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4.06.15 10:10

(113강) 예수님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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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2:39-46http://onlycross.net/videos/nuk/nuk-22394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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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설교>

 

◉ 자기 기도 ◉

 

 

신자의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기도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신의 기도가 사라진다는 것은 자신을 향한 자기 사랑은 죽고 죽어야 할 존재에 지나지 않은 나 같은 자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사랑만 남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자기 사랑은 죽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끌어안고 가야 할 지독한 집착이기 때문에 그 사랑이 죽고 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성령이 우리를 책망하셔서 인간이 자기 사랑에 눈을 뜨게 됨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불순종하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입니다. 위급한 순간에는 누구나 신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었던 초월적 존재의 도움과 힘을 빌려서 자신의 위급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욕망이 신을 찾고 기도하게 합니다. 이것이 자기 사랑을 기반으로 한 자기 기도입니다.

 

 

그런데 자기 사랑이 선악과를 먹은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래도 자기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은 육을 위해 살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에게서 육을 중심으로 한 자기 기도는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사랑이 사라지고 죽은 자가 신자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신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과의 다른 점입니다. 제아무리 성품이 좋고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마음에 품고 있는 진리가 다르다면 천국으로부터 거부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로 남을 때까지 그를 죽이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리기 위해 죽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진리로 품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의 자녀에게서는 자기를 위한 자기 기도는 사라지고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기 위한 기도로 그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자’는 말을 많이 하고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과연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만큼 훌륭한 인격과 성품을 갖추는 것일까요? 아니면 뛰어난 열정으로 교회 일에 앞장 서는 것일까요?

 

 

참된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노력과 성취와 행위와 찬양과 기도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택함을 입고 예수로 덧입혀진 죄인일 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죽은 자의 상태로 바라보게 되는 그를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지금 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만난 사랑을 따르기 위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 감람산으로 ◉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하십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인지라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기도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과 그 뜻을 잘 알고 계시는 분이고, 고민과 갈등이 없이 능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고민과 갈등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속에 나를 중심으로 하는 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어울리는 것은 그 어떤 고민과 갈등과 주저함이 없이 당당하게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기도를 하셨다는 것이 우리를 조금은 의아스럽게 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이 예수님께 십자가의 길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자기 문제로 인해 하나님을 찾은 것일까요? 그것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일까요? 물론 예수님이라고 해서 십자가의 길이 쉬운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오셨기에 우리와 다를 바 없이 고통을 느끼셨고, 때문에 잠시 후면 겪으실 십자가의 고난을 두고 고민하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 해도 예수님의 기도가 십자가에 대한 고민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9절을 보면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라고 말합니다.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셨다는 것은 습관이라고 말할 정도로 감람산에 자주 가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이 습관이 될 만큼 자주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하면서 ‘예수님도 습관이 될 정도로 기도 하셨으니 우리도 기도가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본문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성경 어디에서도 기도가 습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평소에 감람산에 자주 가셨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감람산에 가신 이유의 전부가 오직 기도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눅 21:37절에 보면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평소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으로 가셔서 피곤한 몸을 쉬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평소 감람산에 가셔서 쉬셨다면 제자들도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예수님을 돈을 받고 넘기기로 작정한 가룟 유다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유다가 잘 알고 있는 장소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곳을 찾아 기도하신 것이 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맡기신 길을 주저 없이 가고 계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맡기신 길을 주저 없이 가고 계시는 예수님이 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하시는 것일까요? 진심으로 예수님에게 맡겨진 잔이 옮겨지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기도하시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오직 한 길로 고정되지 않고 수시로 변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신 것부터 유다의 배반을 피하지 않으심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유혹에 빠지지 않게 ◉

 

 

예수님이 감람산으로 가실 때 제자들도 따라갔습니다. 이것은 33절의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는 장담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즉 감람산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감으로써 자신이 장담한 대로 실천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감람산으로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이르십니다. 그런데 어떤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기도하라는 것일까요?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 유혹은 장차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제자들에게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걸림돌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유혹에 대해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 예수님이 기도하신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역사에서 가장 처음 등장한 유혹은 마귀가 뱀을 이용하여 하와를 유혹한 사건입니다. 그때 뱀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라는 말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에 반발이 일어나게 합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는 자기 뜻을 가지고 자신을 위해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은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선을 선으로 주장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이 옳다고 하신 것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 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옳고 그름을 따지고 판단하면서 자신이 보기에 옳은 길로 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마귀가 끊임없이 인간을 유혹하는 것은 하나님이 옳다고 하신 것보다 자신에게 옳은 것을 따라 살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발로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는 예수님의 심정이라기보다는 평소 자기의 뜻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심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라면 여러분은 순순히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죽음의 자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뜻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는 일치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위한 것으로 바뀌기를 원할 뿐입니다.

 

 

◉ 아버지의 원대로 ◉

 

 

하지만 하나님의 뜻 앞에서 우리의 뜻은 사라져야 할 것일 뿐입니다. 이것을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는 기도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처럼 아버지의 뜻에 내게 이뤄지기를 구하는 것이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초부터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인간의 뜻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존재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신 세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뜻에 눈을 뜨게 함으로써 창조 질서를 깨뜨린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뜻을 위해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 또한 자기를 중심으로 흘러가기를 원합니다. 모든 고난과 어려움은 자신에게서 옮겨지고 평안으로 계속되는 세상이 주어지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예수님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달랐는데 예수님이 자기의 뜻을 포기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알았고 단 한 순간도 그 뜻에 순종하기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이 같은 기도를 하시는 것은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원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되는 것이 나에게 참된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심으로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3절에 보면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도 예수님이 천사로부터 힘을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도우심과 힘을 주심의 방향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천사가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함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는 길로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구하는 신자에게 하나님이 힘을 더하신다면 그 힘은 무엇을 위한 힘이겠습니까? 당연히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로 가게 하는 힘이지 우리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힘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많은 사람들이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 또한 크게 잘못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유혹에 빠진 상태에서의 기도일 뿐인 것입니다.

 

 

나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길을 간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대개 보면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면서도 아버지의 뜻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계산하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나의 뜻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알아주시고 복 주시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뜻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44절에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저주를 받으시는 길로 가십니다. 이 길은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을 기도하실 때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기도에서 십자가의 길이 결코 가벼운 길이 아니며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이었음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십자가로 인한 죄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생각한다면 아버지의 뜻에도 사랑하는 아들을 저주의 길로 가게 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생명에 들어가게 하신 아버지의 희생과 고통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자기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에게서 자기 기도가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욕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이라고 행하는 그 어떤 것도 구원의 효력이 되지 못함을 자각하며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었음을 깊이 자각하며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이 가신 길에 순종되기를 원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1.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2. (128강) 증인

  3. (127강) 부활의 예수님과 제자들

  4. (126강)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5. (125강) 부활과 여자들

  6. (124강) 예수님의 무덤

  7. (123강) 예수님의 죽음

  8. (122강) 두 행악자

  9. (121강) 네가 너를 구원하라

  10. (120강) 시몬과 우는 여인들

  11. (119강) 나와 빌라도

  12. (118강) 헤롯에게로

  13. (117강) 빌라도에게로

  14. (116강) 그리스도이거든

  15. (115강) 베드로의 통곡

  16. (114강) 이것까지 참으라

  17. (113강) 예수님의 기도

  18. (112강) 족하다

  19. (111강) 베드로의 각오

  20. (110강) 섬김의 나라

  21. (109강) 유월절과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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