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010.05.10 18:40

(20강)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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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3:15-17http://onlycross.net/videos/Colossians/col-031517(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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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 3:15-17)

 

 

<설교>

신자에게 감사는 자기부인이 바탕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의 감사는 자기부인이 아닌 자기만족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타인보다 더 나은 자신의 외적 형편과 조건 등을 바라보면서 그에 대한 만족을 감사라는 명분으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타인보다 나은 것이 없을 때 감사는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신자에게 감사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해주셔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감사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뒷짐 진 채 그냥 계시는 분이 아니라 그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그 뜻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뜻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흘러간다면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는 신자가 자신을 위해 발버둥 치며 애를 태워야 할 일은 사실 없습니다.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못난 자신에게 실망하고, 때로는 타인보다 더 나은 것으로 흡족해하며 감사하는 것도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며 자기에게 집착한 인간의 모습일 뿐입니다.

 

 

자기부인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자기사랑이 중심이 된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인한 감사가 아니라 자기로 인한 감사이기 때문에 참된 감사가 아닌 것이며, 이것이 현대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감사의 수준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는 ‘감사하라’는 말을 세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과연 어떤 의미에서 감사할 것을 세 번 반복하면서 강조하는 것이고, 사도가 말하는 감사의 의미는 또 무엇일까요?

 

 

골로새 교회에는 거짓선생들이 들어와서 할례를 하고 절기를 지킬 것을 강조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할례를 하지 않고 절기를 지키지 않는다면 참된 신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이러한 말로 인해서 교회는 할례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 절기를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의 분열이고 평강을 깨뜨리는 것이 됩니다.

 

 

이로 인해서 교회에서 사라지는 것은 감사입니다. 신자가 십자가를 바라보게 된다면 자신의 행위나 외적 조건과 상관없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서 모든 신자가 동일한 감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례를 지키든 지키지 않든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 아래에서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할례나 절기처럼 외적인 행함과 실천을 참된 믿음의 증표로 받아들이게 되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실천이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타인의 행함과 비교하면서 좀 더 우월한 자신으로 인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감사를 바리새인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눅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세리와 따로 서서 기도하기를“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바리새인의 감사가 참된 것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바리새인의 감사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세리는 멀리 서서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말을 할 뿐입니다. 누가 참된 감사를 할 수 있을까요? 참된 감사는 자기부인이 바탕이 되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감사는 세리와 같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는 자기부인이 바탕이 되어 있을 때 신자는 내가 아닌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행하심이 은혜로 다가오게 되고, 놀라우신 은혜로 인해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가 왜 사라지겠습니까? 신자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바라보고 바리새인과 같은 생각으로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생들이 신자의 행함과 실천을 강조하고 그것이 참된 신앙의 증거인 것처럼 가르침으로 인해서 행함과 실천이 있는 자기를 보면서 자기 신앙에 만족해 할 때 예수님으로 인한 감사는 사라집니다.

 

 

어떤 사람이 40일 금식기도를 한 후 ‘40일 금식기도를 무사히 마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명목으로 감사헌금을 했다고 합시다. 여기에는 40일 금식기도를 했다는 우월감이 가득합니다.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감사를 한다는 구별 의식도 있고, 40일 금식기도를 했다는 자기 자랑도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라지고 없는 감사입니다.

 

 

만약 금식기도를 마치게 된 것이 예수님 때문이라는 생각이 진심이라면 40일 금식기도는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니기에 자랑거리로 내놓을 수도 없는 것이고 금식기도를 했다는 것으로 다른 사람과 자신을 차별화 하지도 않게 됩니다. 따라서 금식기도를 따로 떼어서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에게는 금식기도를 하는 것만 아니라 모든 것이 예수님의 도우심과 함께 하심으로 되어진 현실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이런 생각으로 존재한다면 할례를 한 사람이든 하지 않은 사람이든 자신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할례만이 아니라 모든 행함과 실천에 대해서 이런 시각으로 대하기 때문에 행함과 실천으로 인한 차별은 자연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평강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평강 역시 인간의 친분관계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자기를 부인한 자로 모였을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는 말을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교회의 평강은 신자가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자로 모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교회에서는 인간이 행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하심만이 감사와 자랑거리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서로의 행함과 실천을 나타내고 그것을 비교하는 자로 모인다면 평강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과 못한 사람으로 나뉘게 될 뿐이고, 신앙이 좋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나는 너와 다르다’는 의식을 가지고 타인의 신앙을 평가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미 한 몸의 관계가 깨어진 분열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는 말을 합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라는 말은 현대 교회들처럼 단순히 감사를 요구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라’는 사도의 말에는 자신의 행함이나 실천이 아니라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보는 자가 되라는 의미가 담겨 있고, 신자는 그리스도 앞에서 그 무엇으로도 잘난 자와 못난 자로 구별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생각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이름을 위해 살아갑니다.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자기에게 두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잘됨과 높아짐을 통해서 삶의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누립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자신만 보일 뿐이고 신도 자신을 좀 더 완벽한 존재로 그 질을 향상시켜주는 도움자로 바라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효력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피의 효력으로 인한 인간됨은 자신이 꿈꾸고 원하는 인간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에 이러한 사람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감사가 사라지고 다만 우월과 차별이라는 시각에서 자신의 현재 조건에 만족해하는 사람들의 자기중심적 감사가 난무할 뿐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리스도께 감사하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신자가 아닌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를 섬기는 종교인으로 모이고 있는 교회의 실상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같은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비교했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보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비해 형편없는 조건과 모습에 대해 크게 실망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주눅이 들고 당당하게 말씀도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하셨고, 세상에서의 조건이나 형편은 말 그대로 무가치한 것이었기에 비교할 필요성조차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평강입니다.

 

 

그리스도 안의 신자는 그 무엇으로도 서로를 비교할 필요가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비록 서로 다른 행함과 실천을 한다고 해도 그 역시 비교 조건은 될 수 없습니다. 신자는 무엇을 해도 은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구제를 한 것도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고 선교를 했다고 해도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설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비록 다른 행함과 실천이 있는 사람으로 모인다고 해도 자기 것을 내어 놓고 비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평강이 함께 한 한 몸 된 교회입니다.

 

 

16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는 말을 합니다.

 

 

신자의 관계에서도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수준 높은 신자가 수준 낮은 신자를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면서 말씀이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누가 자신을 가르친다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다만 하나님이 누군가를 세워서 내 속에 말씀이 풍성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권면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인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의 거짓 선생들은 자신들의 학식과 수준 높은 조건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말에 복종하도록 합니다. 마치 많은 목사들이 박사 학위를 동원해서 자신의 수준 높음과 실력을 자랑함으로써 교인들을 복종케 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신자를 가르치는 것은 말씀의 능력이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말씀이 풍성한 자로 만들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17절에서도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모든 일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신자에게는 자신이 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에서도 내가 아니라 주님을 나타내고자 하게 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의 본분입니다. 진심으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교회가 참된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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