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4.06.22 10:19

(114강) 이것까지 참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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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2:47-53http://onlycross.net/videos/nuk/nuk-22475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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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설교>

 

◎ 유다의 배신 ◎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배신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신한 이래로 배신은 인간의 부패를 보여주는 증거물로 계속되어 온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나타난 첫 배신은 아담이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창 3:11下)는 하나님의 추궁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답한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 아담은 하와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였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향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알게 되자 모든 책임을 하나님과 여자에게로 돌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속성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 배신이 없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신은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저버리고 관계를 끊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신은 거의 모든 드라마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나라를 배신하고, 회사를 배신하고, 친구를 배신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하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만큼 배신은 남의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를 배신한 적은 없습니까? 로마의 장군 줄리어스 시저가 친구들과 부하들에 의해 암살을 당할 때 암살자 중에 절친한 친구였던 브루터스가 있는 것을 보고 “모두 한 편인가? 브루터스, 너마저? 그럼 시저는 끝이로구나!”라고 외쳤다고 하는데, 이러한 배신 행위를 예수님도 겪게 됩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행위를 아셨으면서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유다를 포함해서 모든 제자들이 잘 알고 있는 장소인 감람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유다는 대제사장들을 포함한 여러 무리들을 데리고 예수가 계신 곳으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옵니다. 이것이 예수를 넘겨주기로 한 사람들과 약속한 신호였습니다.

 

 

◎ 참으라의 의미 ◎

 

 

주위에 있던 제자들이 비로소 사태를 파악하고 예수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제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잘라 버립니다. 이 제자는 왜 하필 대제사장의 종을 향해 칼을 썼을까요?

 

 

예수님을 붙잡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같은 기득권 세력입니다. 종은 주인의 지시를 따라 함께 했던 것뿐일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가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칼을 쓴 것이라면 그 칼은 종이 아닌 대제사장과 같은 사람을 향했어야 합니다. 종 보다는 대제사장을 향해 칼을 들어야 더 위협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기엔 주어진 상황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예수를 잡으러 온 무리들 중에는 성전의 경비대장들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무리들을 힘으로 상대하여 예수를 지켜낼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했고 제자들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순순히 내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무리들 중 가장 약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종을 상대하여 칼을 쓴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의 행동에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의 문제 해결 방식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제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칼을 든 것은 힘없이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인간의 속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종의 귀를 자른 것은 예수님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당방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고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부당한 일을 겪고 계십니다. 제자의 배신과 함께 붙들려서 죄인 취급을 받으며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참아야 하는 것입니까? 부당함에 대해 참는 것은 우리의 속성과는 맞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 대항 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하는 상황은 있겠지만 예수님은 힘없는 제자들이 대항하다 다칠 것을 염려해서 참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상황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붙들리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뜻에 자신을 맡기고 계신 것입니다. 비록 부당한 상황이라고 해도 그 역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기에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부당하게 대우 받는 길로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세상이었고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참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가야할 길도 예수님과 같다는 것을 의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의 삶의 방식에 대한 가르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한다 해도 이 말씀대로 무조건 참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저로서도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말씀을 일률적으로 적용해서 어떤 경우에도 참아야 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인내심을 가르쳐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잡혀 가시는 일에서 제자들이 벗어나야 할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신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으라는 말씀에는 단지 폭력을 쓰지 말라거나 대항하지 말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순순히 잡혀가시는 예수님에게서 장차 그들이 가야 할 삶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칼을 써서라도 예수님을 지켜야 하는 것에만 마음을 둔다면 잡혀 가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억울하고 부당한 상황을 겪게 되면 그러한 상황이 있게 된 배후에 누가 계신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부당한 현실에 대한 거부와 불만으로만 가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게 됩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말한 대로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신자의 시각에서 생각한다면 비록 억울하고 부당한 일이라고 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왜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참는다고 해서 삶의 모든 내막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슨 이유로 부당한 일을 겪게 하시는지 생각한다고 해서 금방 답이 내려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삶을 생각한다면 분명한 답 하나는 마음에 둘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일도 나를 생명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모든 삶은 ‘형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자신을 위한 칼 ◎

 

 

제자가 칼을 든 것은 외적으로는 예수님을 지키고자 한 것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행동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살아서 자신들 곁에 함께 해야 그동안 예수님을 추종했던 인생이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자의 행동은 예수님에 대한 충성으로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곁을 떠나신 뒤에도 칼을 들어 종의 귀를 치면서까지 예수님을 지키고자 했던 행동은 예수님을 향한 충성과 의리로 귀결되면서 칭찬들을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행동을 거부하십니다. 제자의 행동을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아셨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가 ‘예수님을 위해서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한다는 일들을 보면 결국 그 중심에는 교회가 있고 목사가 있습니다.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지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 그 속마음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또한 참아야 할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칼을 든 제자처럼 행동해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교회를 공격하고 해를 끼치는 대상에 대해서는 제자처럼 칼을 들어 공격함으로써 교회를 지키는 것을 신앙이라고 선동할 것입니다. 이 또한 교회가 가고자 하는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입니다.

 

 

교회가 진심으로 십자가의 길로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길이 진리요 생명임을 믿는다면 교인들을 향해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향한 열심을 참고, 소위 좋은 신앙을 저울질하는 추로 작용하는 기도와 봉사와 십일조를 참으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그 일을 하는지 네 자신부터 먼저 보라는 의미에서 참으라는 것입니다.

 

 

부당함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것도 나라는 존재가 중심에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를 위해 분노하고, 나를 위해 칼을 들고자 하고,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만 있는 것이 바로 나였다는 것을 보게 되는 기회가 ‘참으라’는 말씀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했을 때 예수께서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면 유다의 행동은 겉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에 대한 친근함과 신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다 역시 자기를 위해 예수께 입 맞춘 것일 뿐입니다.

 

 

유다를 앞세운 무리들은 어떻습니까? 그들 또한 자기들의 삶의 영역이 예수님에 의해 훼방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계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행동은 달랐지만 저마다 자신을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 어둠의 권세 ◎

 

 

53절에 보면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눅 19:47절에 보면 예수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하였지만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었기 때문에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예수님께 손을 대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 주변에 백성들이 없습니다. 눈치 보고 두려워 할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성전에 있을 때는 백성들 때문에 자신들의 계획대로 행동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누구의 눈치 볼 필요가 없이 자기들 뜻대로 행동하면 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들의 때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두려워 할 대상이 없이 오직 자기를 위해 자기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을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때 그들에게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마귀의 말에 붙들렸을 때 관심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말씀도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 오히려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마귀의 말이 진리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무엇이 나를 위한 것인가?’라는 선택에서 선악과를 먹는 것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의 권세 아래 있게 된 인간의 형편입니다.

 

 

세상은 자신에게 필요한 신을 찾습니다. 교회 역시 자신에게 필요한 하나님, 예수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을 위해 적당히 지켜줘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어둠이 권세로 지배하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은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눈을 뜨게 합니다. 내가 원한 내 인생을 칼을 들고 대항해서라도 빼앗기지 않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참으라고 하심으로써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칼을 들고 종의 귀를 치는 제자의 그 속성이 우리 안에도 박혀 있음을 평소 우리의 삶을 보면서 실감해야 합니다. ‘참으라’는 말씀이 칼을 든 그 제자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마치 나는 아닌 듯, 나는 예수님을 위해 살고 있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나 자신을 향해 하신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유다는 자기 희망을 품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자기 희망이 무너졌을 때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를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희망을 품고 예수를 찾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오직 자신의 인생에 필요해서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릅니다. 십자가는 옵션처럼 취급됩니다. 이 세상을 향해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해 붙잡히시고 십자가의 길로 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예수님이 가신 그 길에 순종되는 것이 곧 생명으로 향하는 것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삶은 환상일 뿐이며, 함께 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길에 참여되는 것이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를 제대로 보게 된다면 예수님만이 희망이심을 절감할 것입니다. 
 




  1.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2. (128강) 증인

  3. (127강) 부활의 예수님과 제자들

  4. (126강)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5. (125강) 부활과 여자들

  6. (124강) 예수님의 무덤

  7. (123강) 예수님의 죽음

  8. (122강) 두 행악자

  9. (121강) 네가 너를 구원하라

  10. (120강) 시몬과 우는 여인들

  11. (119강) 나와 빌라도

  12. (118강) 헤롯에게로

  13. (117강) 빌라도에게로

  14. (116강) 그리스도이거든

  15. (115강) 베드로의 통곡

  16. (114강) 이것까지 참으라

  17. (113강) 예수님의 기도

  18. (112강) 족하다

  19. (111강) 베드로의 각오

  20. (110강) 섬김의 나라

  21. (109강) 유월절과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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