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009.12.29 18:47

(1강) 신실한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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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1:1-2http://onlycross.net/videos/Colossians/col-010102.wmv

<본문>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골 1:1-2  개정)


<설교>

교회의 은혜의 충만은 예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이 곧 우리의 전부고 생명이라는 믿음에 거한다면 그것으로 교회는 은혜로 충만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관심은 오직 말씀에 있어야 하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고 그 분의 은혜와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어지는 것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교회가 지향하는 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우리는 말씀으로 충분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교인 수나 재정이 교회의 관심이 되어서는 안되고 또한 교회가 지향하는 바가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교인 수나 재정과 같은 외적인 것을 지향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가 어떤 은혜 아래 있고, 어떤 충만을 누리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더 많은 것으로 채움 받기 위해 교인들에게 열심과 봉사 헌신을 강요하는 집단으로 전락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도를 통해 전한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이 교회를 장악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서신을 쓴 골로새 교회는 거짓 선생으로 인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교회에 바울은 신자가 어떤 존재이며 또한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전함으로써 골로새 교회가 진정한 생명의 말씀 위에 굳게 서기를 촉구하기 위해 서신을 쓰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라는 말로 서신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다는 말은 바울의 서신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단지 입에 붙어 나오는 인사말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고, 때문에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경계시켰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라는 직책이 자신의 뜻을 위한 도구로 사용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자의 신자 됨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지 인간의 뜻이나 결심에 의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목사까지도 자신을 신자로 만들어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신자는 다만 하나님께 신실해야 할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신자 되었다는 것이야 말로 신자에게는 흔들리지 말아야 할 본명한 명제로 존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신자 되었다면, 분명히 우리를 신자 되게 하셔서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즉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존재하는 신자라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이러한 명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거꾸로 하나님이 신자를 위해 존재하시고 교회를 위해 일하신다는 다른 명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신앙이 좋으면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준다는 이상한 신앙을 고집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다는 바울의 말은 단순히 서신을 쓸 때 동원되는 양식 정도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매 서신마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되었음을 말한다면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되었음을 잊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또 그것은 오늘 신자 된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보여주는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되었기에 오직 하나님께 신실한 사도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신자도 하나님에 대해 신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사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즉 ‘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되었으니 나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하나님의 뜻을 그런 식으로 이용을 합니다. ‘목사도 사도처럼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기 때문에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는 엉터리 말로 교인들을 혼란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거짓 선생이 들어와서 복음이 아닌 다른 말을 전할 때 그것을 분별하여 물리치지 못하고 혼란을 겪는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되었다는 명제 위에 서있지 않는 것이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절을 보면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조금 의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한 대로 골로새 교회는 진리에 굳게 서서 흔들림이 없이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거짓 선생에 의해 혼란스러워진 형편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실과는 거리가 먼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실은 진리의 말씀만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거짓 교훈이 들어온다고 해도 전혀 흔들림이 없이 믿음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신실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신실한 형제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에 있지 못합니다. 오히려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받아야 하고, ‘잘못된 교훈도 분별하지 못하고 미혹을 받는가?’라고  책망을 받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신실한 형제라고 일컫는 것이 의외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단지 인삿말이 아닙니다. 속은 아니면서 겉만 좋은 척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을 진심으로 신실한 형제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과연 바울은 무엇을 기준으로 골로새 교인을 신실한 형제로 여겼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하는 중요한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그 피가 내게는 의가 되고 생명에 있게 하는 공로가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 믿음이 있는 자가 성도이고, 그가 바로 신실한 자입니다.


대개 신실하다고 하면 그의 말이나 행동을 보고 판단하려고 합니다. 바른 언행과 성실한 행동, 다시 말해서 교회에서 항상 온순하게 말하고 교회 일에도 남보다 앞장서며 부지런할 때 사람들은 그를 신실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에게 신실한 형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나의 의가 됨을 믿는 그 믿음 안에서 바울은 모든 성도를 신실한 형제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의 신실함을 훼방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이는 것을 가지고 접근하는 다른 복음인 것입니다.


골로새의 거짓 선생들은 할례와 먹고 마시는 문제, 그리고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 문제를 가지고 접근을 하였습니다. 할례와 절기에 대한 규례를 실천하는 것이 진짜 믿음이라는 말로 에바브라가 전한 사도의 복음을 훼방하였던 것입니다.


신자의 관계는 할례 문제나 절기를 지키는 것 등과 상관이 없습니다. 신자라는 관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의 피로 인해서 이루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주로 믿는 믿음 하나로 이미 형제라는 관계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신실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은 할례를 받지 않고 절지를 지키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라는 말을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 안이라는 관계를 훼방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서로 나누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함께 감사하는 신실한 형제 관계를 ‘할례를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절기를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로 구분하게 한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교회에서의 행함을 기준으로 믿음을 판단하며 결국 행함이 기준 되어 믿음이 좋은 자와 좋지 않은 자로 구분되면서 분리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실한 형제 관계라 훼손된다는 것은 전혀 인식하지를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보다는 더 큰 교회가 되어야 하고, 외부에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만 강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이유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부름 받았다는 신자됨, 교회됨의 분명한 명제를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할례와 절기 같은 형식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의 전부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 의해서 신자는 십자가만을 바라보며 생명의 길로 이끌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할례나 절기를 주장하는 사고방식은 믿음의 본질을 예수님께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두고 있습니다. 할례나 절기를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지를 않습니다.


히 10:5-7절을 보면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제사나 제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처럼 예배나 헌금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완벽히 행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할례도 절기도, 인간의 모든 행함이 사라지고 없는 곳입니다.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행함도 신앙의 근거로 여기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신실한 형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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