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4.06.01 09:56

(111강) 베드로의 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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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2:31-34http://onlycross.net/videos/nuk/nuk-22313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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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설교>

 

◉ 믿음이란 ◉

 

 

어느 교회든 믿음을 강조하지 않은 교회는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믿음을 강조하기만 할 뿐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사 믿음에 대해 말한다고 해도 지극히 인간적 시각에서 해석된 믿음일 뿐 예수님이 가르치신 믿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로 인해서 비록 믿음이 강조되고 잘 믿으려고 힘을 쓴다 해도 결국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으로 붙들고 있는 결과만 양산될 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축은 믿음입니다. 성경이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지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믿음 외에 구원의 길은 없으니 믿음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인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바울은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2下)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바울은 마치 믿음보다 사랑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사랑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을 증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라 해도 그것을 참된 믿음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을 쉽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만약 누군가에게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을 참된 것으로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설사 그런 능력의 믿음이 있다 해도 그 능력 때문에 참된 믿음으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눈에는 참된 믿음으로 보이는 것을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하니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왜 이런 시각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요?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믿음에 대해 오해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을 놀라운 일을 행하는 힘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믿음을 그렇게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막무가내 식의 믿음이 좋은 믿음으로 인정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막 9장에 보면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가 예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말하자 예수님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한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귀신 들린 아버지의 문제를 자신감이 없는 것으로 말합니다. ‘하실 수 있거든’라는 말이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자신감이 없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자신감을 가질 것을 요구하시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즉 자기 확신을 믿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에 대한 착각일 뿐입니다. 근본적으로 자신감이나 자기 확신은 심리현상일 뿐입니다. 큰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가 불안과 긴장감을 떨치기 위해 ‘난 할 수 있다’라며 스스로 자기 마음과 감정을 절제하고 조절하는 심리현상과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 약한 자의 각오 ◉

 

 

본문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옥에도 갈 수 있고, 혹시 죽어야 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를 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 목숨 바쳐 충성할 것을 맹세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각오가 거짓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예수님을 위해 죽겠다는 각오를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쨌든 예수님을 향한 자기 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각오를 들으시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각오와 자기 확신대로 실천할 수 없을 것을 미리 아신 것입니다.

 

 

돈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작정하고 기회를 찾고 있던 가룟 유다에 비하면 베드로의 각오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감동적인 각오를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네가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하겠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각오하면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약함을 아셨습니다. 베드로의 약함은 곧 우리의 약함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신감을 가지고 각오하고 결심한다 해도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버릴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의 약함입니다.

 

 

인간이 약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인간의 실존 자체입니다. 그런데도 약함을 인정하기보다는 강하고 쓸모 있는 자로 존재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합니다. 자기 소원과 기대와 자기 자랑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에 매달려 살아갈 뿐이지 정작 자신의 생명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것입니다.

 

 

신자는 용서 받은 자로 세상에 남겨집니다. 용서 받았기에 쓸모 있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알기에 용서를 필요로 하고 용서하심에 감사하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부르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를 덮으시고 생명에 있게 하신 신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신자 됨을 오해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뭐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실패했지만 여러분은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나는 부인하지 않으리라는 각오, 자신감이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그 어떤 각오나 자신감도 바람에 날리는 낙엽보다 더 가볍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하면 된다’는 생각이야 말로 신앙에 있어서 이미 실패자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자기 의지와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자의 차별을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으로 그 차별성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강한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의도는 결국 자신이 강한 사람이 되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 되어서 큰 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강한 사람 되는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고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신자의 인생은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형통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앙의 인물 누구도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 때문에 세상이 부러워 할 만한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 인해서 고단함과 고통과 괴로움이 더한 인생을 살았을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우리의 각오와 자신감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각오와 자신감 속에서 일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여하시고 그 자신감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신감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쓸모없는 것일 뿐이며 오히려 믿음의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자신감을 내려놓게 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십니다’는 고백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 사탄의 요구와 예수님의 기도 ◉

 

 

31절에 보면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라고 말합니다. 밀을 까부른다는 것은 키를 가지고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내는 작업을 말합니다. 그러면 ‘까부른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가볍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할 정도로 가벼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가벼움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다투는 것으로 이미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음식을 먹으시는 자리에서 떡을 주시며 내 몸이라 하시고, 잔을 주시면서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곧 실제로 몸과 피를 내어 놓는 무거운 길을 가셔야만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자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다툰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가벼움입니다.

 

 

사탄조차도 제자들을 가벼운 존재로 여깁니다.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다투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보다도 타인을 다스리고 강요할 수 있는 힘 있는 자리에 더 마음을 두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이 사탄에게는 가벼운 존재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얘기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보다는 현실에 속해있는 내 문제에 더 마음을 쓰고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도 베드로처럼 나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예수는 부인해 버리는 가벼운 존재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처음의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는 바위 같은 존재가 아니라 약한 바람에도 이리저리 날리는 낙엽과 같은 가벼운 존재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을 나의 각오와 자신감과 자기 확신으로 따라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착각일 뿐입니다.

 

 

32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사탄에 의해서 얼마든지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그런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예수님이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힘일까요? 당연히 우리의 믿음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힘이고 도우심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사탄에 의해서 다스려질 수 있는 약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단단히 각오하고 자신감으로 무장되어 있다고 해도 사탄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를 무시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베드로의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는 사탄을 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보면 베드로는 자신의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는 사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가능성이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믿음은 전적으로 예수님께 달린 문제임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믿음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로 인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베드로의 믿음을 베드로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 책임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도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라는 자기 각오를 드러낸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각오를 했든 주어진 상황에서 오로지 자기 유익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합니다. 그러면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하게 하고 가까이 나아가게 한 사건은 무엇일까요? 두말 할 것 없이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자기 각오, 자기 자신감으로 예수님을 위해 죽겠다고 하는 그 때는 오히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에게 우리는 일 까부르듯 까부를 수 있는 가벼운 존재일 뿐입니다. 흔히 사탄은 기도하고 성경을 보는 신자를 가장 두려워한다고 하지만 그 역시 사탄을 알지 못하고 무시하는 인간이 조작한 착각일 뿐입니다.

 

 

◉ 구원과 그리스도 ◉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내게 유익이 되는 쪽으로만 향하는 가벼운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의 믿음을 예수님이 책임지고 계십니다. 이것을 안다면 ‘할 수 있다’는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 착각인가를 알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늘 근심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현실의 문제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죽겠습니다”라고 각오한다고 해서 그대로 실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정작 하나님은 그러한 실행이 있는 신자 됨을 원하지 않으시는데 우리 스스로가 그런 신자가 되겠노라고 설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해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면 베드로의 구원은 베드로의 행함이나 각오와는 무관하고 예수님의 기도에 의한 결과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으로 인해 이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돈을 받고 넘겨주기로 한 것은 그에게 사탄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들어감으로 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은 30보다 못한 가치로 보게 된 것입니다. 유다에게 필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는 메시아였지 십자가에 죽는 무능한 메시아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배후에도 사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보다 자기 안위를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사탄에 의해 조종되는 인간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사탄의 손에 내어주지 않으시고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십니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예수님으로만 가능하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현실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각오나 자신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 오히려 항상 실패하는 가벼운 모습으로만 돌출될 뿐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실패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각오나 자신감 따위는 불허합니다. 내 믿음이 좋다는 것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 받는 것만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1.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2. (128강) 증인

  3. (127강) 부활의 예수님과 제자들

  4. (126강)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5. (125강) 부활과 여자들

  6. (124강) 예수님의 무덤

  7. (123강) 예수님의 죽음

  8. (122강) 두 행악자

  9. (121강) 네가 너를 구원하라

  10. (120강) 시몬과 우는 여인들

  11. (119강) 나와 빌라도

  12. (118강) 헤롯에게로

  13. (117강) 빌라도에게로

  14. (116강) 그리스도이거든

  15. (115강) 베드로의 통곡

  16. (114강) 이것까지 참으라

  17. (113강) 예수님의 기도

  18. (112강) 족하다

  19. (111강) 베드로의 각오

  20. (110강) 섬김의 나라

  21. (109강) 유월절과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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