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3.10 15:28

(43강) 결혼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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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6.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7.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설교>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의 길과 새로운 삶의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바울의 마음이 어떠한지는 그의 편지들을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전 2;2절의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는 내용이 그것이고, 갈 6:14절의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는 내용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의 이러한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혹시‘바울을 본받아서 나도 십자가만 알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삶을 살자’라는 생각을 하십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십자가가 중심 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아는 것보다 더 삶에 도움이 되고 돈이 되는 앎이 있으며 십자가보다 자랑되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해도 기독교인으로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말이기 때문에 성경적으로만 그렇다고 인정할 뿐, 실제의 삶은 십자가에서 멀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는 지겹도록 듣기 때문에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듣고 넘겨 버리고 실제 삶과는 무관한 듯 살아갑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구원을 위한 용도로 전락된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십자가로 새롭게 된 존재입니다. 새롭게 되었기에 세상도 삶도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변화이고 이러한 변화가 있는 신자에게 자랑과 중심과 전부로 자리하게 되는 것은 오직 십자가입니다.

 

 

신자가 십자가로 새롭게 됨으로써 누리는 것은 자유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랑으로 여기는 육체의 조건으로부터의 자유이기에 육체적인 무엇으로도 자신을 높일 이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가 삶의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을 때 신앙에 대해 어떤 새로운 이해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본문입니다.

 

 

본문은 표면적으로는 결혼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왜 필요한가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2,3절의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는 내용이 그런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지만 그렇게 되면 음행할 위험이 있으니까 차라리 결혼을 하여 남편과 아내가 서로 부부로서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음행을 피하는 것이 좋다는 뜻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면 결혼은 음행을 하지 않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그런데 과연 결혼을 했다고 해서 음행을 피하게 되는 것일까요?

 

 

물론 서로 사랑하여 부부가 됨으로써 다른 여자나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사람들의 음행의 사건은 끊임없이 발생합니다. 더군다나 지금의 우리나라처럼 아예 음행이라는 죄를 삭제한 현실에서 본문과 같은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여 이해해야 할지가 관건입니다.

 

 

먼저 1절을 보면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라는 말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어떤 문제에 대해 질문을 했다는 뜻이 됩니다. 질문 가운데 첫 번째가 독신이냐 결혼이냐에 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가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옳은지 결혼을 하는 것이 옳은지를 두고 질문을 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런 문제로 질문했다는 것은 교회 내에 독신을 주장하는 사람과 그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 되는데 아마 그 문제에 대해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교회가 꽤 시끄러웠던 것 같습니다.

 

 

독신을 주장하는 것은 곧 금욕적인 생활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금욕은 육체적, 정신적인 욕구를 참고 억누르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금욕적인 생활이 곧 참고 절제하면서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 힘쓰는 신앙의 의로움으로 여겨졌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헬라철학이 자리하고 있는데 당시 고린도 지역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헬라철학 가운데 금욕을 주장하는 학파가 있는데 이들이 스토아 학파이고 이들에게서 유래한 것이 금욕주의입니다.

 

 

금욕주의란 정신에 속한 것을 선으로 규정하고 본능이나 욕구를 육체에 속한 악한 것으로 보면서 육체적인 욕구와 본능을 되도록 억제하는 것을 본질적으로 중요하게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헬라철학을 받아들인 고린도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그들은 신앙 또한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교회에서도 그것을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독신이라는 금욕을 주장하는 것은 단지 결혼을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신앙을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여전히 십자가로 새롭게 된 신자 됨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율법에 매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혼을 하는 것이 좋다거나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7절)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다는 말이 결혼을 하면 한 대로 하지 않으면 하지 않은 대로 그냥 지내라는 뜻입니다. 결혼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받은 대로 지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뭔가를 특별히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 신앙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은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는 바울의 말을 근거로 내세우면서 바울은 가능하면 자기처럼 독신으로 지내는 것을 좋게 여겼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처럼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독신으로 지내는 것을 원하는 것이 바울의 마음이라면 왜 ‘가능하면 독신으로 지내라’고 말하지 않고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결혼보다 독신이 신앙에 유익이 된다면 독신을 장려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을 바울처럼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결혼을 하던 하지 않던 그것은 신앙의 기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처럼 사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위도 자기 신앙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만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는 말은 바울이 자신의 어떤 행위로도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만을 증거 하는 것처럼 되기를 원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의 삶의 중심은 십자가이고 십자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모든 삶과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독신으로 사는 것이 자기 신앙을 증명하는 것으로 나타나서는 안되는 것처럼 결혼도 자기를 위한 것이 되면 안됩니다. 그런 시각에서 2절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아내를 두고 남편을 두라고 하지만 그런 이유와 목적으로 결혼을 하는 남녀가 있을까요? 남녀가 결혼을 하는 것은 자기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저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즉 자기를 위해 결혼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독신으로 사는 것을 이용하여 자기 신앙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동일하게 자기를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6:18절에서 음행을 피하라고 말합니다. 음행을 피하라는 말에는 너희 몸은 너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단순히 남녀 간의 문란한 관계를 피할 것을 촉구하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음행은 도덕적인 문제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자기 것으로 여기면서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의 헬라사상에는 금욕주의와 함께 이원론이라는 것이 유행했습니다. 이원론은 정신적인 것은 가치 있는 것, 육체적인 것은 가치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육체로 무엇을 하든 정신만 바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육체는 악하기 때문에 육체로 무엇을 하든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체적인 것을 억제함으로써 바른 삶을 추구하는 금욕주의와는 다른 점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바라봐야 할 몸의 의미이기 때문에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20절)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말하는 너희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말이 고린도 교회가 질문한 결혼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자기 아내와 자기 남편을 두라고 말하고, 서로에 대한 의무에 대해 언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4,5절의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도 단순히 부부 문제에 대한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를 서로 자기 몸을 주장할 수 없는 관계로 말합니다. 하지만 과연 결혼한 여러분은 자신의 몸을 이러한 시각으로 바라봅니까?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이 말이 결혼한 부부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면 결혼하지 않은 분들과는 무관한 내용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나중에 결혼했을 때를 대비해서 기억하고 있으라는 취지일까요? 그렇다 해도 그것은 바울처럼 독신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무관한 내용이 될 것입니다.

 

 

분방을 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분방하는 부부가 있었다면 그것은 어쩌면 금욕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서 육신의 욕구를 억누르기 위한 차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이혼을 위해서 분방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 대해서든 바울은 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유는 각자 자기 몸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바울은 결혼의 문제, 또는 부부의 문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결혼을 했을 때 실감되는 것 중의 하나가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편은 아내의 요구에 따라서, 아내는 남편의 요구에 따라서 움직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집안일을 요구할 때 하기 싫어도 할 때가 많습니다. 내 몸을 아내가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몸을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했습니다. 내가 주장하는 내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이런 말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문제는 그리스도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는 것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답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도덕적인 삶이나 충실한 교회생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마 거의 모든 분들의 삶은 생존의 문제로 집중되어 있을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존의 최고 목표는 행복입니다. 자기 행복을 위해 직정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키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에도 참된 행복은 없습니다. 잠시 느끼는 행복일 뿐 사람은 수많은 일로 인해 흔들리면서 불안과 염려 속에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지체인 신자가 그리스도로 인해서 깨닫게 되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에 참여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니면 생명에 참여될 수 없습니다. 내가 주장하는 내 몸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금욕적인 삶을 산다 해도 생명에 들어가는 것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고전 12:27절에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여러 지체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하나로 모아집니다. 그리고 각 지체들의 공통적인 것은 그리스도 한분으로 부족함이 없는 충만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지체로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서로가 그리스도의 지체로 하는 것일 뿐이기에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대로 살면 됩니다. 어떻게 살든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사실을 기억하다면 내 몸이 아닌 주의 몸으로 주께 영광 돌리는 일에 마음 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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