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4.04.13 09:33

(105강) 끝과 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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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1:10-19http://onlycross.net/videos/nuk/nuk-21101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0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1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12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설교>

◉ 종말과 신앙 ◉

 

현대 교회의 설교를 보면 복과 윤리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의미를 복을 받고 편히 사는 현실적인 삶에 두거나 윤리적인 삶을 실천하여 좀 더 지성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종말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하나님은 지금의 세상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며 끝나는 때가 있음을 말씀하셨고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그 때가 바로 세상의 마지막임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세상의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집중되는 것이 옳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의미와 목적을 복에 두고 있지만 종말이 실제 현실로 다가오게 되면 복으로 여겼던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윤리적인 삶의 실천 또한 종말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말과 함께 완성될 영원한 생명의 나라는 세상의 복이나 윤리와는 절대로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생명의 나라는 윤리적 실천과는 무관하며 다만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만 들어감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능력이며 의로움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신자가 진심으로 십자가의 믿음으로 존재한다면 세상의 복이나 윤리적인 실천에는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가 복과 윤리의 틀 안에서 행해지고 있다면 그것은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종말보다는 지금의 현실에 더 집중한 채 살고 있습니다. 종말과 함께 완성의 세계로 다가올 생명의 나라보다는 지금 내가 부딪히며 살아가는 세상을 현실로 실감하며 세상에서의 나의 존재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으로 가득한 것 같지만 실상은 자기에게 몰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의 관심이 현실로만 집중된다면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사건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도 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징조가 나타난다고 해도 이미 징조에 대해 둔한 상태이기 때문에 징조를 보면서도 종말에 대한 관심으로부터는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과부의 헌금은 미래를 대비하는 보편적인 삶을 포기하고 오늘을 종말로 바라보는 신앙일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부의 헌금을 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미래를 대비하며 내일 일을 염두에 두고 염려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대비하고 자신이 원하는 미래의 삶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종말을 자기 인생의 가장 마지막 순서로 밀쳐놓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들로 가득합니다. 남들보다 좀 더 멋있는 인생을 누리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열망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열망이 성취되는 일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이고, 언젠가는 인생의 끝에 도달할 것인데 그때 하나님의 환영을 받으며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세상은 결코 무너지는 곳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상이 무너질 곳으로 보이십니까?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성전을 무너질 곳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이들 눈에는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며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성전으로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질 성전으로 보였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미래를 세상을 바라보며 설계합니다. 세상에 어울리고 걸 맞는 삶을 향한 열망을 속에 품고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 속에 과연 종말, 세상의 마지막 때가 기억되고 있을까요? 오로지 현실의 삶이 자기 소원대로 이뤄지기를 원하는 헛된 희망으로만 가득할 뿐입니다.

 

 

 이들이 신앙이라는 것을 통해 얻고 싶은 것도 그의 나라, 그의 의가 아니라 자기 희망사항이 조금이라도 이뤄지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희망이 현실화 되지 않고 헛된 꿈으로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희망의 현실화를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믿음을 붙들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 종말을 품은 세상에서의 삶 ◉

 

10,11절을 보면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며진 성전을 바라보면서 메시아를 기다렸고, 메시아가 옴으로써 이뤄질 그들만의 세상을 꿈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그들이 중심이 된 영광의 세상이 세워질 것이고, 그 세상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고 계속될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신앙의 내용이고 의미며 목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희망으로 삼았던 그들의 미래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전쟁, 큰 지진, 기근, 전염병과 무서운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원하는 세상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을 말씀합니다. 오히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12절)라는 말씀으로 그들이 가야 할 신앙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신앙으로 어떤 유익을 얻고 싶습니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신앙이 여러분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여러분의 소원이 아주 일부분이라도 성취되기를 원합니까? 우리는 결코 나 자신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포기하기는커녕 단 한순간도 나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앙도 내가 원하는 유익으로 다가와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에 그리스도의 고난은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는 고난의 길로 가고 계십니다. 그 내용을 듣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은 우리의 신앙에서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고난 주일이나 예수님에 대한 영화 같은 것으로 잠시 감상적인 고난에 빠져드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신앙은 가짜입니다. 헌금을 하고 무엇을 해도 진짜처럼 모방하려는 가짜일 뿐입니다.

 

 

사 46:10절을 보면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시초’란 세상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시초부터 종말을 알렸다면 세상의 시작, 즉 세상의 창조에 이미 종말이 담겨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 종말이 드러난 것이 선악과 사건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것으로 세상의 종말을 알리신 것입니다. 즉 세상은 이미 종말을 품고 시작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종말을 보지 못한다면 세상을 제대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종말을 보게 되면 신앙은 종말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종말을 배경으로 바라보고 이해하게 됩니다. 이처럼 종말을 배경으로 한다면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헛되고 부질없는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내가 꿈꾸는 미래의 삶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은 가짜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삶은 우리의 선택이 아닙니다. 누구도 삶을 자신이 선택하여 살 수 없습니다. 병원이 가면 많은 환자가 있습니다. 가벼운 병에 걸린 환자가 있는 반면에 중한 병에 걸려서 고통을 겪는 환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병의 경중과 상관없이 누구도 스스로 병을 선택한 사람은 없습니다. 병이 찾아왔을 뿐이고 병에 이끌려 병원에 누워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인생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누군가의 선택에 의해 이끌려 간다는 것입니다. 이 선택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16,17절을 보시면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부모와 친척과 벗으로 인해 박해자에게로 넘김 받고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하는 삶을 누가 원하겠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미움 받는 신앙을 누가 원하겠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잘한다’고 인정받고 칭찬 받는 것입니다. 내 이름이 높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미움 받고 죽임을 받는 것을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너희’에 해당된 사람들이 가야 할 삶의 길로 말씀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종교와는 다른 신앙 ◉

 

예수님께서 말씀한 징조가 세상 역사에 나타나지 않았던 적이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역사는 끝을 보여주는 징조로 가득합니다. 그런데도 징조를 징조로 보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끝을 보지 못한 채 자신의 꿈만 생각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시고,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것을 원하게 하는 삶의 노선으로 바꿔 놓기 위해 일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서 신자가 두려워 할 것은 사실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늘 염려와 두려움에 붙들려 있는 것은 자신의 꿈이 실현되지 못하고 무너지며 전혀 원하지 않은 삶에 부딪힐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신앙에 대해 실망하지 않습니까? 신앙에서 여러분이 기대한 유익을 못한 것으로 인해 실망한 것은 없습니까? 실망하셨다면 그것은 신앙을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바라보는 신앙이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래도 실망했을까요?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는 신앙이었다면 어떤 삶의 현실에 있다 해도 실망하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불교, 힌두교 등이 있으며 무속신앙도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자기를 위한 종교라는 것입니다. 신은 달라도 추구하는 것은 같습니다. 자기를 위한 자기 사랑이 바탕이 되어 신을 찾는 것입니다. 인간의 종교성에 의해 만들어 지고 시작된 종교이기 때문에 그 본질은 모두 같은 모습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진심으로 기존의 종교와는 다른 참된 종교임을 주장한다면 공통적인 종교의 길과는 다른 길에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끝을 보면서 그 끝에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길로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길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에 크게 감동이 되고 붙들려서 그리스도로 인해서라면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도 거부하지 않는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두려움이 없이 인내하며 생명의 그 나라만을 소망하는 것이 참된 기독교의 신앙이며 우리가 이끌림 받아야 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어떤 약속을 마음에 담고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생명이라는 것은 부인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생명의 약속 외에 또 다른 약속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견줄만한 가치 있는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약속이 있을리 만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자라면 그 안에는 오직 생명의 약속만이 굳건하게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내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여러분 자신을 거룩한 존재로 가꾸어 가기 위한 길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을 향한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거룩한 존재이고 이루어야 할 소원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충만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참된 현실이 된다면 ‘다 이루었다’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의 이루심을 즐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에는 성공과 실패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해서 신앙의 성공을 이루고, 그 성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칭찬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루심이 우리의 의가 되고 상급이 되고 면류관이 되는 완성과 충만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실망하고 때로는 자신이 한 일로 보람을 누리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는 것이야 말로 세상의 끝과 징조를 보지 못한 자의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본문의 예수님 말씀에 신앙생활의 재미와 즐거움이 담겨 있습니까?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내용일 뿐입니다. 우리의 꿈과 희망과는 무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의 내용을 바꾸어야 합니까, 아니면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까? 당연히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 작업을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생각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향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향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입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말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성령의 역사를 감지하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실감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에 모든 삶에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 받은 신자의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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