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6.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설교>
교회에서는 복음만 전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증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교회 됨이고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 말에 반대할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에서 복음이 전해지고 십자가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하는 분위기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대와 생각으로 교회를 찾습니다. 천국이라는 구원과 함께 세상에서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가 있고 종교를 가지면 무거운 마음이 평안해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교회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사람들의 생각에 일치되지 않을뿐더러 기대를 충족시키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와 목적이 복음에 담겨 있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에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내용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애당초 교인들은 자신을 이유로 교회를 찾습니다. 예수님이 이유가 아닙니다. 복음에 관심이 없고 듣고자 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복음을 전하면 분위기가 싸늘해집니다. 결국 교회를 유지하고 지탱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속성과 타협할 수밖에 없고, 타협은 복음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물 타기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관심을 둔 사람들이 관심 둘만 한 가짜 복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라고 말한다면 과연 저의 편견이고 독선이며 아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저의 잘못된 판단이고 편견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드러나 있는 한국교회의 민낯을 본다면 도무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희생으로 세워진 교회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긋나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 가치는 과연 무엇에 있을까요? 흔히 교회가 사회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회에 유익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사회적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여력이 있어야 합니다. 즉 돈과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존재 가치가 사회적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이라면 가치 있는 교회로 존재하기 이해서는 사람과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반면 사람과 돈이 없는 교회는 가치 있는 교회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요?
교회에 대한 인식 자체가 매우 혼란한 시대입니다. 인간 중심의 이해 속에서 교회의 가치가 사회적 유익과 도덕성이 기준이 되어 판단되면서 복음과 십자가는 아예 외면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사람에게 유익이 되고 도덕성을 갖추고 있으면 교회로 인정되는 세태에서 바울이 증거하는 십자가는 과연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고린도 교회의 음행에 대해 말하는 바울이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6,7절)는 말을 합니다.
도대체 누룩과 유월절 양이 음행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이것부터가 교회의 문제를 바라보는 바울의 시각이 우리와 차이가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교회에 그러한 문제가 있다면 음행한 사람을 벌주고 다시는 교회에 그러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누구나 그러한 시각과 생각으로 교회 문제에 접근하여 해결하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민주적이고 도덕적인 교회를 좋은 교회로 생각합니다. 교회 일을 목사의 독단이 아닌 교인들이 의논하여 처리하고 도덕성이 바르면 좋은 교회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문제없는 교회가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에 이방인들에게도 없는 음행의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러한 문제가 발생한 것에 대해 질책한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한히 여기지 않고 그 일 행한 자를 쫓아내지 않은 것을 질책했다는 점에서 교회를 바라보는 바울의 시각이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음행의 문제보다 더 통한히 여기지 않은 것을 교회의 심각한 문제로 바라보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음행의 이야기를 듣고도 통한히 여기지 않는 자신들이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는 행동, 생각에 문제가 있음에도 그 문제를 보지 못합니다.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항상 자기 기준으로 교회를 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가리켜서 ‘누룩 없는 자’(7절)로 말합니다. 따라서 ‘묵은 누룩을 내 버리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묵은 누룩, 즉 오래된 누룩이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누룩을 내 버리고 누룩이 없는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존재하자는 것이 바울의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누룩이 없는 자인데도 불구하고 묵은 누룩이 있었고, 그런데도 묵은 누룩이 있는 자기의 문제를 알지 못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바울이 누룩을 언급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6절을 보면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합니다.
누룩은 빵을 발효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효모를 말합니다. 적은 양의 누룩으로도 많은 양의 밀가루를 발효시키는 것이 누룩의 특성이고 바울은 이러한 누룩의 특성을 예로 들어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누룩에 대해서는 예수님도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마 16:11절에서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을 제자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은 항상 인간의 의를 세우는 것에 그 목적을 두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되는 것인가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따라 하면 정말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으로 착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신 것은 인간의 의를 세우는 그들의 교훈이 예수님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세계는 예수님의 희생에 의한 용서로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 자랑 될 것은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뿐이지 인간의 의는 자랑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가리켜서 ‘누룩 없는 자’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거룩한 성도 된 교회는 자기의 의가 아닌 예수님의 용서로 죽음에서 건짐 받아 거룩한 백성이 되었기에 인간의 의, 즉 누룩이 없는 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용서 위에 세워진 교회이기에 인간의 의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음행의 사건을 알고도 통한히 여기지 않은 것은 음행을 자기 문제로 여기지 않았고, 자신과 무관한 죄로 간주하면서 관심을 두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결국 자신의 의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그들을 누룩 없는 자로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묵은 누룩을 속에 두고 있는 것이기에 묵은 누룩을 내 버리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분명히, 그리고 반드시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십자가의 세계는 인간의 의로움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교회됨은 이것으로 드러납니다. 또한 교회의 존재 가치는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거룩한 성도 되게 하신 예수님의 희생과 피의 은혜를 감사하고 십자가를 높이고 자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요구하는 사회적 활동과 도덕성에 교회의 가치를 둔다면 복음의 질책을 받아야 할 뿐입니다.
이 문제를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누룩이 인간의 의를 담고 있는 것이라면 인간의 의를 버리면 되지 않느냐?’라고 가볍게 치부할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이 묵은 누룩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버리지 못하고 붙들고 있어서 오래된 누룩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인간이 버리기를 싫어하고 버리지 못하는 것이 자기 의로움인 것입니다.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고 말한 바울이 이어서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고 거룩하여진 하나님의 교회가 된 것이 인간의 의가 아니라 유월절 양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묵은 누룩을 내 버리는 것은 교회로 존재하는 현실이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것을 믿으며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룩 없는 자로 부르신 새 덩어리로 창조되어 존재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누룩 없는 떡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애굽의 처음 난 모든 것을 치실 때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의 천사가 그 피를 보고 넘어감으로써 죽음에서 건짐 받았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그들의 의로움과는 무관하게 오직 어린양의 피로서 새롭게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 부르신 이스라엘의 존재 의미이기 때문에 누룩 없는 떡을 먹는 유월절을 세우심으로 그들이 어떤 현실에서 존재하는가를 잊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것을 간과합니다. 십자가를 구원의 통로, 또는 수단으로만 생각할 뿐이지 십자가라는 현실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잊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용서의 수단으로만 생각할 뿐 자신이 존재하는 현실이라는 것은 생각지를 않습니다. 때문에 여전히 교회의 묵은 누룩으로 간주되는 인간의 의로움이 돌출되고 자랑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성도로 부르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은 우리의 행실이나 성품의 결과에 따른 것이 아니라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로 인한 것입니다. 죄와 더불어 살아가면서 결국 멸망으로 끝나야 하는 운명에서 벗어나 죄 없는 거룩한 자녀로 인정되며 영원한 영광과 생명이라는 약속 안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전혀 다른 운명 안에 불러 놓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교회로 일컫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이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어느 교회 홈페이지에서 교회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지루한 설교가 없습니다. 등록 강요가 없습니다. 헌금 시간이 따로 없습니다. 교회 건축이 없습니다’이 교회를 국민일보에서는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방식을 과감히 버린 역주행으로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이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일까요? 교회는 누룩 없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 답게 묵은 누룩을 내버리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거룩입니다. 문제없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도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음행을 행한 자를 내어 쫓고 음행이 없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늘 죄가 있습니다. 이 말은 거룩한 성도로 부르심을 받는 교회라 할지라도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음행한 자를 내어 쫓았다 해도 다른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고 죄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현실입니다.
지루한 설교를 없애고 등록 강요를 없애면서 사람들이 불편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여 가장 편한 교회로 만든다 해도 죄는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사람이 중심이 되어 사람에게 편한 교회, 사람들이 가고 싶은 바람직한 교회로 만드는 것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죄가 있음을 잊어버립니다.
오히려 ‘우리 교회는 이것이 없고 저것이 없다’는 자랑이 인간의 의로움, 즉 묵은 누룩이 자리하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음행의 문제를 알고도 통한히 여기지 않는 것에서 예수님의 피의 용서 아래 존재하면서도 그것을 현실로 알지 못하고 결국 용서의 은혜가 아닌 ‘나는 음행과 상관없다는’는 식의 그릇된 자랑,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는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의 희생 아래 존재합니다.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을 모두 없애고 교회답게 보이는 일을 한다 해도 그리스도의 희생 아래 존재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이런 것이 없어서 괜찮은 교회야’라고 한다면 옳지 않은 자랑이며 묵은 누룩을 붙들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교회가 제도적인 것 몇 가지를 없앤다고 해서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재정을 투명하게 운영한다고 해서 깨끗한 교회 되는 것 아닙니다. 여전히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거룩은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한 용서를 믿는 믿음 안에서 묵은 누룩을 내 버리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교회의 거룩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음행의 문제라 발생했다면 그것은 당사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가 됩니다. 모두에게 동일한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마땅히 죄를 통한히 여겨야 합니다. 음행을 행한 당사자만 부끄러워하고 통한히 여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부끄러워하고 통한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같은 교회의 교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죄만이 아니라 나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음행을 하지 않았다’라며 떳떳해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것이 묵은 누룩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 안에서 누룩 없는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유월절 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은혜로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누룩 없는 새 덩어리로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