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4.06.29 09:57

(115강) 베드로의 통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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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2:54-62http://onlycross.net/videos/nuk/nuk-22546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설교>

 

◎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 ◎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다고 장담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자신만만하게 말했던 자기 장담은 모두 무너지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54절을 보면 무리들이 예수님을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갔을 때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비록 멀찍이 따르고는 있었지만 그나마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떠나지 않은 제자는 베드로였습니다. 그것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마음이 다른 제자들에 비해서 남달랐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한 베드로도 자기 신상이 염려되는 상황에서는 예수보다는 자신을 우선으로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잡혀 가는 상황에서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일행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자신 또한 붙들려 끌려갈 수밖에 없음을 알았기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것은 비록 멀찍이라도 예수님을 따라 온 것으로 인한 결과였습니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이 잡혀 가시는 그 현장에서 떠났다면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갔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 들어간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발길을 돌려 돌아갔다면 역시 예수를 부인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 안까지 들어갑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가 그 결말을 보려고 대제사장의 집안으로 들어간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가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그 같은 위기에서 벗어날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조금은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그것은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앉아있던 사람들 가운데 베드로도 함께 앉은 것입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사람들을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자칫 자신이 예수님의 일행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자신도 위험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인지 오히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한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고 부인하지만, 베드로를 알아본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너도 그 도당이라”는 말을 듣게 되고 또 다시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며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런 상황 다음에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가장 먼저 그 자리부터 피하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두 사람이나 베드로가 누군지를 알아봤습니다. 비록 베드로가 자신은 아니라고 부인하긴 했지만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눈치를 봐서 속히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계속 거기에 머물고 있다가 결국 한 시간쯤 후에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는 말을 듣게 되고,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 예언의 성취 ◎

 

 

이처럼 모든 상황은 예수님 말씀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흘러갑니다. 베드로를 알아본 사람들이 등장한 것이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베드로가 그 자리를 피하지 않는 것 모두가 예수님의 말씀 성취를 위해서 준비된 것처럼 다가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은 베드로의 통곡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에게서 통곡이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모든 일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의 성취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두고 봐라 내 말대로 될 것이다’는 취지로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하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통곡이 있게 하기 위한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대로 되어 진다’고 할 때 그 의미는 모든 일이 말씀한 그대로 되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담긴 의도가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지금도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 55:11절에 보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법이 없고 반드시 땅에서 성취된다는 뜻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성경은 수많은 예언으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예언들이 문자 그대로 정확히 실현 된 것은 아닙니다. 가령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고 말한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 생활로 고초를 겪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뻐 뛰며 길을 떠나 평안히 인도를 받으며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때에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사 55:12). 마치 이스라엘이 금의환향하는 것처럼 묘사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포로 생활이 끝났다는 것이 기쁨은 되었겠지만 돌아가는 그들의 현실은 고난의 행군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힘겹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들을 기다린 현실 역시 암담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황폐화 된 상황에서 이사야의 예언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그대로 실현되었다고 생각됩니까? 만약 여러분의 현실에서 말씀이 그대로 실현됨을 체험했다면 그 사람은 누구보다 말씀을 신뢰하고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대개의 신자는 자기 현실에서 말씀의 성취를 체험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믿는 신자라 해도 그 현실은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이 주어진 바가 없이 성취되었고 성취되고 있으며 성취될 것입니다. 비록 현실에서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말씀이 드러나고 이뤄지는 길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삶에 무의미한 것은 없으며 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고 말씀이 역사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 성취의 의미 ◎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하신 것은 단순히 앞일을 미리 예고하시고, 그대로 성취 되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예지 능력을 부각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베드로의 통곡이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61,62절)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 후에 예수님이 베드로를 바라보십니다. 자신을 바라보시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는지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게 되고 심히 통곡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통곡에 담긴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때의 베드로의 심정을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단순히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죄책감이었다면 통곡으로 이어지기 보다는 자신을 자책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유다가 자신이 팔아넘긴 예수님이 정죄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자기 행위를 뉘우칩니다. 베드로의 통곡에도 뉘우침의 의미는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의 뉘우침과 베드로의 뉘우침이 다른 것은 유다는 스스로 뉘우친 것이지만 베드로는 말씀이 생각남으로 인해서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게 된 것에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뉘우친 유다는 은 삼십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마 27:4)고 말합니다. 예수를 판 죄의 흔적인 은 삼십을 도로 반납함으로써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고자 한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자살하게 됩니다.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판 것과 예수께 속하지 않았다고 부인한 것을 두고 ‘누가 더 잘못했는가?’라고 저울질 할 수 없습니다. 둘 다 자기중심에서 자기를 위해 행동한 것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자살을 했고 한 사람은 통곡을 했다는 것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에 대해서도 예언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통곡하는 길로 가기보다는 스스로의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다의 자살을 통해서 구원은 철저하게 말씀에 붙들린 자에게서 나타나는 기적적인 사건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나 뉘우침, 이런 것들은 신앙과는 무관한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러한 신앙인으로 만들고자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통곡은 단순한 죄책감이 아닙니다. 자기 행동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차원의 통곡이 아니라 말씀을 생각하게 되고 그 말씀에 의해 자신의 무너짐을 경험한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통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에게 통곡이 있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장담과 자신감이 모두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을 때만 해도 베드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너무 무시하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은 절대 주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며 주와 함께 라면 옥에도 가겠고 죽는 데에도 가겠다는 자기 각오를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베드로를 무너뜨리시고 통곡하게 하심으로 믿음은 인간의 노력과는 상관없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베드로로 하여금 통곡하게 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통곡이 곧 말씀의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통곡이 있습니다. 진도 팽목항에 두 달여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통곡 소리가 끊이지 않았음을 우리가 잘 압니다. 그들의 통곡이 얼마나 처절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 때문에 통곡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역시 살면서 예수님 때문에 통곡한 적이 있던가요? 그렇게 보면 만약 나 자신에게서 예수님 때문에 통곡이 나온다면 그것은 말씀에 의한 기적의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통곡은 말씀이 역사하는 기적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성취입니다.

 

 

◎ 하나님이 준비하신 삶 ◎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부인하는 말을 하고 있을 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주께서 베드로를 보십니다. 주께서 베드로를 보셨을 때 베드로에게 들린 닭 울음소리는 평소에 들었던 소리가 아니라 주의 말씀을 생각하게 하는 울음이었습니다.

 

 

닭이 우는 소리를 베드로만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들었고 대제사장 집 밖의 마을의 사람들도 모두 들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저 닭이 우는 소리로만 들렸습니다.

 

 

베드로만 예수를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잡아간 모든 무리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베드로처럼 닭울음소리를 듣고 통곡하지 않습니다. 그저 매일 같이 일상적으로 접하고 들었던 소리이고 상황이었을 뿐입니다.

 

 

베드로를 알아보는 세 명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베드로에게 예수와 같은 일행이 아니냐고 지적하는 상황들 하나하나가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사건들입니다. 베드로의 죄를 드러내고 깨닫게 하시고 베드로로 하여금 통곡이 있게 하기 위해서 있게 하신 사건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일상생활이었을 뿐이지만 베드로에게는 자신이 무너지고 죄를 깨닫고 통곡하게 되면서 주를 생각하게 되는 기적의 사건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일상생활은 없습니다. 매일 같이 계속 반복되는 평범한 사건들이고 생활이라 해도 신자에게는 주의 말씀을 생각하게 하고 나의 악함을 깨달으며 통곡하게 하는 기적의 사건으로 준비되어 있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자기 생존에 붙들려 살아감으로 인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힘으로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이었고 예수님 또한 자신이 지키겠다고 큰 소리쳤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주의 말씀 밖에 있는 것이었기에 예수님은 베드로로 하여금 그동안 그토록 장담하고 큰 소리쳤던 자기 힘이 얼마나 무능한가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부인에 대해 분노하시거나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베드로가 되어주기를 원하신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아신 예수님은 베드로가 부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끌어가시고 부인하는 것을 두고만 보십시다. 왜냐하면 자신의 무너짐을 경험하면서 통곡이 있고 구원은 오직 주의 말씀으로 되어짐을 아는 베드로로 회복하시는 것이 주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준비하신 사건을 겪으며 살고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한 것은 모든 사건들은 말씀의 성취를 위한 도구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삶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마음에 통곡이 있다면 그가 바로 기적의 사람입니다. 
 




  1.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2. (128강) 증인

  3. (127강) 부활의 예수님과 제자들

  4. (126강)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5. (125강) 부활과 여자들

  6. (124강) 예수님의 무덤

  7. (123강) 예수님의 죽음

  8. (122강) 두 행악자

  9. (121강) 네가 너를 구원하라

  10. (120강) 시몬과 우는 여인들

  11. (119강) 나와 빌라도

  12. (118강) 헤롯에게로

  13. (117강) 빌라도에게로

  14. (116강) 그리스도이거든

  15. (115강) 베드로의 통곡

  16. (114강) 이것까지 참으라

  17. (113강) 예수님의 기도

  18. (112강) 족하다

  19. (111강) 베드로의 각오

  20. (110강) 섬김의 나라

  21. (109강) 유월절과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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