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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6 10:08

(101강) 부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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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0:27-40http://onlycross.net/videos/nuk/nuk-20274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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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40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설교>

 

◉ 성경과 그리스도 ◉

 

성경에 대한 해석은 참으로 다양하고 많습니다. 같은 성경 구절에 대한 해석의 시각이 왜 그렇게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지, 누구의 말이 맞고 누구의 말이 틀린지 분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엉뚱한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한 마음에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실 때 주석서까지 같이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주석대로 성경을 해석하면 될 것이고, 무엇이 잘못된 해석인지 분명히 판가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내 그러한 생각도 인간을 알지 못한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설령 하나님이 성경 주석서를 주셨다고 해도, 그 주석서 또한 자기 멋대로 해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성경은 인간의 이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늘의 비밀에 대한 선포일 뿐이며 선택된 자만이 듣고 깨닫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철저히 감추어져 있는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실 누구나 듣고 ‘좋은 말씀이다’라고 반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이라면 구원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인간만으로 가능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성경이 왜곡되고 엉뚱한 말이 복음으로 포장되어 난무하는 현실이 오히려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복음이라고 해서 모든 해석이 동일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해석은 달리 하여도 공통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모든 성경이 아들에 관한, 즉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한다면 굳이 신학 지식이 없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깨닫는 것은 신학 지식과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을 많이 공부한 분이 성경을 더 많이 알고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신학이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알고 있는 신학이라는 틀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라면 구약 성경의 율법이나 선지자의 예언 등의 모든 내용도 아들에 관한 증거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당시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한다는 대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이 누구보다 먼저 예수가 곧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알아봤어야 합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이들은 목사였고 신학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유를 말하자면 그들도 메시아의 오심을 믿고 기다렸지만 삶의 중심은 메시아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게서 말씀의 성취를 보기보다는 자신들에게 걸림돌이 된다는 것에만 치중하는 것입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라는 질문으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했지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에 더 이상 책잡지를 못하고 오히려 그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두개인들이 부활의 문제를 들고 예수님과 논쟁을 시작합니다.

 

◉ 사두개인 ◉

 

사두개인은 사두개파에 속한 사람을 말합니다. 사두개라는 용어는 ‘사독’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사독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으며 다윗 왕과 다윗 가문에 특별한 충성심을 보여준 사람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제사장의 후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이 사두개인으로 불린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사두개인에 대한 일반적 생각입니다.

 

 

사두개인은 레위 지파 출신의 제사장들을 포함한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고대의 정통성을 주장하였고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하는 종교합리주의자들이었으며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했지만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의 삶으로만 제한하여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복은 철저하게 현세적인 것이었으며, 죽음 이후의 생명을 믿는 내세적인 신앙을 포함하여 몸의 부활과 영혼 불멸, 천사의 존재도 부인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두개인들이 왜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의 부류에 합류하여 예수님과 논쟁을 벌이는 것일까요? 그 역시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가르침과 활동은 유대사회 안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던 제사장 무리들에게 하나의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두개인들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두개인 역시 주도권 세력에 합류해 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협적인 존재로 여겼고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그들이 불합리한 신앙으로 여겼던 부활의 문제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

 

 

이들이 부활을 반박하기 위해 언급한 것이 시형제결혼법입니다. 계대결혼법, 형사취수법이라고도 하는 시형제결혼법은 형이 죽은 후에 형의 아내, 즉 형수를 동생이 아내로 삼아 대를 잇는 제도를 말합니다. 이 제도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발견됩니다.

 

 

토지가 유일한 재산이었던 고대 농경사회에서 남편이 죽으면 아무런 재산권이 없게 된 여성들에게는 희망과도 같은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남편의 죽음이라는 불행으로 인해 당장 생계 문제가 곤란하게 된 연약한 여인의 아픔과 생존 문제를 해결해주는 제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시형제결혼법은 하나님의 규례로 세워져 있습니다. 신 25:5절에 보면 형이 아들이 없이 죽으면 죽은 자의 아내는 타인에게 시집을 가지 말고 죽은 남편의 형제가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이 같은 모세 규례를 내세워서 칠형제가 이 시형제결혼법을 따라 결혼했다면 부활 때에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를 묻습니다. 부활의 세계에 이런 경우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 이치와 이론적인 생각으로 접근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두개인은 현세적이며 합리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 생각에 시형제결혼법과 부활은 도무지 모순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시형제결혼법을 빌미 삼아 부활이 없음을 주장하며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절대적인 부활의 세계를 그들이 알고 있는 세상의 기준으로 낮추어 생각하고 질문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면 지금의 교회 역시 절대적인 세계를 세상 기준으로 낮추어 생각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천국에 상급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가 천국에서의 상급에 차등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 현세에서 하나님께 충성을 얼마나 했는가에 따라 천국에서 받는 상에 차등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흔히 등장하는 것이 기와집과 초가집입니다. 충성을 많이 한 사람들은 크고 좋은 집에서 살게 되고, 게을렀던 사람은 작고 초라한 초가집에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을 세상 기준으로 낮추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에서의 경쟁과 성과에 따른 차등 대우를 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며, 천국을 세상의 것이 그대로 연장된 세계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 부활의 세계 ◉

 

과연 천국이 그런 곳일까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전혀 성경적인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천국에서 큰 상을 받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신앙생활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는 세상의 이치와 계산법이 상급에 차등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상급에 차등이 있다는 말이 천국을 세상의 기준과 삶의 방식이 연장된 것으로 바라보는 것인 것처럼 사두개인은 부활의 세계를 시형제결혼법이라는 세상의 방식이 연장된 곳으로 바라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형제결혼법은 단순한 사회적 풍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규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단순히 한 가문의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이 같은 규례를 주신 것일까요? 세상의 시각에서는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시각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규례로 말미암아 언약에서 끊어지지 않고 참여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형제결혼법을 하나님의 언약의 세계와 연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그것을 단순히 세상에서의 삶의 방식으로 여긴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와 세상이 철저하게 단절되어있음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34-36절)고 답하십니다.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방식일 뿐 부활의 세계에서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독신으로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예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고 가정과 가문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부활의 세계인 천국에서도 이 세상의 인간관계인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가 존재한다면 시형제결혼법은 물론이고 이혼하는 것도 곤란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에서 우리는 천사와 동등한 존재입니다. 천사는 남자 여자가 없습니다. 따라서 결혼도 없고 내 아내 내 남편이라는 관계도 없습니다. 모두가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남편 때문에 자식 때문에 속상하는 일도 당연히 없습니다.

 

 

사두개인들의 잘못은 부활의 세계를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세상의 방식으로 끌어들여 생각한 것입니다. 세상과 부활의 세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은 죽은 자의 세계이고 부활의 세계는 산 자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살았다’는 의미를 모른 채 부활을 생각하기 때문에 죽은 자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결혼을 부활의 세계에 그대로 적용하여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상급 차등도 그와 같습니다. 상급 차등은 죽은 자의 세계에 통용되는 논리일 뿐인데 그것을 산 자의 세계에 적용하기 때문에 엉뚱한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 ◉

 

37-38절을 보면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세상의 시각에서 본다면 사두개인들에게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두 죽은 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기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죽음이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몸은 죽는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몸의 죽음을 죽음으로 보는 세상 시각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막연하게 나중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았다’는 의미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좀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삶에 붙들려서 흔들리기보다는 좀 더 굳건한 삶의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이 시형제결혼법을 내세워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고자한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생각하자면 자기 증명, 자기 과시를 위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보낸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질문으로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두개인들이 질문을 합니다. 만약 사두개인들의 질문이 성공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답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면 바리새인과 헤롯당, 그리고 모든 지도자들에 비해 사두개인의 위상이 높아질 것입니다.

 

 

‘너희가 이기지 못한 예수를 우리가 이겼다’며 자신을 과시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세상을 사는 방식이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과시하는 것이 곧 자신이 사는 것으로 여겼고 반대로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죽는 것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자가 살았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초라한 몰골로 존재한다고 해도 하나님에게는 산자입니다. 죽는다 할지라도 죽은 것이 아니라 산 자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죽음조차도 불행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우리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두개인과 같은 시각에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부활을 믿는다고 해도 세상의 것으로 나의 살아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부활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다는 것은 이미 부활의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세계를 깨달은 신자는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세상이 자신을 과시하고 보여주기 위해 열망하는 모든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게 됩니다. ‘살았다’는 의미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시로 세상 기준과 틀에 매이고 길들여지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를 깨우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산자의 세계에 눈을 뜨고 살아가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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