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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6 09:53

(104강) 무너질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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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1:5-9http://onlycross.net/videos/nuk/nuk-210509.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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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7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8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9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설교>

 

◉ 신앙의 방향 ◉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신앙을 자기 구원과 연결하여 이해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구원이 천국의 문제로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이 채워지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구원의 능력이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힘으로 역사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참된 의미는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고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신앙의 대상인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때문에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어떤 분이든 관심 없이 나의 필요를 채워주고 천국가게 해주는 분으로 만족하고자 한다면 그 신앙의 방향은 잘못되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방향과 목적을 구원에 두게 되면 구원 이후의 삶이 모호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목적인 구원이 달성됨으로써 구원 이후의 삶의 목적은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게 되면 자기 구원과 상관없이 나를 사망에서 건져 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신앙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의 방향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엡 5:18절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사람을 술 취한 자와 성령 충만한 자로 나누어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술 취한 자는 모든 것을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동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도 하나님도 자신을 위해 동원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자신에게 취해 있는 것이고, 이것을 술 취한 것으로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 한 자는 자신에게 취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성령은 우리의 온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눈이 열린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삶에서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에 열심을 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성령으로 사는 신앙은 나를 향한 관심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십자가를 말하고 예수님을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고 해도 관심의 방향이 자신에게로 향해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높임 받는 것보다 자신이 높임 받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그 즐거움을 위해 신앙을 이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구하는 사람은 항상 눈에 보이는 증거를 찾게 되고 감각적인 것을 신앙의 경험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 또한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화려하고 크고 좋을수록 하나님께 더 크게 영광이 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신앙도 이러한 시각과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외적인 실천이 많으면 ‘신앙이 좋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 무너질 아름다움 ◉

 

유대인들이 성전을 바라보는 시각도 이와 같습니다. 5절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왜 성전을 가리키며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본문 앞에 등장하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와 연결해 보면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성전은 헤롯 대왕이 건축하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기원전 20년에 성전 건축을 착수했는데, 그 당시에는 바사 왕 고레스에 의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된 유대 백성들이 돌아와 건축한 성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바사의 식민지 아래 있었고 물질적으로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너진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초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성전을 헤롯 대왕이 유다 백성에 대한 유화 정채의 일환으로 건축을 해주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증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롯 대왕이 건축한 성전은 이스라엘로서는 세 번째 성전이 되는데 기원전 20년에 착공한 성전은 외형이 9년 만에 완성되었으며 세부공사는 A.D 63년경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건축 공사가 근 80년이 넘게 걸렸다는 것을 보면 헤롯 성전이 얼마나 크고 웅장하게 지어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전은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며졌습니다. 아름다운 돌이라면 분명 값 비싼 돌이었을 것이고, 헌물 역시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성전 내부를 장식하는 장식품이나 여러 기구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을 건축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재정입니다. 그리고 그 재정을 부담할 수 있는 사람은 부자들이고, 헌물 역시 가난한 과부가 아닌 부자들이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넣은 것으로 평가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성전을 보세요. 성전이 이렇게 아름다운 돌로 지어지고 귀한 헌물로 장식되려면 과부의 헌금보다는 부자의 헌금이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의미의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지금 예배당을 건축하고 있고 교육관, 주차장도 필요하고 파이프 오르간, 의자, 음향시설 등등 많은 헌물들이 있어야 하는데 이 모든 일들이 돈이 많으신 부자들의 헌금없이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가난한 교인들의 헌금만으로 되겠습니까?’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신앙의 정체이며 중심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때문에 성전이 초라한 것보다는 크고 웅장한 것이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크고 웅장한 성전이 곧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에 의해서 부자의 헌금은 대접을 받고 과부의 헌금은 소외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6절)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역사 속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A.D 63년경에 완성된 성전이 70년에 로마군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에 있던 금들이 화재로 인해 녹아 돌 사이에 스며들었는데 로마 군인들이 이 금을 찾기 위해서 모든 돌을 다 헤쳐 버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았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전이 예수님 말씀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졌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으로 여겼던 성전 또한 결국 무너지고 말 무력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정말 참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시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자의 헌금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교한다면 누구의 헌금을 더 많이 넣었다고 하겠습니까? 당연히 부자의 헌금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가치관에 지배당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비록 예수님이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부자의 헌금으로 기울어 있을 것입니다. 과부의 헌금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부자의 헌금으로는 뜻하는 많은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보다 많은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기쁨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에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일을 많이 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과부의 헌금보다 부자의 헌금을 더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종말을 염두에 두지 않는 자의 헛된 욕망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웅장한 성전이 건축되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되는 것일까요? 초라한 성전에서 제사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것이 될까요? 성전이 아름다운 돌로 건축되고 수많은 진귀한 헌물들로 내부를 화려하게 장식한다고 해도 결국 무너질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진리도 아니고 빛도 아니며 생명도 아닌 것입니다.

 

 

요 1:1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만물은 말씀으로 지은바 되었고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고 증거합니다.

 

 

말씀이 곧 생명이며 우리를 어둠에서 구출하여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빛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가치 기준은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말씀을 세상의 가치관으로 조작하여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 때와 징조 ◉

 

그들은 다시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종말의 시작으로 인식 한 것 같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멸망할 때 성전도 함께 무너졌고 그 사실을 예레미야 선지자가 선포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서 유다의 종말을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때와 징조에 대해 묻는 것일까요? 종말의 때와 징조를 안다면 종말을 피해 자기 몸을 안전히 지킬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때와 징조를 묻는 것은 이들이 자기 구원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신앙의 목적과 방향은 자기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의 구원보다 앞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구원에 목적을 둔 신앙이라면 보이는 것에 마음이 끌릴 수밖에 없습니다. 뭔가 징조라고 생각되는 것이 보일 때 그것에 마음을 뺏기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여기저기서 치유집회라는 것을 하면서 자신들의 집회에 병이 낫는 기적이 있음을 선전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성령이 역사하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성령을 말하지만 아무런 현상이 없는 것보다는 보이는 증거가 있는 것을 더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미혹을 받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왜 미혹을 받게 되는 것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의 방향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구원으로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만한 증거가 있는 곳을 선호하게 되고, 그것을 보여주는 곳으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미혹을 받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에 신앙의 목적을 두게 되면 보이는 것에 미혹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증거 된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하고 높이는 것인데, 그것은 신자가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병 고침 받는다거나 예배당을 건축하는 등의 인간의 업적이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 진리의 세계 안에서 ◉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8절)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메시아라 하며 종말의 때가 가까이 왔다는 말로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이단의 교주들도 자신을 신격화하여 자신이 메시아이고 하나님이 보낸 참된 목자임을 강조하면 자신을 따르게 합니다. 이들에 미혹된 자들도 역시 신앙의 목적을 자기 구원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에게로 가면 구원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미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부자의 헌금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영광이 됩니다. 이 의미를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크고 많고 높아지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아지고 비워지며 쇠하여지는 것으로 드러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보이는 것에 미혹되지 않고 말씀이 생명이며 진리라는 사실을 믿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길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육의 시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신앙도 육의 시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아직 진리의 세계에 눈을 뜨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진리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면 인간의 한계라고 할 수 있는 육의 시각, 육의 틀이 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종말도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구원에 집착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세계에 눈 뜬 신자는 무엇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은 단 한순간도 하나님의 은혜를 벗어난 산 적이 없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보이는 것이 아무리 크고, 많고, 높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신비한 현상들이라고 해도 나 같은 자를 붙들어 진리의 세계로 끌어가시고 그 세계에 눈뜨게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기에 흔들리지도 미혹되지도 않습니다. 진리에 눈 뜬 신자에게 보이는 것들은 모두 무너지고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업적을 이룬다고 해도 그것을 뭘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모든 사람들보다 많이 넣은 것으로 보시는 분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우리가 아무리 많은 업적을 이룬들 그것을 선한 것으로 받아주실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러분이 보고 있는 모든 것은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너지게 되어 있는 것을 진리가 있고 구원이 있는 것으로 여기며 좇는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진리의 세계로 들어와 있습니다. 이 세계는 낮아짐과 비워짐의 세계입니다. 이것을 육의 틀에 갇힌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을까요? 오직 말씀의 눈으로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진리를 진리로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리고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하며 참된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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