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4.05.25 10:21

(110강) 섬김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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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2:24-30http://onlycross.net/videos/nuk/nuk-22243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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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4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설교>

 

◉ 반복되는 다툼 ◉

 

 

인간에게 높고 낮음은 무슨 의미일까요?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무엇이기에 높아짐에 그토록 집착을 한 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나는 높아지는 것에 관심 두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 대한 관대함일 수 있고 자신의 현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높아짐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는 최후의 만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또 다시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다툼이 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겪으실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면 제자들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이 처할 십자가의 상황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미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변론을 한 것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 9:48)는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같은 문제로 다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제자들에게서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면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면 조금이라도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예수님의 가르침에 효력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데 지금 제자들에게서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도 무용지물인 것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예수님이 스승으로서 무능하기 때문일까요? 사실 우리는 예수님이 능력이 있다면 제자들을 가르쳐서 변화하게 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후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면 제자들이 세상이 남아 예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과연 제자들에게 말씀으로 사람을 변화하게 할 능력이 있을까요?

 

 

누구도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외적인 행동이나 인격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인간의 무능을 알고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는 인간이 되는 것은 변화가 아니라 새롭게 지음 받는 것이기 때문에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말씀을 듣고도 변화되지 않은 제자들의 실상은 오늘 우리의 현재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다툼이 반복되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눅 9장에서 제자들이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변론을 할 때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내세워서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전혀 알지 못합니까? 아니면 알고는 있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서 다투었고 예수님이 그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또한 제자들과 다를 바 없이 높아지고자 하는 세상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갑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안다 해도 그 말씀을 실천하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 제자들의 하나님 나라 ◉

 

 

제자들이 또 다시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다툰 것은 예수님이 앞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얘기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8절에서도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거듭 하나님 나라를 언급하시니 제자들은 자신들이 기대하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날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다시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가 관심사로 떠오른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 나라를 기대했고 그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예수님을 따르는 보상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마 제자들은 3년간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 자신들에게 우선권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메시아라고 생각되는 예수를 붙들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제자들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고 하나님 나라에 소속되는 것 또한 제자들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자신을 위한 자기 욕망이 포기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자기 공로를 인정해주고 그 보상으로 높은 자리를 보장해주는 하나님의 나라는 제자들의 착각이었을 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애당초 하나님의 말씀에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기 욕망에 어울리는 하나님 나라를 제멋대로 조작하여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러한 본성에 붙들린 인간이 예수를 믿을 수 있을까요? 스스로의 선택과 의지로 부활의 생명이신 예수님을 선택하고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 갈 수 있을까요? 다시금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는 그런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게 되면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5-26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큰 자는 임금이며 집권자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큰 자이고 권력이 없는 작은 자는 큰 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래서 큰 자를 은인으로 칭하기도 합니다. 힘 있는 집권자가 은혜를 베풀고 작은 자는 늘 그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러한 구조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은인으로 칭함 받을 수 있는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서로 공로 싸움을 한 것입니다.

 

 

◉ 섬기는 나라 ◉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다고 합니다. 세상의 속성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입니다. 젊은 자는 어린 사람을 뜻하기 때문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어른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하고 어른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젊은 자는 큰 자로 여김 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젊은 자, 즉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큰 자로 인정받고 섬기는 자가 다스리는 사람으로 인정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로 여김 받기 위해서는 젊은이의 자리로 내려가야 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젊은이의 자리로 내려가면 큰 자가 되게 해준다는 것이 아니라 젊은이의 자리, 즉 낮아지는 그 자리가 높은 자리이고 다스리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는 높아지기 위해서 뭔가를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 이후를 세상의 복과 연결하여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지고 힘을 얻는 것을 믿음 이후에 주어지는 것으로 기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믿음 이후의 세계를 그렇게 증거 한다고 생각합니까? 믿음 이후의 세계가 그런 것이라면 사도에게서부터 그 증거가 드러나야 합니다. 무엇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부름 받기 전보다 더 큰 힘을 가졌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자랑거리였던 것들이 믿음 이후에는 모두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자랑거리였던 것들이 왜 배설물로 여겨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랑거리였고 유익한 것으로 여겼던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해 해가 됨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서 나타난 믿음 이후의 세계입니다. 종교인이 생각하는 믿음 이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도 약속하신 바도 없는 것입니다.

 

 

27절을 보면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말합니다. 세상 기준에 의하면 당연히 앉아 먹는 자가 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제자들 가운데 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으로 인해 세워진 나라는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나라임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나라라는 것을 모르는 분이 있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것이 더 인격적이고 타인에게 존경 받을 행동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 나라가 섬김을 받는 나라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추구하고 좋아하는 것은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낮아지는 것보다 권력이 있는 높은 자리를 원합니다. 결국 우리도 제자들처럼 같은 문제로 늘 다투고 시비하며 살고 있습니다. 말씀을 알았다 해도 그 말씀을 실천하여 거룩한 삶을 만들어 낼 능력도 자질도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거룩한 삶을 만들어 낸다면 그 또한 자신의 권력으로 이용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목사가 자신의 거룩함을 보이려 하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나는 너희와는 다른 차원의 사람이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복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설교하는 것도 권력으로 이용합니다. 설교하는 것을 하나님의 사자라는 특별한 권세를 부여 받은 것으로 선전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 크냐’라는 다툼에 빠져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 왜 섬김인가 ◉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왜 굳이 섬김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도 하나님으로써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마땅한데 왜 꼭 섬기는 자의 길로 가셔야 하는 것일까요?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섬김을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세상과 하나님 나라는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힘이 곧 복으로 간주될 것이고 섬기는 것은 오히려 저주로 여겨질 것입니다. 부자는 믿음이 있는 자로 인정받고 가난한 자는 저주 받은 것으로 간주될 뿐이고 십자가는 구원용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을 받기 위해 필요하고, 구원 이후 믿음은 복을 받기 위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지금의 기독교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권력, 힘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권력을 주겠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교회 직분은 두말할 것 없습니다. 목사가 설교 하는 것은 목사가 하나님과 더 가깝다거나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아서가 아닙니다. 설교를 하는 것이 권위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리스도 안에서 권력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맡겨진 역할일 뿐입니다. 몸은 팔과 다리 등 각기 고유 역할을 하는 지체로 구성됩니다. 모두가 팔이고, 모두가 다리면 그것은 정상적인 몸이 아니라 괴물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직책을 가지고 있든 사로 한 몸의 지체로 만나는 것뿐입니다. 즉 목사와 신자의 관계는 한 몸의 지체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팔이 발을 다스릴 수 없는 것처럼 목사가 신자를 다스릴 수 없는 것입니다.

 

 

28-30절을 보면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고 말합니다.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다스린다는 것은 통치의 권위를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맡기신 하나님 나라에서의 통치의 권위는 섬김의 자리를 말합니다. 섬김이 곧 권위가 되는 나라를 제자들에게 맡기시고 예수님은 하늘로 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으시며 떡과 잔을 주시는 것도 제자들에게 맡기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보이시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떡과 잔, 즉 예수님의 몸과 피를 주시는 고난으로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몸과 잔을 받는 것은 받는 자 또한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로 가겠음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로 여김 받는 하나님 나라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본래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같은 하나님 나라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그것은 주께서 우리를 간섭하시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주의 간섭의 결과일 뿐이지 ‘우리가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야 믿음을 권위로 이용하지 않게 됩니다. 믿음 아래 있는 모든 신자가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권위 아래 있는 신자입니다.

  




  1.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2. (128강) 증인

  3. (127강) 부활의 예수님과 제자들

  4. (126강)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5. (125강) 부활과 여자들

  6. (124강) 예수님의 무덤

  7. (123강) 예수님의 죽음

  8. (122강) 두 행악자

  9. (121강) 네가 너를 구원하라

  10. (120강) 시몬과 우는 여인들

  11. (119강) 나와 빌라도

  12. (118강) 헤롯에게로

  13. (117강) 빌라도에게로

  14. (116강) 그리스도이거든

  15. (115강) 베드로의 통곡

  16. (114강) 이것까지 참으라

  17. (113강) 예수님의 기도

  18. (112강) 족하다

  19. (111강) 베드로의 각오

  20. (110강) 섬김의 나라

  21. (109강) 유월절과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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