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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30 09:55

(103강) 과부의 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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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1:1-4http://onlycross.net/videos/nuk/nuk-21010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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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설교>


◉ 유대의 암흑기 ◉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는 말라기입니다. 말라기 이후 400동안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보내지 않습니다. 이 기간을 ‘암흑기’또는 ‘침묵기’라고 부릅니다. 선지자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전파가 중지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말씀 전파가 중지된 유다의 신앙 형편은 어땠을까요? 400년간 말씀 전파가 중지되었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다는 의미가 되는데, 말씀이 중지된 400년의 세월 동안 이스라엘의 신앙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말씀이 400년 동안 중지되었다면 이스라엘의 신앙 형편이 예전보다 더 크게 나빠졌을 것이라고 짐작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신앙이 선지자가 활동할 시기보다 더 나빠질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가 활동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을 때에도 이스라엘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말씀이 아예 없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가 활동 했을 때나 활동하지 않았을 때의 신앙 형편이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이유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말씀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철저하게 성전 중심이었습니다. 때문에 제사장 체제로 흘러갔고, 율법이 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새로운 말씀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전 제사와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 신앙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는 말씀이 있으나 없으나 동일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지자의 활동 없이 성전과 율법 중심의 신앙이 400년 동안 지속 되었다면 그들의 신앙이 무엇에 깊이 뿌리박히게 되었을까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이해하고 알아가며 말씀이 삶의 내용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의 제사와 율법 지키는 것을 신앙의 전부로 여긴 형식만 남아 있는 것이 유대교 신앙의 전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대교와 지금의 기독교를 빗대어 본다면 어떨까요? 다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현대교회가 비록 ‘성경 중심’을 외치지만 현대 교회가 이해하는 성경은 유대교가 붙들고 있었던 율법의 수준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교가 성전 중심이었다면 지금의 기독교는 교회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마다 성경중심, 하나님 중심을 강조하는 것은 자기 교회가 성경만을 추구하는 참된 교회임을 보여주기 위한 방편일 뿐 실제로는 가시적인 교회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진심으로 성경 중심으로 나아간다면 현세가 아닌 내세에 집중하게 됩니다. 성경은 현세적이 아니라 내세적이며 내세를 소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 안에 있는 신자라면 가시적인 모든 것은 자신이 붙잡아야 할 것이 아니라 내려놓아야 할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여기에는 권위, 권력, 위신, 체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린 것처럼 자기를 가리고, 포장하고, 과시하는 것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 헌금 이야기의 배경 ◉

 

본문의 과부 헌금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을 배경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표면적으로는 헌금에 대한 문제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권위와 권력, 위신, 체면을 중시하는 자들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이야기를 헌금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는 말씀을 강조하며 가난하다고 해도 헌금에 열심을 내는 것을 주께서 기뻐하신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말씀이 없었던 유대의 암흑기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말씀이 있다 한들 말씀의 본래의 의도는 사라지고 인간의 뜻과 탐욕이 담긴 내용으로 가르쳐진다면 말씀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눅 20장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이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시고 가르치시는 예수님에게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묻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성전과 율법 중심의 유대 사회에서 성전에서 제사를 주관하고, 율법을 연구하며 가르치고, 율법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을 하는 이들은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해야 하는 일을 예수님이 하고 계신 것을 묵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사실상의 대답은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눅 20:44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도 그리스도를 주로 칭하였다면 그리스도의 권위는 세상 모든 권위 위에 있음을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된 권위자로 오셨다면 세상의 모든 권위는 예수님께 굴복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시인한다면 그 어떤 권위도 교회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만약 교회에 인간이 권위자로 존재한다면 예수님의 권위 앞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자기 권위를 내세우며 권위에 합당한 대접을 받고자 하는 사람으로 가득한 것이 지금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순전한 마음으로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보다 자기체면 자기위신을 중시하는 인간의 모임으로 전락되어 있기 때문에 신앙의 모든 행위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나타내거나 가리기 위한 수단과 방편으로 행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현실을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빗대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신앙과 종교 행위 ◉

 

눅 20장 마지막에 보면 서기관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입니다. 율법은 약자인 과부를 보호하도록 되어 있지만 율법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오히려 율법이 금지하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며 문안 받기를 좋아하고 길게 기도했습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악을 행하면서도 자신의 악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채 길게 기도하는 것으로 백성에게 자신을 훌륭한 신앙인으로 나타내는 것에만 관심을 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을 행하면서도 경건한 종교 행위 안에 자신을 숨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서기관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기독교 역시 종교 행위를 자신을 가리고 나타낼 옷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린 것처럼 종교 행위로 자신을 가리고 신앙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 종교적 위선으로 가득한 것이 지금의 기독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서기관은 길게 기도하는 종교 행위 안에 자신을 감추었습니다. 기도라는 경건한 종교 행위를 옷 입자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악한 행위는 숨겨지고 대신 길게 기도하는 경건한 신앙인으로 보이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을 감추는 종교 행위 중의 또 하나가 헌금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헌금함 앞에서 부자들이 헌금하는 것과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누군가가 보는 앞에서 헌금을 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헌금 액수가 많다면 당당할 수 있지만 액수가 적다면 사람을 의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내키지는 않지만 헌금 액수를 올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제사장들이 헌금함 앞에서 헌금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헌금 액수가 제사장들에게 모두 공개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자들이 어떻게 헌금했을까요? 자신이 부자인 것을 제사장들이 아는데 적은 액수를 헌금한다면 자기 위신과 체면이 구겨지는 일이 됩니다. 결국 많은 액수를 헌금하는 것으로 위신과 체면을 세움과 동시에 신앙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헌금을 대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은석교회는 헌금에 대해서는 부담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헌금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고, 여느 교회처럼 주보에 헌금자 명단도 공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헌금이 무기명이기 때문에 누가 헌금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 얼마를 헌금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이러한 편안함을 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헌금의 자유 안에 자신을 감추고자 하는 것이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과부의 헌금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 부자의 헌금과 과부의 헌금 ◉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렙돈은 그리스의 최소 동전 단위로서 한 데나리온의 백분의 일에 해당되는 액수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액수님을 감안한다면 과부는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헌금한 것이 됩니다. 부자의 헌금에 비해 부끄러운 액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 헌금한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적은 액수의 헌금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부자의 헌금과 과부의 헌금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헌금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으로 본다면 누구의 헌금을 더 반기겠습니까? 과부의 헌금보다는 부자의 헌금일 것입니다. 과부 백 사람의 헌금보다 부자 한 사람의 헌금을 더 반기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선입견이 있는 상태에서 헌금을 한다면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헌금으로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키지 않아도 자기 체면과 위신을 위해서, 또는 신앙의 수준이 높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헌금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한국교회가 그토록 강조하는 십일조는 믿음이 있다는 하나의 증거로 행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부는 두 렙돈이라는 액수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헌금으로 자신을 보여주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아예 성전에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두 렙돈을 헌금하고 무시를 받을 바에야 차라리 아예 성전을 가지 않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는 신앙을 양적인 것으로 판단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기도도 길게 하는 것을 열심 있는 신앙으로 간주하고, 성경을 읽는 것도 많이 읽는 것을 신앙으로 간주합니다. 헌금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위신과 체면을 위해 서로 경쟁하듯이 양적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헌금의 액수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헌금 액수를 중요시 합니다. 수입에 비해 헌금이 적다고 하면서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다고 하는 과부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헌금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고 장차 천국에서 모두 보상을 받게 된다고 하면서 참된 헌금의 의미를 가려 버립니다. 교인들도 이러한 말에 동조하여 헌금이라는 행위에 자신을 숨깁니다. 헌금이라는 행위가 자신을 가리는 옷이 되어서 죄 가운데 있는 부끄러움을 잊은 채 신앙 있는 것으로 착각한 채 종교의 길로만 가게 되는 것입니다.

 

◉ 생활비 전부를 넣은 헌금 ◉

 

예수님은 과부의 헌금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은 것으로 말씀합니다. 이것은 생활비 전부를 넣을 정도로 헌금에 힘쓸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과부의 헌금이 생활비 전부를 넣은 것이라면 과부는 자신이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에 대한 관심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생명의 문제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부의 헌금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관심의 중심에는 항상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헌금을 하면서도 내 형편과 나의 문제를 생각합니다. 그런 우리가 나의 생존 문제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하늘의 생명에만 모든 관심을 두는 마음으로 헌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헌금을 하면서도 하나님은 이런 나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인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은 나를 보게 하는 중요한 기회가 됩니다. 헌금만이 아니라 인간이 경건한 신앙 행위로 간주하는 모든 것이 동일합니다. 이러한 신자는 신앙 행위를 자기 위신과 체면을 세우는 방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신앙 행위 안에 숨고, 신앙 행위를 옷으로 삼아서 자신을 감추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행위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확인할 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존재합니다. 모든 인간 역시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세우신 뜻에 따라 존재합니다. 즉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신자이고, 알지 못한 자는 불신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몸의 존재 이유를 아는 신자라면 하나님을 위한 몸으로 사는 일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자신의 위신과 체면이 세워지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존재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종교 행위에서 자기 위신과 체면을 지키려고 하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은 풍족한 중에 넣은 헌금이지만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시각, 즉 천국의 시각입니다. 우리와는 다른 시각과 기준으로 우리를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하자면 천국은 외적인 것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존재하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입은 무화과나무 잎 대신에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은 부끄러움을 감추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를 보게 하기 위한 용도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서 입혀진 것이 가죽옷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치가 예수님으로 인해 가려졌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다른 무엇으로 자신을 가리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나의 수치를 가려주신 그리스도의 의로움만 의지할 뿐입니다. 그래서 자기 위신과 체면을 세우기 위한 그 어떤 행함도 의미가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자기 위신을 세우고 체면을 지킨다고 해도 천국은 내 마음에 품고 있는 그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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