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초청장을 과시하며 바울을 무시하는 것은 겸손의 미덕이 부족한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단지 겸손이 부족한 인품의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세우고 자기를 증거 함으로 복음을 훼방하는 것으로 심각하게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보게 되면 우리가 복음을 훼방하는 자로 드러남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로 자기를 헤아리고 판단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며 타인을 비교하는 일에 부지런하기 때문입니다. 소위‘열심히 신앙생활 잘하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성공했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성경을 펼치면 하나님이 부르신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이 어떤 길을 갔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누구도‘하나님을 믿더니, 예수님을 믿더니 복을 받아 잘 됐다’는 평가를 받는 길로 가지 못했습니다. 오히려‘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왜 사는 것은 그 모양이냐?’라는 조롱을 들을 정도로 고난과 핍박이 있는 길로만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내용을 보고도 잊어버리거나 무시하면서 예수 믿고 복 받는 길을 선호합니다. 이러한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복음에 대해서는 훼방자고 하나님께는 원수인데도 불구하고 교회를 다니고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을 내세워 자신을 방어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우리의 정체입니다. 우리도 자기의 신앙생활로 자기를 칭찬하고 그러한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비교하는 지혜 없는 어리석은 자의 행보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죄를 지적받으면 반발을 합니다.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는 무의식 가운데 평생을 세상의 사고방식에 젖어 살아왔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형편이고 인간으로서의 위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언어를 통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입니다.‘바울의 몸이 약하고 말도 시원하지 않다’라는 말도 바울이라는 한 개인을 깎아내리고 무시하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말하는 그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자기 실체였던 것입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에는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내주는 인격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훌륭한 인격과 교양이 있는 사람은 부드럽고 고운 말을 쓰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예의 없고 품위 없는 말을 쓴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부드럽고 고운 말이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말 한마디가 잘못되어서 큰 다툼과 살인으로까지 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때문에 한 마디의 말도 상대방을 생각하고 조심히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바른말 하는 것이 신자로서의 위치를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말을 부드럽게 하고 고운 말을 하는 것이 믿음의 증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령 목사가‘신자라면 고운 말 바른말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타인을 비판하고 욕하는 말을 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라고 설교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설교를 화내는 어투로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제아무리 부드럽고 온화한 어투로 설교를 했다 해도 내용 자체가 복음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훼방한다는 것입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믿음을 바른 언어생활로 확인하게 하는 오류를 범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오류 속에서 자신이 하는 말로 자기를 칭찬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이 거친 자가 있다면 말투를 지적하면서 신자답지 못한 것으로 판단할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들과 더불어 짝하는 길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칭찬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어떤 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입니다. 우리도 피할 수 없는 문제라는 뜻입니다.
18절에 보면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칭찬하는 것과 주께서 칭찬하는 것은 다르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칭찬하는 칭찬에는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그것으로 자기를 과시하고 우월한 자리에 있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담겨있습니다. 이러한 욕구로 인해 타인으로부터 판단과 헤아림을 받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자기를 칭찬하는 것을 들고 주께로 나아갔을 때 주로부터도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자기를 칭찬하는 그것으로 주로부터도 칭찬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자기를 칭찬하셔도 됩니다. 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옳고 선한 것을 갖추었다면 복음을 위해 드러내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에게 주 앞에서 떳떳하게 자기를 칭찬하고 드러낼 수 있는 옳고 선한 것이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죄 외에는 나올 것이 없는 인간으로서는 드러내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때문에 인간은 의와 하나님의 뜻과 피조물다움과 신자다움 등의 모든 일에 대해 실패자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를 실패자로 드러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도 하나님의 일하심도 우리의 시각과 기준에서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실패자로 간주하시고 우리의 실패를 도구로 이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데 우리는 자신에게 가능성을 두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붙들려 있습니다.
믿음도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취지로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능력이 되고 힘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전도, 선교, 구제 등으로 이해한다면 결국 그것으로 자기를 판단하고 칭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실패자의 자리에서 주를 바라보는 신자 됨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으로 규정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는 따로 있지 않습니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주 앞에 나오는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우리를 실패자로 규정하고 실패자로 주를 바라보게 하는데, 자신에게 있는 선함으로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주 앞에 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신 은혜를 훼방하고 십자가에 대한 도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전 4:4-5절에 보면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스스로 자기를 책망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을 일을 행한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으로 자신을 의로운 자로 칭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책할 일이 없다 해도 죄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심판하실 이가 오시면 모든 것이 죄로 드러나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칭찬하고 칭찬할만한 것을 갖추는 것에 마음을 둘 때 성령은 우리의 선함을 책망합니다. 자기를 칭찬하는 것으로 실패를 깨닫게 하고 실패자로 주께 나오게 합니다. 이처럼 실패자의 자리에 있게 되면 타인의 판단과 헤아림에 대해 자유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는 자기를 칭찬할 것이 있는 선의 자리가 아니라 실패자의 자리에 가득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