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6.09 16:08

(56강) 사도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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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설교>

신자가 신앙에 대해 얘기할 때는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이 아닌 복음을 전한 사도의 신앙이 기준 되어야 합니다. 즉 자기의 신앙이 아니라 사도의 신앙을 토대로 얘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의 신앙이 우리가 배워야 할 참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에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고 있는 우리는 사도 바울의 신앙을 알아감으로써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이 사도 바울의 신앙과 동일한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바울이 2:1-2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증거, 즉 복음을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름다운 지혜의 말 자체가 복음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 방법은 분명 언어, 말이었습니다. 바울이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인이 아닌데 말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말 자체로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머리에 담긴 지식을 그럴듯한 말로 풀어내는 것을 복음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감동시킬만한 아름다운 지혜의 말이라 해도 그것을 두고 복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에 대한 바울의 시각이고 자세입니다.

 

 

만약 말이 곧 복음이 된다면 사도와 동일한 말을 하거나 그 말을 머리에 담아두고 있는 것만으로 복음을 아는 것이 되고 천국에 들어가는 능력이 된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도가 전한 복음을 알고 말한다는 것으로‘나는 복음을 안다’라고 스스로를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대다수 기독교인의 어설픈 생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8장에서 네 지식으로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한다는 중대한 경고의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를 알고 십자가를 아는 지식이 믿음이 약한 자를 멸망하게 하는 사태로 발생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2)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은 말이나 지식이 아니라 자유로 드러났습니다. 즉 자유가 신앙이 특징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것은‘나는 자유자인가?’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에게서 드러난 신앙의 특징이 행함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은 우리가 신앙의 본질을 무엇으로 삼아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답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13)는 말처럼 바울은 복음의 유익을 위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지식에 매이지 않은 바울의 자유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이런 자유는 우상 제물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율법에 매인 것처럼 보여질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람을 따르고자 하는 사도답지 못한 연약함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내가 자유인이 아니란 말입니까?’라는 말로 자신에 대해 말합니다.

 

 

1절에서 바울은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자유자인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과연 사도인가?’의 문제로도 의심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부활의 주를 목격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게바 파가 있었고 게바, 즉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그 점에서 바울은 게바 파의 사람들로부터 베드로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부활하신 예수를 보지도 못했으면서 사도라 할 수 있느냐?’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내가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는 말로 반박과 함께 자신을 변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자기변호는 자신의 사도직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아는 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전하고자 하는 의도에 있습니다. 자기변호가 아니라 복음 증거입니다.

 

 

사실 바울이 사도성에 대해 의심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주된 이유는 바울이 예수님의 공생에 때 부름 받은 제자가 아닐뿐더러 예수를 믿는 자를 핍박했던 과거 전적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를 12사도라고 말하는데 여기에 바울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즉 바울은 12사도가 아니란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했던 가룟 유다의 자리는 나중에 맛디아로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보면 사도로서의 바울의 권위는 12사도에 비해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 소지도 충분합니다.

 

 

물론 지금의 우리에게 최고의 사도로 인정되는 사람은 바울입니다. 성경에서 드러난 업적을 봐도 12사도 중 누구도 바울을 추월할 수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13권 정도가 바울의 서신입니다. 또한 바울이 기록한 서신들 하나하나는 기독교 신학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만으로도 기독교에 끼친 바울의 영향이 참으로 크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활동하는 당시에는 바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3년을 동행했던 제자들이 있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경험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의 전적을 생각해 보면 자신을 사도라 말할 염치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사도직에 대해 의심과 도전을 받았다는 것은 그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도전과 비판 속에서 자기 성찰을 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자신의 과거의 잘못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회개하는 것이 복음을 아는 사도다운 것이 아닐까요? 어떻게 보면 자신을 자유인이라 하고 사도라고 당당히 말하는 것이 마치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은 스스로를 죄인의 괴수로 여기는 것에서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여러 모로 사도로서 정당하지 못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의심하고 도전하는 것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이것을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의해 사도된 바울을 의심하고 도전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시각은 목사에게 도전하는 것을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믿게 된 너희는 나를 사도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미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비난하는 것을 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내막을 알지 못합니다.‘사도라면 이래야 하지 않는가?’라는 그들의 기준과 시각이 그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사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의 조건과 무관하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주를 믿게 되는 것이고 구원을 받습니다. 사도의 말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인 것입니다.

 

 

롬 9:15-16절의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바울의 말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익히 아는 이 내용이 여러분에게 주는 자유는 무엇입니까? 구원은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라면,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믿음은 그 어떤 조건과 무관하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과거 행적이나, 고기를 먹고 먹지 않는 것이나, 독신으로 지내는 그 어떤 문제와 무관하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있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믿음과 구원에 사도 바울이 기여한 것은 없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부름 받아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자로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사도라는 증거는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그리스도를 믿게 된 고린도 교회인 것이지 사도의 조건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이 여러분의 믿음이라면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흔히 말하는 신자 됨도 자신의 조건이나 상태, 행위에서 찾지 마십시오. 당연히 목사 됨이라는 것도 말이나 성품에서 찾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말이나 성품과 같은 조건에서 신자 됨, 목사 됨을 찾고자 한다면 그러한 조건이 보이지 않는 목사에 대해서는 의심과 비난의 시각에서 보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향한 의심과 비판을 통해서 그들의 생각이 복음의 정신과 차이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단지 자신이 의심받고 비판 받는 것에 불편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복음의 정신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지적하며 복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자기변명이나 변호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바울의 자유로 인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자들을 가리켜서 자신이 사도임을 증명해주는 확실한 표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사도직에 대한 바울의 집착이나 미련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사도로서 대접 받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그들에게서 복음의 의미에서 벗어난 그들의 오류가 드러나기에 그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의 사도 됨을 외적 조건에서 찾고자 하고 그 조건이 미흡하거나 존재하지 않아서 의심하고 비판하는 것이라면 그들은 자신의 신자 됨의 표를 무엇에서 찾을까요? 당연히 외적 조건일 것입니다.‘사도라면 이래야 한다’라는 자신의 시각으로 사도 바울을 바라봤다면,‘신자라면 이래야 한다’는 시각으로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를 향한 의심과 비판은 불안과 염려로 바뀌어서 자기를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복음을 전함으로써 주를 믿게 되고 그로 인해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게 된 성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에게도 사도됨에 대한 잘못된 시각이 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몇 차례에 걸친 사도바울의 선교여행, 그리고 그로 인해 세워선 수많은 교회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사도 바울의 가치와 업적으로 담아두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인간에 의해 되어지고 인간으로 말미암는다는 비복음적인 정신의 인간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는 우리의 실상입니다. 무엇을 말하는가와 무관하게 우리는 비복음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만 복음을 안다는 것을 빙자해서 복음적인 사람인척 행세했을 뿐입니다.

 

 

바울은‘내가 우리 주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까?’라고 되묻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사도의 자격이 되는 것일까요? 부활하신 주의 음성을 듣거나 만났기에 사도가 된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말은‘나는 부활하신 주를 만나고 음성을 들었다’는 자기 경험이 전부일 것입니다.

 

 

고후 15:5-8절에서 바울은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처럼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많습니다. 열두 제자에게만 아니라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이 사도가 된 것은 아닙니다. 또한 부활을 목격했다는 사실이 신자 됨의 조건인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 역시 부활의 주를 봤지만 그것이 사도 됨의 표가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사도 됨의 표는 그리스도를 믿게 된 거룩한 성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일에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됨의 표는 사도의 자율적 활동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도를 세워 일하시는 그리스도의 활동으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가 활동하시는 표가 주를 믿게 된 성도임을 생각한다면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자 됨의 표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께서 일하신다는 증거인 믿음입니다. 하지만‘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자기 생각 하나로 신자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바울 신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자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에만 마음을 두는 것이 바울과 같은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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