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4.21 14:07

(49강) 환난으로 말미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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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5.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26.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27.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28.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29.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설교>

작금의 기독교와 기독교인의 문제적 현실은 신앙과 삶의 분리라고 생각됩니다. 신앙과 삶이 분리되어 있다고 하면 대개 실천이 없는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제가 말하는 신앙과 삶의 분리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의 시각에서 평가한다면 실천이 있는 삶을 신앙과 삶의 일치로 해석하는 것이 신앙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과 삶의 일치를 실천의 문제로 연결한다면 신앙은 실천이라는 틀에 갇혀서 수많은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가령 힘없이 누워있는 노숙인 곁을 지나갈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과 삶의 일치가 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대개의 사람들은 얼마라도 노숙인을 돕는 것이 신앙인의 실천이며 신앙과 삶의 일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노숙인을 도울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노숙인이 한 둘이 아니라 많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못 본 척 그냥 지나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도울 수는 없을 것이니까요. 그런데 다음날에도 노숙인을 만났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제 도왔으니까 그냥 지나쳐도 될까요?

 

 

실천은 결혼 문제에 대해서도 혼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독신과 결혼 중 어느 것이 성경적이냐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신자로서 이혼이 옳으냐 그르냐를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의 분위기는‘신자는 이혼하면 안된다’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는 말로 이혼의 문제에 매이지 말라고 합니다.

 

 

또한 교회는 일반적으로 믿는 자는 믿는 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고후 6:14절의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바울의 말을 내세웁니다. 그래서 믿지 않은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면 교회에서 눈치를 보게 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과연 이러한 실천을 신앙과 삶의 일치라고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교회가 윤리와 도덕, 그리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한 실천을 가르치고 요구하는 것은 교인을 막다른 길로 몰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거나 아예 문제가 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고 지나칩니다. 이로 인해서 삶이 신앙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25,26절에서 바울이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은 사람이 임박한 환난을 생각한다면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사람이 독신으로 지내는 것과 임박한 환난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면 끝까지 독신으로 살 것을 주장해야 하는데 28절에서는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고 말합니다.

 

 

결혼에 대한 바울의 의견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결혼에 대한 시각과 생각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혼을 남자든 여자든 자기 인생의 행복을 위한 선택으로 생각하지만 바울은 복음의 시각에서 생각합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임박한 환난이란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재림은 곧 세상의 종말을 뜻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의 마지막 때를 생각하는 종말의 시각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을 종말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당연히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만이 마지막 때에 영원한 부활생명에 참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그리스도를 자기 인생에 가장 중요하고 존귀한 분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본인의 능력과 의지가 아니라 종말의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종말 의식이 없다면 사람은 눈앞의 현실 문제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마지막 때는 그의 의식에서 희미한 그림자처럼 자리할 뿐이고 현실의 문제만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자기 인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조건적인 것들로 부각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철저한 종말 의식으로 존재했던 바울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결혼에 대한 것도 세상의 마지막을 믿는 종말의 시각에서 해석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독신인가 결혼인가’라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존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본문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따질 것은‘독신이 좋은가 결혼이 좋은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결혼을 그러한 계산과 저울질로 대하는 것이 과연 임박한 환란을 생각하는 종말 의식을 가진 신자라 할 수 있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아마 이러한 말을 듣는 것이 심적으로 부담스러울 것입니다.‘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여 잘 살면 되는 문제를 굳이 종말과 환란을 언급하면서 복잡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관심이 어디로 향해 있는가를 생각하면 바울의 그 마음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경우와 환경과 형편에서라도 신자가 추구하는 것과 인생의 목적과 방향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로만 향해야 한다는 절대적 믿음이 있는 사도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다만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할 뿐‘나의 행복’을 위한 인생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본문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 교회를 보면 과연 임박한 환난을 생각하는 종말 의식이 있는지가 의심스럽습니다. 교회에서 드러나는 행태들이 종말이라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건에 마음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교회 부흥에 매달려 아등바등하는 것이 도무지 예수님의 재림의 때, 종말을 믿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물론 시한부 종말론 자들처럼 삶을 팽개치고 집단생활을 하거나 하루 종일 기도하고 찬송 부르는 것이 종말 시각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도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종말에 대한 믿음이 세상에서의 삶을 인정하지 않거나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바울은 다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에서의 행복을 인생의 목표와 의미로 두게 되면 그리스도로 인한 참된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됨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에 영향을 끼쳤던 사상 중의 하나가 쾌락주의입니다. 인생의 목표를 행복에 두고, 행복은 감각적 육체적 쾌락을 추구함으로써 달성된다는 것이 쾌락주의입니다. 이러한 쾌락주의의 영향 아래서는 결혼도 결국 행복이라는 범주 안에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알았기에 자기 행복이라는 욕망에 마음이 기울어진 상태가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앙을 흔드는 위험성에 대해 경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쾌락으로 인한 행복을 멀리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만약 바울이 쾌락을 죄악시하고 멀리할 것을 가르쳤다면 그것은 금욕주의가 됩니다. 쾌락을 억누르고 멀리하는 것을 선으로 간주하고 금욕이란 방법으로 구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 역시 바울에게는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임박한 환난에 대해 말함으로써 쾌락이든 금욕이든 자기 행복을 찾고자 하고 오직 거기에 목표를 둔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종말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바울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말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의 관심은 자유에 있습니다. 자유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의 핵심이고 7장 전체가 자유를 중심으로 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29-31절의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는 말 역시 자유에 대한 내용입니다.

 

 

지나간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자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며 영원은 생명으로 오신 그리스도께 속함으로 성취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함으로서만 영원함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리스도 밖의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 즉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행복하다거나, 슬프다거나, 기쁘다는 것들도 평생 동안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슬픔과 기쁨이 교차되는 삶을 살다가 사라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몸담고 사는 세상의 모든 일은 말 그대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지나가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말을 잘못 이해하면 ‘세상은 사라지는 것이니까 세상에서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라는 말을 아내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무시하라는 뜻으로 곡해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말은 현재의 삶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내가 있고, 울 일이 있고, 기쁜 일이 있는 것이 현재의 삶입니다. 우리는 삶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다만 현재의 삶에 붙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설교 처음에 말씀드린 신앙과 삶의 일치입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신앙과 삶의 일치는 자유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말하고 신앙을 말하고 재림을 말하면서도 우리의 말과는 전혀 모순되게 살고 있습니다. 삶의 기준을 ‘내가 행복한가?’에 두고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모순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유하지 못한 것 또한 모순입니다. 마치 평화를 말하면서도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이 모순 속에 있다는 사실부터 눈치 채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무엇을 옳다고 말합니까? 설사 바울이 ‘이것이 옳다’라는 주장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과연 옳은 것만 선택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은 옳고 그름을 따져서 옳은 것을 선택하는 방식이 아니라 나에게 이익이 되고 유익한 것을 선택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선택의 중심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이 ‘독신이냐 결혼이냐’를 두고 고민하는 것도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우리는 죄를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요 8:24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죄 가운데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입니다. 임박한 환난의 날이 되면 세상은 죽음이라는 운명에 의해 완전히 끝나고 모든 것은 지나간 것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독신자든 결혼을 한 사람이든,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사람이든 행복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든 동일한 운명으로 끝날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벗어났습니다. 죽음이 신자를 붙들어 놓지를 못합니다.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의 은혜가 우리를 죄가 아닌 의의 사람이 되게 하였고 생명에 속한 자로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신자는 새롭게 되었습니다.

 

 

신자는 새로운 부름 안에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필요하고 좋은 것을 요구하며 살던 삶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요구하는 것이 있는 삶에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 해서 신자가 하나님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라 하여 순순히 자기 요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사는 자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심으로 이루시고 받으십니다. 신자는 그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에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모든 삶은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일하시는 현장입니다. 우리를 예수님이 오셨을 때 부활생명의 세계에서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백성으로 남겨 놓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서 부르신 그대로 지낼 수 있는 것이고 있어도 없는 것처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환난 앞에서는 세상의 어떤 것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있다 해도 없는 것과 같고 가졌다 해도 가지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환난을 견디게 하고 환난에서 건져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후 1:9-10절을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육신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결혼을 해도 돈을 벌어도 육신의 고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신자는 이 고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육신으로 무엇으로 이루었다 해도 그것이 행복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만이 참된 행복과 기쁨이 됨을 믿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자 하는 그가 자유 안에 있는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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