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8.09 10:34

(99강) 소경의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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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5:12-20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5122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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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2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14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15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설교>

 

◎ 전통이 안고 있는 문제 ◎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장로의 전통을 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 책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율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별도의 규례를 만들어 그것을 대대로 지켜온 것이 문제였다면 지금 우리는 기독교에 전통으로 자리한 모든 것을 폐지해야만 합니다. 지금의 교회에서 행해지는 예배 의식이나 성찬의식, 그리고 그 외에 교회에서 행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사실 기독교의 전통으로 자리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장로의 전통을 율법처럼 인정하셨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유대인들이 어떤 전통을 지키며 살든 예수님은 관심 두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고 먹어야 한다는 규례를 만들어 지킨다고 해서 구원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에는 병자를 고칠 수 없다는 규례를 만들어 놓았다고 해서 구원 받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이러한 규례와 전통 자체가 문제 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는 것도 문제로 삼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율법이 아니고,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에 자리한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자가 식사를 하면서 기도를 하지 않고 먹는다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것도 목사가 식사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분명 뭔가 이상하거나 신앙이 없는 목사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목사면서 왜 기도를 하지 않고 밥을 먹는가?’라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통해 드러난 전통이 안고 있는 문제입니다.

 

 

유대인은 수많은 규례를 만들어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깨끗한 인간이 되고자 했습니다. 인간이 만든 규례를 지킴으로써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산다는 착각에 빠지게 했고, 그 착각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매우 깨끗한 사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있다는 또 다른 착각에 머물게 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규례를 지키지 않는 것은 곧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수준 높은 신앙적 행동을 규례화하여 지킨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을 거룩하거나 깨끗한 존재로 만들지 못합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유대인들에게 있는 장로의 전통은 이 같은 사실을 잊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전통이 안고 있는 문제였습니다.

 

 

손을 씻고 음식을 먹든 씻지 않고 먹든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따라서 나처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를 비난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혹 대대로 지켜오던 전통이기 때문에 손을 씻는 것을 버릴 수 없다면 그대로 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전통적 행위를 신앙으로 규정하고 전통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비난과 판단으로 반응하는 것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장로의 규례를 거룩한 신앙적 행위로 여기고 그러한 행위가 자신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 의해서 전통을 따르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비난과 정죄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 걸림이 되는 말씀 ◎

 

예수님은 이들의 비난에 대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1절)는 말씀으로 답하십니다. 즉 사람은 입에 들어가는 음식과 상관없이 본래부터 더러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더러움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함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더러운 그것은 그 어떤 규례를 만들어 실천한다고 해도 가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이것을 안다면 믿음의 방향은 분명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식사 기도와 같은 신앙적 행동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을 신앙으로 여기는 것이 문제 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적 행동을 신앙으로 여기게 되면 인간은 그 행위를 기준으로 자기 신앙을 확인하게 되고 타인을 비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라고 염려의 말을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바리새인들에게 충돌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장로의 전통을 지킴으로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인데 예수님은 그 같은 전통이 인간이 정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께는 걸림이 되지 않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편에 서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더럽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어떤 규례를 만들어 행하든 그것이 그들을 깨끗하게 하지 못한다면 하면서 그들의 모든 노력과 행위를 수포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걸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모든 노력과 행함을 무너뜨리면서 다가오십니다. 이러한 말씀이 구원의 욕구를 가지고 사는 인간에게 걸림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을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의 현장으로 끌어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간이 감히 구원을 바랄 수 있는가를 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만들어 가시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행함과는 무관합니다.

 

 

대개의 신자들은 신앙으로 사는 것을 특정 행동을 실천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더 수준 높은 신앙으로 살기 위해서는 좀 더 세분화되고 나은 행동을 만들어 내어 실천하려고 하지만 신자가 신앙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부정함을 잊지 않음으로써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케 하셨음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라면 예수님의 깨끗케 하심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는 말씀에 해당되는 수준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입술로는 십자가를 말하지만 마음은 십자가에 멀다는 것이 자신의 더러움은 보지 못하고 타인의 행동을 비난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심으신 것 ◎

 

13-14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심으신 것뿐입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많은 것을 심었다고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이 심으신 것만 인정하십니다. 인간의 눈에는 수준 높은 신앙의 행위로 여겨지는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외면하시고 다만 하나님이 심으신 것만 찾으십니다. 그리고 인간이 심은 모든 것은 다 뽑혀 버릴 것입니다.

 

 

시 80:8절에 보면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한 주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는 애굽에서 구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하지만 그 이스라엘은 혈통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의 은혜로 살아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즉 인간의 신앙심이나, 혈통이나, 행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만들어진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심으신 포도나무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이 포도나무를 심으셨다’는 말씀 앞에서 ‘내가 어떻게 하면 포도나무가 될까?’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포도나무로 만들고, 더 나아가 쓸모 있는 포도나무로 증거되기 위해 많은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헛된 것으로 끝날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심으신 포도나무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렘 2:21-23절을 보면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발이 빠른 암낙타가 그의 길을 어지러이 달리는 것과 같았으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한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는 스스로를 깨끗하다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이방인의 특성이었습니다. 이방인은 자신들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도덕과 윤리의 옷을 입음으로써 스스로를 깨끗한 자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방인처럼 자기 행함을 바라보면서 깨끗하다 여긴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로 드러난 것이고, 하나님이 심으신 포도나무가 아니기에 뽑혀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된 포도나무를 심으셨고, 참된 포도나무의 가지만이 하나님이 심으신 것으로 인정될 뿐입니다. 그것을 요 15:5-6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참된 포도나무는 세상에 선포된 저주와 심판에서 자기 백성을 구출하는 통로로 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그 포도나무로 인해서 발생한 가지는 자신을 저주와 심판에서 구출한 참 포도나무의 희생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가지는 자신의 노력과 행함에 눈을 두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더러움을 보면서 참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 신앙으로 사는 것 ◎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알면서도 수많은 규례를 만들고 그 규례를 통하여 좀 더 깨끗한 신자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소경입니다. 이러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면 그 결과는 뻔합니다.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모두 뽑힌다는 진리도 모른 채 인간의 것을 심기 위해 애쓸 뿐이고 그것을 보면서 스스로 만족해하는 어리석은 길로만 갈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이지 자신이 만든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기뻐하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온통 교인들로 하여금 힘을 다해 예수님이 기뻐하실 것을 만들어 내라고 다그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자기 구원에 목마른 사람들의 욕망을 이용하여 자기 배를 채우려는 것일 뿐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는가를 살펴보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소경된 상태이기 때문에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여기면서 결국 뽑힐 수밖에 없는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동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십자가를 믿는다면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의 세계는 무엇보다 자신의 본질을 아는 사람들의 세계인데, 그러한 세계에서 신앙의 수준을 구별하면서 비난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더러움의 상태에 있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 더러움은 무엇으로도 씻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거룩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 분으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거룩의 자리에 옮겨 놓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거룩은 하나님의 은혜일뿐이지 인간의 공로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전통과 규례의 실천 여부로 자신을 깨끗한 신자로 여기고 그것을 기준으로 타인을 비난한다면 결국 추수 때에 하나님이 심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며 뽑히게 될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볼 때는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제자들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사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면서 자기 멋대로 살았습니다.

 

 

신자가 신앙으로 사는 것은 여러 가지 그럴듯한 법과 규례를 따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인간의 더러움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흘리신 그 피가 생명임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을 진리를 따라 행하는 삶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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