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010.05.24 18:07

(22강) 신자로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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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4:2-6http://onlycross.net/videos/Colossians/col-04020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골 4:2-6)

 

<설교>

신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불신자와는 다른 특별한 삶을 신자다운 삶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삶이 아니라 불신자에게는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신자의 삶은 불신자의 삶과는 달라야 합니다. 아예 불신자에게는 없는 삶이 신자의 삶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앞서 말한 것처럼 특별한 삶, 즉 수준 높은 도덕적인 삶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런 의미의 수준 높은 삶은 불신자도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만의 고유한 삶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가정이라는 보편적인 삶, 그리고 종과 상전이라는 보편적인 삶을 내세워서 신자로 사는 것은 무엇을 행하고 실천을 해야 하는 특별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현대 교회의 유혹은 특별한 것을 통해서 타인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특별하게 기도하려고 하고, 전도를 해도 특별한 전도가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너와 다르고 나의 전도는 너와 다르다는 차별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특별한 것을 선호하는 것 때문에 ‘관상기도’라는 것을 만들어 내고 ‘릴레이 기도’라는 것을 만들어 냅니다. 전도도 ‘행복한 전도’‘다락방 전도’라는 용어와 실천 방법을 만들어 내면서 기존의 전도방법보다는 더 효과 있고 교회 부흥에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된다고 선전합니다.

 

 

본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한 사도의 권면인데 사도의 권면에 보편적이지 않고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삶이 있습니까? 2절을 보면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단순한 말이 아닙니까? 기도를 계속하라는 것은 ‘그냥 하던 대로 하라’는 뜻입니다.

 

 

방언을 한다는 사람들은 그냥 기도하는 것보다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은혜가 된다는 말을 합니다. 그냥 기도하면 5분이면 끝나는데 방언으로 하면 하루 종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기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기도의 수준이 시간으로 평가될 수 없을뿐더러 방언으로 하는 기도가 더 은혜가 된다는 것 또한 자기 느낌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한 기도는 감사가 있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에 특별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손을 들고 소리를 지르든 조용하게 묵상을 하든 감사의 기도가 있다면 그는 깨어있는 자라는 것이 사도의 말입니다.

 

 

기도에 감사가 있는 것은 그냥 살아가는 법을 알 때 가능합니다. 감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 때 나타나는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의 것이 부럽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서 하는 기도라면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사가 있는 기도는 예수님에 대해 깨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깨어있다는 것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이고 예수님이 내게 오셔서 하신 일을 마음에 두고 살아감을 뜻합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감사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흑암의 권세 아래 있던 나를 권세로부터 구출하시고 흠없는 거룩한 자로 세우신 예수님을 알기에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골로새 교회에 옥에 갇혀 있는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내용은 옥에서 나오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열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서 교회를 부흥하게 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는 자신이 어떤 형편에 처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이 전도의 문이 되어서 오직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지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사도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껏 사도가 해왔던 일이고 사도의 변하지 않는 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도는 자신이 한 일을 자기 능력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열정이 아니라 배후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사도를 다스리시며 밀어 붙인 결과임을 알기 때문에 변함없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 삶이되기를 위한 기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의 기도가 특별한 것입니까? 사도는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며 살아온 그대로 앞으로도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수천 수만 명을 전도하고 많은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바울이 바라보는 목표가 아닙니다. 바울이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이 전도의 문을 열어주실 때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삶의 전부였던 것입니다.

 

 

사도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하는 것 말고 특별히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목사에게 하나님이 전도의 문을 열어주시는 대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기를 소원하는 그 마음 말고 또 달리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목회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기를 소원하는 마음만으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목사의 그런 마음을 보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관심을 두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회의 목적은 교회의 성장입니다.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는 사람을 다룰 줄 알아야 하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도 필요합니다. 사람을 달래기도 하고 적당히 기분 좋게 만들어 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개발하거나 모방을 해서, 교인들이 교회에 지루함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하고 목사는 목회에 열심을 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처럼 교회를 생각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교회를 책임지려고 하는 것만 보이게 됩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기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생각하지 않고 목사로 세우신 주의 뜻을 생각하고 목사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목사는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고자 하는 그 마음으로 충분합니다.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행함과 실천을 통해서 자신을 보여줘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와 마찬가지로 목사 역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5,6절에서는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는 말을 합니다.

 

 

신자는 외인에 대해서도 동일한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 것은 외인이든 외인이 아니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합니다. 특별히 도덕적인 삶을 보임으로써 외인들에게 신자답다는 인정을 받고 그렇게 해서 그들을 교회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 신자의 역할이 아니란 것입니다.

 

 

외인에 대해서도 신자는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과 같은 말을 하면 됩니다. 이것이 지혜로 행하는 것이고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잘 사는 것이 목적이 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고 주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 신자의 역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신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답을 가진 자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외인이 힘 있는 자라고 해서 그에게 아부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는 세상의 힘에 굴복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이러한 권면은 신자는 주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충분함을 증거합니다. 다른 행함과 실천을 통해서 자신을 돋보이고 그것으로 신자다움과 사도다움을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신자다움은 신자의 행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증거됩니다. 신자가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것으로 이미 신자다운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인정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보실 때 신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것으로 자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별하고 수준 높은 삶을 산다고 해도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삶이 인간을 바꾸어 놓지 못합니다. 그 어떤 도덕과 윤리도 인간에게 있는 음란, 부정, 사욕, 정욕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인정하고 칭송할만한 삶이 없다고 해서 자신이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스스로에게 확인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용서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그것은 주님의 은혜인 것이지 여러분의 공로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그리스도로 감사한다면 세상과는 상관없이 신자입니다. 과연 여러분이 이러한 믿음 안에 있습니까?

 

 

신자는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기 보다는 나 같은 자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은혜가 내 마음에 살아있고 그 은혜가 힘이 되어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면 됩니다.

 

 

이런 믿음으로 모이는 신자의 모임에서 신앙의 간격은 없습니다. 할례를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이 신앙의 간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인간의 것을 내세움으로써 간격을 만들고 그 간격을 벌리며 삽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그 간격을 메우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잘하려고 하지 마시고 복음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시고 복음의 정신을 따라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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