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2.01.22 13:07

(167강) 군병들의 조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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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7:27-31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72731.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설교>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붙들려 빌라도에게 넘겨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죄성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죄 있는 자로 만들어 십자가에 죽게 하기 위해 온갖 거짓과 술수와 타협이 동원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이 곧 우리에게 있는 죄성이며 우리 또한 그 죄성을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음을 예수님이 죽으시는 과정에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빌라도에게서 예수님을 넘겨받은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님을 괴롭히고 희롱하는 내용입니다. 총독의 군병들은 예수님을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은 후에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우고 오른손에는 갈대를 들리웁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유대인이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는 말로 예수님을 희롱합니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 군병들이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희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예수님의 머리를 치는 것으로 철저히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총독의 군병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악한 감정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피해 입은 일도 없고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 큰 관심도 없었을 것인데 악한 감정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총독의 군병들이 특별히 악해서 그 같은 조롱을 했다고도 생각되지 않습니다. 군병들은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군인이어서 특별히 포악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서 왜 그 같은 행동을 하는 것입니까? 바로 이것이 인간에게 있는 죄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군병들에게 조롱 받으신 이 내용을 보면서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멸시와 고난의 길을 가신 것으로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고통과 멸시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만 생각하면 십자가에 대해 감상적으로 흘러갈 위험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고통을 받으셨는가?’라고 예수님이 받으신 고통을 상상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감상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2004년도에 상영되었던 멜 깁슨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이 제작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 영화를 본 수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고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는 감상평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부각된 것은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의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심한 고통을 받으셨는가를 생생한 묘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고통으로 청중들을 끌어 들였던 것입니다. 영화는 청중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입니다.

 

 

신앙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기를 소원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위한 자기 인생을 포기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며 믿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며 눈물 흘린다고 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원하는 내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길을 소원하게 된다면 그것은 인생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증거입니다. 인생의 가치에 대해 깨달았기에 고난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길을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드러난 인간의 죄성이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실체가 이 죄성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보다는 애통하는 심령으로 예수님께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군병들은 예수님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조롱합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나 전혀 유대인의 왕이라고는 생각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대인의 왕일 수 없는 자가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니 우습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을 상징하는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고 갈대를 들리우면서 조롱을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는 말하지만 속으로는 결코 왕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하지만 그 역시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 예수님의 처지를 조롱하기 위한 말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고 유대인의 왕으로 심문을 받으시고 유대인의 왕으로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이처럼 유대인의 왕으로 오셔서 죽으시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하셨지만 누구도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군병들은 왕 같지도 않은 인물이 스스로를 왕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희롱을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의 왕 되심을 알아보고 왕으로 대접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바로 신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신자인 우리 역시 예수님을 우리의 왕이라고 높여 부릅니다. 하지만 과연 왕으로서 대접을 하고 있습니까? 왕을 왕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왕이라면 우리는 백성입니다. 백성은 왕의 말씀에 절대 복종 해야 합니다. 백성된 자는 왕 앞에서 자신의 뜻을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오직 왕의 뜻만이 존재할 뿐이며 왕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백성의 도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왕이라고 부르면서도 나의 뜻을 그대로 간직한 채 예수님을 찾습니다. 내 뜻을 이루어 달라고 합니다. 도대체 누가 왕이고 누가 백성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왕으로 인정하지도 않고 대접하지도 않으면서 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곧 조롱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은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들로부터 배척 받으시고 조롱 받고 계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 군병들의 모습에서 나를 보게 되는 것이고, 나에게서 로마 군병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로마 군병과 내가 일치되어질 때 십자가는 나의 죄를 고백하는 현장이 되는 것이고, 나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예수님이심을 절감하게 될 때 주를 위해서는 죽는 길도 가겠다는 고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말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님을 위해서는 죽는 길로 가게 해달라고 간절한 마음을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군병들은 왜 그렇게 예수님을 괴롭히고 조롱했을까요? 우리는 군병들의 이 같은 태도에서 인간의 폭력성과 함께 약자에 대한 횡포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죄성인 것입니다.

 

 

요즘 사회적 문제 중의 하나가 학교 폭력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힘없는 약자들이고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폭력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붙잡히며 그냥 장난 좀 쳤을 뿐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몇몇 학생들만이 약자에 대한 가해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가해자이며 피해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약자에 대한 인간의 폭력성이 예수님으로 인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약자를 무시하고 괴롭히고자 하는 폭력성은 교육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눈에 나보다 약한 자가 보이는 한 폭력성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해결책은 자신이 약자임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약자임을 아는 것은 십자가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성을 낱낱이 보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시기와 치사함과 치졸함과 힘 앞에서는 타협하며 살아가는 자신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죄악성에 대해 보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의 잘남은 결코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는 사람이 신자인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불의하고 더러운 자로 살게 합니다. 죄가 있는 우리에게서 쏟아지는 것은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비방, 미움, 능욕, 교만, 자랑, 무정, 무자비함(롬 1:29-31)등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자신을 옳다고 하고, 정당하다고 합니다. 오히려 남을 판단할 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자신의 죄성을 보고 예수님께 나올 때 십자가의 가치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그 피가 덮은 인간이 죄가 모두 내게서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될 때 십자가의 참다운 가치가 무엇인가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에 뜻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기 전에 여러분의 인생의 가치를 십자가에 두고 있는가 부터 생각하셔야 합니다. 십자가에 인생의 가치를 두고 산다면 사도 바울처럼 세상의 것에 대해서는 배설물처럼 여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인생의 가치를 둔 신자에게서는 세상의 것이 기준 된 판단과 차별이 나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정말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알아주는 높은 위치에 오르는 것을 인생의 가치로 여기면서도 십자가를 말한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대접하지도 않으면서 왕이라고 불러주는 조롱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사는 삶을 재미없다고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잘나고 또는 자식이 잘된 것을 자랑도 하고 싶고, 경쟁에서 이기는 재미도 누려야 살맛이 난다고 할 것입니다. 돈 버는 재미가 없이도 세상 살맛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학생들도 친구보다 높은 점수를 받고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그 같은 삶에서 불의함과 더러움을 봤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인간의 죄성에서 나오는 악한 것임을 봤기 때문이고, 그 같은 뿌리 깊은 죄가 해결되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뿐임을 알았기에 십자가에 이끌려 나오면서 십자가를 아는 것을 가장 고상한 지식으로 여기고, 십자가만 알고 십자가만 자랑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께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진정으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으신다면 예수님이 여러분을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셨는가를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죄로부터의 구원임을 믿으신다면 무엇보다 여러분께 있는 죄성을 보셔야 합니다. 죄의 깊이를 들여다보시면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은혜가 참으로 크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심령이 예수님의 은혜로 충만할 때 신자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이 내게 이뤄지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은혜를 알게 되면 함께 은혜 안에 있는 신자를 은혜로 대할 수가 있게 됩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두가 거짓이고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일 뿐임을 아셔야 합니다.

 

 

신앙은 나의 죄성을 외면하면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길은 자신의 죄성을 들여다보며 내가 예수님을 죽인 가해짐을 마음 깊이 인식하면서 가능해집니다. 나의 죄성을 보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참으로 귀한 가치 있는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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