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4.06.08 10:13

(112강)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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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2:35-38http://onlycross.net/videos/nuk/nuk-22353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35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38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설교>

 

◉ 예수님이 떠나시면 ◉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앞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게 되면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부활하시겠지만 예전처럼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고 하늘로 가시게 됩니다.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제자들에게 함께 하신 예수님과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과의 이별을 감지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여전히 가르쳐야 하실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담겨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있습니다. 비록 메시아가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오해하고 있었다 해도 어쨌든 그들에게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였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든든했을 것이고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걱정 없이 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예수님이 제자들 곁을 떠난 후입니다. 의지의 대상인 예수님이 곁에 존재하지 않고 떠났다면 제자들은 불안감을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낙담하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며 섬긴 사건에서도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해 갑니다. 그들의 힘으로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로 인한 일이었기에 자연히 모세를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간 모세가 40일이 되어도 내려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안감을 느꼈고 모세 대신 자신들이 의지할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모세의 형 아론을 찾아가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출 32:1)

 

 

그들은 매우 절실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자신들을 이끌어 내고, 홍해가 가로 막은 상황에서 애굽 군대에 의해 몰살당할 위기도 해결한 모세가 그들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무지 그들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자였습니다. 때문에 모세의 부재는 곧 하나님의 부재와 다를 바 없었기에 모세를 대신할 존재로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좀 더 확실하게 보이는 방식으로 믿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자기 체험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체험한 것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확실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이라면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교회가 하나님도, 성령도 보여주기 위해 힘씁니다. 불확실한 것보다는 확실한 것을 좇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불확실함입니다. 모세가 없는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불안함을 느꼈던 것처럼 제자들 또한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현실이 되면 불안함을 느낄 것이 뻔합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불안함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 내 곁에 없는 분으로 여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소유와 무관한 복음 ◉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보일 때와 보이지 않을 때는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예수님이 눈에 보이고 자신들에게 함께 하고 계셨을 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모든 일을 예수님이 하시면 되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부족한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를 따르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는 자신들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에게 힘이 없음을 느끼며 낙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라고 물으시고 제자들은 “없었나이다 ”라고 답합니다.

 

 

눅 9장에 보면 열두 제자를 불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 보낼 때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0장에서는 따로 칠십 인을 세우시고 각 동네와 지역으로 둘씩 보내시면서 역시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 말씀대로 지팡이, 배낭, 전대, 양식, 신발 등 여행에 필요한 것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길을 떠나 각 마을을 다니며 복을 전하며 병을 고친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때 부족한 것이 있더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여 동행했던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서로 함께 다녔던 것이 아니라 각기 흩어져서 다녔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홀로 다니는 길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을 병을 고쳤고 그로 인해 헤롯이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제자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보냄 받았음에도 전혀 부족하지 않음을 경험했습니다. 전대와 배낭과 신발이 없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지장이 있다거나 부족함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없이 홀로 다닌다 해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9:1절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치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전대와 배낭과 신발이 없는 상태에서 여행을 한다면 부족함을 느꼈어야 합니다. 여행 기간이 며칠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루를 여행해도 필요한 것이 돈입니다. 그런데 돈도 가지지 않은 채 여행을 했는데도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 답하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들의 쓸 것을 마을의 어떤 분들이 자발적으로 공급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 또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매번 그런 식으로 도움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 보면 부족한 것이 없었다는 제자들의 말이 지극히 당연한 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제자들의 생존의 문제에는 불편했을 것입니다. 하루 종일 굶으면서 다닐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전파되는 차원에서 생각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는 지팡이나 배낭, 양식, 돈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없어도 복음은 능히 전파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족함이 없었다고 답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동행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는 데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자기 생존에 마음을 두었다면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말씀이 불평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배낭도, 돈도, 신발도, 두벌 옷도 없이 어떻게 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라고 불평하는 것이 자기 생존에 마음을 둔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수시로 그와 같은 불평을 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고 지금 살게 하신 것은 복음을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그냥 남들처럼 생존하고 살라는 것일까요? 신자라면 복음을 위해서 보냄 받았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 전파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까? 소유가 많아 부요하면 복음이 더 강하게 전파되고 소유가 적어 빈곤하면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복음은 우리의 소유 여부와 무관합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돈도 많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복음 전파를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참된 복음에서 벗어나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에만 마음을 둔다면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라고 물으셔도 제자들과 동일하게 “없었나이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복음, 구원, 생명, 이 문제만 생각해 보십시오.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분명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복음과 구원과 생명에는 그 어떤 문제도 부족함도 없습니다. 그런데 늘 이 문제는 벗어 버리고 육신과 연결된 생존에만 마음을 집중하기 때문에 부족하다는 한탄과 함께 불안과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 가진 것이 없어서 염려와 불안이 없고 오히려 족하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즉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그런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가진 것이 없으면 무시를 받게 되는 세상입니다. 가지지 않으면 생존이 힘들어지는 현실에 부딪히게 됩니다. 예수님이 떠나고 안 계신 세상은 제자들에게는 더욱 험악한 곳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 소유의 나라에서 ◉

 

 

36절에 보면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이미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는 세계를 알았다면 굳이 가지라고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이 가시고 난 뒤에 제자들이 부딪힐 세상은 전혀 다릅니다.

 

 

세상은 가진 자의 나라입니다. 가진 자의 나라에서 예수님께 보냄 받은 제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를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진 것이 없어서 부족함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세상은 가진 자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는 그리스도께로부터 보냄 받은 자로 존재합니다. 단지 보냄 받은 자로만 존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세상이 환영하지 않는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37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이루어져 감이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 53:12절의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는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본문 37절의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는 말과 사 53장의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다는 말이 같은 의미입니다. 범죄자로 여김 받고 죄인을 위해 피 흘려죽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범죄자를 위해 기도하였다면 그 기도의 효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범죄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 받으심으로 말씀을 이루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길은 자신의 죄를 아는 자로 주께 나오는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대 있는 자는 가지라고 하고 배낭도 그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대 없는 자는 가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전대가 있는데 왜 가지라고 합니까? 가지라는 것은 소유하라는 뜻입니다. 즉 네게 있는 전대를 너의 소유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는 이유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것이 제자들이 부딪힐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은 자기 소유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이 차별됩니다. 제자들이 이러한 세상에 홀로 놓여 있을 때, 그들 역시 소유를 위해 산다면 항상 부딪히고 경쟁하며 내 것을 더 많이 확보하는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아무것도 없이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게 되는 하나님나라로부터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 제자의 길 ◉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은 제자들이 경험할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소유의 세상에서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증거하며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가십니까? 아니면 세상에 눈을 맞추고 세상처럼 내게 있는 것을 나의 소유로 여기며 더 많은 소유를 위해 사는 것은 아닙니까? 이러한 삶에서는 불안과 염려가 떠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 여행을 떠나 복음을 전파했을 때, 비록 몸은 예수님과 헤어졌지만 예수님을 자기 곁에 계시지 않은 분으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아는 그 곳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혼자라는 생각 없이 무든 일에 부족함이 없이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셨지만 영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누구도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눈을 뜨는 신자가 족함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신자는 싸워서 내 것을 쟁취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라고 했을 때 “족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싸우고 지켜야 하는 방식의 삶에 합류하지 않은 사람을 말합니다. 신자가 합류한 세상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불법자의 동류가 되신 예수님이 족함이 되고 항상 나의 죄인 됨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궁히 깨달으며 주를 찾는 방식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도 찬송과 감사로 가득합니다. 부족하다는 아우성이 없습니다. 예수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 심령이 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족하다’고 하십니다.

  




  1.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2. (128강) 증인

  3. (127강) 부활의 예수님과 제자들

  4. (126강)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5. (125강) 부활과 여자들

  6. (124강) 예수님의 무덤

  7. (123강) 예수님의 죽음

  8. (122강) 두 행악자

  9. (121강) 네가 너를 구원하라

  10. (120강) 시몬과 우는 여인들

  11. (119강) 나와 빌라도

  12. (118강) 헤롯에게로

  13. (117강) 빌라도에게로

  14. (116강) 그리스도이거든

  15. (115강) 베드로의 통곡

  16. (114강) 이것까지 참으라

  17. (113강) 예수님의 기도

  18. (112강) 족하다

  19. (111강) 베드로의 각오

  20. (110강) 섬김의 나라

  21. (109강) 유월절과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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