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10:14-18http://onlycross.net/videos/co2/co2-101418.mp4
<본문>
14.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5.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16.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17.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18.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설교>
현대의 기독교 신앙은 자기만족에 깊이 매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고 실생활에서 경험하는 신앙이라기보다는 ‘기독교라는 신앙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고 만족하게 하는가?’의 문제에만 치우쳐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 중의 하나는 신앙을‘나는 행복한가?’‘나는 얼마나 기뻐하고 만족하며 생활하는가?’로 확인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기쁨이 없고 만족이 없으며 삶에 대해서도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신앙의 문제로 자가 진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에 대한 오해이며 왜곡입니다.
이러한 오해와 왜곡으로 인해서 시작되는 것은 신앙을‘누가 더 만족과 기쁨이 있는 행복한 삶을 사는가?’로 비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의 기준과 초점이 인간으로 시작되어 인간으로 향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인간의 만족을 위해 존재하고 일하는 분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 기독교인의 신앙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안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기독교가 외치는 십자가, 예수는 한낱 종교적인 구호의 수준으로 전락한 지 오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서 외치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고 예수 또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 예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온 적이 없으면서 당당하게‘주 안에서’를 외치는 것 또한 무엇이 십자가를 믿는 신앙 세계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자들의 종교환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이 말이 여러분과 무관한 내용이라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현실적인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자랑의 문제에서 깊이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고전 1:31절에서“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바울은 또 다시“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후 10:17)는 말을 합니다.
대개는 바울의 이 말을 세상 것을 자랑하지 말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자랑하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바울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했으니만큼 예수를 자랑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신앙 덕목으로 말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예수님이 최고다’‘세상의 모든 재물보다 예수님이 가장 귀하다’는 말이 예수를 자랑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에 대해 말하고 예수를 자랑한다 해도 결정적인 문제는 세상 것을 놓지 못한 자로 산다는 것입니다. 무의식적으로라도 육체를 드러내고 타인보다 우월한 자리에 있음을 확인하며 그것을 자기만족으로 삼는 자기의 세계에서 한치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인간의 현실을 간파하는 안목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죄를 모릅니다. 그 때문에 자기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이 죄 안에 있는 것임을 눈치채지 못하고 십자가, 예수, 죄인, 회개 등의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자신을 신자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저 의식 속에 거의 세뇌의 수준으로 박혀 있는 존재일 뿐 존재론적으로 인식하고 하나님이 펼치시는 삶에서 경험하고 만나는 실제적인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 끌어가시는 삶에서 배우고 깨닫게 되는 하나님 경험이 없습니다. 단지 예배당에서 예배라는 형식에 참여하고, 교회의 여러 행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자신이 신자임을 확인하는 신자 아닌 기독교인이라는 종교인의 허울만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바울이 말하는 자랑의 문제에서 확인해 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우리가 자랑하되 주 안에서 자랑하거나 아예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 신자 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신자가 여러 곳을 다니면서 예수를 자랑하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예수를 알고 믿게 되어 세상이 기독교화되는 것에 추호도 관심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랑은 인간의 죄의 속성입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하면서 자기 우월을 확인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는 죄의 속성이 자랑입니다. 이러한 죄의 속성을 가진 존재가 주 안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주 안에서도 죄의 속성은 변함없이 활발하게 작동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오해하는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주 안을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청정지역처럼 인식하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깨끗한 세계를‘주 안’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시고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은 죄가 없는 깨끗한 세계입니다. 하지만 인간 자체가 죄를 극복해 감으로써 깨끗해지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로 인해 더러운 자를 위해 흘리신 예수의 깨끗한 피의 효력으로 인해 깨끗한 자로 인정되는 것이 예수 안입니다.
바울이 수많은 인간의 문제로 엉망이 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고린도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지칭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더러운 인간에게는 도무지 어울릴 수 없는 거룩, 성도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 근거는 교회가 아닌 십자가 피에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이 의미하는 본질입니다.
아마 이 정도의 내용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 주 안의 세계가 우리 현재의 생활, 매일 주어지는 현실에서 경험하는가에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주 안의 세계를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현실에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의 위험과 재난으로부터 지켜주고 인도해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가르쳐온 전통적인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자신이나 세상의 현재 상황을 보면서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가 주 안에 부름을 받음으로 예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아 현실의 모든 문제가 원하는 대로 형통하던가요?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주안에 있는 자와 주 밖에 있는 자를 구별하여 감염시키던가요? 그러한 현실은 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주 안에 부르시고 예수님의 귀한 피로 거룩한 성도 되게 하신 모든 일의 이유와 목적이 세상의 형통과 천국이라는 구원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성경을 너무 과장되게 해석하는 것 같습니까?‘세상에서 잘 살고 천국 가는 것에만 뜻을 두는 것은 잘못이지만 그래서 믿는 사람이 평안히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천국 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되는 일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신자는 가난해야 하고 고생하고 힘들게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신앙의 모든 것을 세상 형편이나 환경, 자신의 육신의 문제로 경험하고 확인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육신의 문제로 신앙을 확인하게 되면 주어진 형편과 환경의 다름, 즉 육신의 문제가 신앙의 실력을 가름하는 기준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실의 좋음은 여지없이 자랑이라는 죄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한순간도 우리 실력으로 살아온 적이 없습니다. 숨 쉬는 것조차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현실에서 배우고 깨닫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고 경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란 존재의 실체를 인정만 하면 되는 수준의 신앙에서 실제로 하나님이 일하시고 간섭하심을 실감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이 이루심으로 나타나는 결과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자랑할 수 있을까요? 목사에 자랑거리는 크고 화려한 예배당과 교인 숫자와 차고 넘치는 헌금 수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거리가 없으면 비록 교회 규모는 작아도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서 보람이 되는 자랑거리를 만들기도 합니다‘우리 교회는 이러이러한 봉사를 한다’이런 말로 자신이 목회를 잘하고 있음을 과시하기도 하지만 그 모든 자랑거리를 들고 주 안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를 자랑하지 않고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주 안에서 사는 것이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랑거리가 있지만 자랑하지 않고 참는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또 이것을 자랑거리로 삼습니다.‘나는 자랑하지 않는다’며 자신을 흡족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랑하지 않는 것을 믿음의 실천으로 멋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가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무능입니다. 우리의 실력으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세계입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숨 쉬는 것까지 내 실력이 아니라 주의 은혜 때문임을 안다면 우리가 내 세울 수 있는 실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이러한 깨달음으로 인도하신 것 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내가 한다’‘내가 했다’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할 수 없는 것이‘주 안’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주 안에서 무엇을 자랑하라는 것일까요? 무능을 자랑하고 연약함을 자랑하고 실력이 없고 가치가 없음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나는 무능합니다’‘나는 연약합니다’라고 외치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무능하고 연약하며 내세울 실력이 아무것도 없는 자임을 깨닫게 된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사는 것이고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랑에 대해 이토록 열심히 다루는 이유는“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14-16절)는 구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18개월 동안 복음을 전하고 떠났습니다. 명목상으로는 바울에 의해서 고린도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바울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고린도에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추천서를 받은 사도들이 오게 됩니다. 이들이 고린도 교회에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흠을 내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바울보다 자신들이 더 실력 있는 사도다운 사도임을 부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충동에 의해서 교회에 바울의 사도직을 부인하고 시비를 거는 무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편지를 써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 대해 지적하고 가르치는 것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간섭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교회의 입장과 시각에서는 이미 자신들을 떠난 바울이 사도라는 이유로 간섭하고 주인 노릇을 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교회에 편지를 보내거나 찾아가지 못할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순전히 복음에 의해서 고린도에 이르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14절의 내용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에 이르게 되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믿는 사람이 있게 되고 교회가 시작된 모든 일은 바울의 실력이나 공로와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뜻을 알았다면 교회 또한 바울이라는 인간이나 바울이 이룬 공로가 아닌 복음만 생각했어야 합니다. 복음 때문에 하나님이 바울을 자신들에게로 인도하신 것처럼 복음 때문에 또다시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인식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주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믿음도 교회도 인간의 실력 문제로 인식하게 되면 결국 교회는 목사의 목회 실력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이점을 생각하면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후 찾아온 사도들은 나름대로 목회라는 것을 했을 수 있고 고린도 교회를 자신의 실력으로 지키고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교회에 편지를 보내고 가르치는 바울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이미 오래전에 교회를 떠난 자가 자신들이 힘써 목회하는 교회를 간섭하는 것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15, 16절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 변호하는 것도 자신의 사도 됨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인간의 실력이 아닌 하나님이 능력으로 되는 것임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인간이 자기 실력을 과시하고 드러내고자 하는 것을 복음이 아닌 것으로 간주했고 이러한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분수 이상의 일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복음만 생각하고 인간의 실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17절)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가게 된 것도 편지를 쓰는 것도 복음에 밀려서 하게 되는 것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내가 복음을 전해서 교회가 세워졌다’는 의식 자체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복음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바울의 사도직을 따지고 시비하는 자들에 대해‘나도 사도다’라는 방식으로 부딪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부르심으로 거룩한 성도 된 사람입니다. 이러한 신자로 함께하는 것이 교회라면 믿음은 인간의 실력으로 나타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죄의 본성은 쉬지 않고 우리를 육체에 매이게 합니다. 기도, 헌금, 봉사 등의 모든 활동을 나의 믿음에 의한 나의 실력으로 간주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실력 없는 자인가를 배우고 깨닫게 되는 길로 데려가십니다. 입술로 수천, 수만 번 십자가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고 예수를 말했던 모든 것이 우리의 믿음 실력이 아니었음을 낱낱이 보게 하십니다. 그 길이 비록 아프고 힘들다 할지라도 그 길로 데려감을 받는 사람에게 맺혀지는 열매는‘나는 아무 실력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오늘의 현실에서 실재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며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이러한 자랑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