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4.07.20 10:02

(118강) 헤롯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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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3:8-12http://onlycross.net/videos/nuk/nuk-23081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설교>

 

◉ 헤롯에게 넘김 ◉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빌라도는 더 이상 예수님을 심문하지 않고 헤롯에게로 보냅니다. 예수에 대한 고발이 무고라는 것을 빌라도는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소신대로 무죄 석방을 한다면 예수를 붙잡아 온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큰 반발을 살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통치구역을 빌미 삼아 예수에 대한 문제를 헤롯에게로 떠넘기기로 한 것입니다.

 

 

만약 공회원의 반발을 이기지 못하여 그들의 요구대로 예수의 유죄를 판결한다면 빌라도 스스로는 죄 없는 사람을 사형수가 되게 한 것이 되기 때문에 관할 문제는 예수의 문제로부터 회피할 수 있는 좋은 빌미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빌라도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동일한 세상풍조를 따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옳은 것을 옳다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소신껏 밝히기 보다는 어떻게 하는 것이 내게 유리한가를 따지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늘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고민으로 부딪히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나 빌라도가 예수가 죄 없음을 무리들에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반발을 이기지 못하여 관활 문제를 구실 삼아 예수를 헤롯에게 떠넘기는 것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베드로나, 빌라도처럼 내가 중심이 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의 문제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무능을 깨닫고 절감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배우게 하시려고 우리가 원하는 현실 세계를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개인적인 삶의 풍요로움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은 영혼을 살리시는 생명과 진리를 그 결과로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기보다 어떤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다면 신앙인의 두려움 없는 믿음을 보여주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세워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권능으로만 되어짐을 증거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한 인간의 믿음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되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무능이 드러나고 무능을 인정함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임을 증거하는 것이 신자의 본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부인이 동반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최선으로 나를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 헤롯의 기쁨 ◉

 

 

빌라도가 예수를 헤롯에게로 넘기자 헤롯은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 이유는 헤롯이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만나고 싶어 했던 것이 이미 오래였고, 예수가 이적 행하는 것을 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헤롯과 예수님의 만남에는 기쁨이 있었으나 그 기쁨은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헤롯은 예수라는 존재에 대해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리의 문제로 인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 한 소문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눅 9:7-9).

 

 

그래서 헤롯은 자신의 궁금증과 호기심의 만족을 위해 예수께 여러 말로 물었으나 예수님은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역시 침묵으로 반응하실 뿐입니다. 하지만 침묵은 업신여김과 침묵으로 이어집니다. 예수에 대한 자기 관심 때문에 예수를 만나게 된 것을 기뻐했지만 자신의 관심이 해결되지도 충족되지도 못하자 실망하게 되고 그 실망이 예수에 대한 무시와 조롱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 또한 오늘날 기독교의 실태라는 것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한데 그 기쁨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문제에서 알고자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천국이 어떤 곳인지 정확히 알고 싶기도 할 것이고, 부활의 몸에 대해서나 세상의 마지막 때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이 관심 두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신자라 이름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과의 만남에서도 기쁨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가 관심 두는 것에 관심을 두었을 때 얻어지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어떤 곳인지, 부활의 몸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러한 문제에 궁금증을 가지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의 만남에 기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침묵의 의미 ◉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가 궁금히 여기는 것에 대해 침묵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적을 통해서 예수님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열망에 대해서도 침묵하십니다. 이적에 대해서는 이미 예수님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11:16). 표적으로 예수를 확인하려는 의도로 시험을 한 것입니다. 이들의 요구에 예수님은 이 세대에 보여줄 유일한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11:29-30).

 

 

이 세대는 지금의 우리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의 세상이 이 세대에 포함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세상의 마지막 때까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보고 확인하고 싶어 하고 증거의 도구로 삼고자 하는 이적에 대해 예수님은 침묵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의 표적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요나를 통해서 보여준 것은 심판이었지 이적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요나가 물고기에게 삼키었다가 다시 나오게 된 것도 이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이적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한 요나의 표적이 표적을 요구한 사람들에게는 만족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침묵하신 결과가 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라는 사람 때문에 회개한 것도, 요나가 놀라운 이적을 보여줬기 때문에 회개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요나가 전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말씀에 의해서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사십일이 지나면 무너진다는 말씀을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니느웨가 자신들을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한 존재로 여겼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너지리라’는 말씀을 자신들의 현실로 받아들이며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무엇일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이적을 경험한다고 해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완악함입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여전히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여 구원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들이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만 생각했을 뿐 자신이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뜨거운 햇빛을 가려주는 박넝쿨이 있게 하시자 기뻐하다가 벌레를 예비하셔서 박넝쿨을 갉아 먹게 하시고 시들게 하시자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성내기도 합니다.

 

 

요나는 끝까지 자신의 것을 고집했습니다. 자신이 원한 대로 니느웨를 심판해 주기를 원했고, 햇빛 아래에서 그늘을 제공해주는 박넝쿨이 끝까지 자신의 편안함으로 함께 해주기를 원했습니다. 자기 고집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성을 내며 대적했습니다. 인간은 이런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자기 것을 고집하고 지키는 방식으로 살기에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 즉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안에서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된 그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마지막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표적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이적입니다. 여기에 관심을 둔 신자만이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기쁨을 얻게 됩니다.

 

 

신자의 기쁨은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이고 영광과 진리를 보게 됨으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나의 관심은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하시는 은혜의 현장을 보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바라보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상태가 기쁨입니다. 이 기쁨의 상태에서는 내가 구원 받고, 내가 축복 받고, 내가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인지 아닌지의 여부까지도 관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것이 중요하고 그분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었다는 은혜에만 모든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향했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자 헤롯의 기쁨은 업신여김과 희롱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빛난 옷을 입혀 다시 빌라도에게도 도로 보냅니다. 아마 헤롯은 예수라는 존재가 결코 로마에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예수에게서는 그만한 힘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친구 관계 ◉

 


그런데 이 일로 인해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헤롯은 유대의 분봉왕입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유대를 다스리는 로마가 파견한 총독으로 와 있으니 둘 사이가 좋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문제로 인해 서로 친구가 된 것입니다.

 

 

아마 계속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문제에 대해서만 친구가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에 대해 동일한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정치적 문제로 인한 동질감에 의해 맺어진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그들을 친구 되게 한 정치적인 요소가 사라지게 되면 언제든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로 인해서 헤롯과 빌라도가 친구, 즉 ‘우리’의 관계가 되었지만 그 관계는 말한 대로 정치적이며 인간적입니다. 하지만 예수로 말미암은 ‘우리’의 관계는 주께서 그 길로 가심으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진리를 향한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이 친구라는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의 관계에는 정치적이나 인간적인 문제가 개입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눅 7:34절을 보면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신 것은 단지 그들을 멀리 하지 않고 친밀하게 대해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멀리 하는 그들을 예수님이 친구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의 유일한 친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을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친구는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에서 한시적인 관계일 뿐입니다. 따라서 현재 불필요하고 내일에도 역시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친구의 관계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관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에게 친구는 사실 불필요한 존재입니다. 신자는 현재도 미래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믿는 믿음의 길에 있기 때문에 인생에 도움이 될 친구관계를 구축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친구 관계를 끊으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세상을 지향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신자에게 도움이 되는 친구는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친구라는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것은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롯이 처음에는 예수님을 만난 것을 기뻐하다가 업신여기고 희롱하게 된 것은 헤롯이 원했던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시대건 보고자 하는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군중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인정해 버리고 업신여깁니다. 이것이 지금의 기독교라는 종교 세계의 실상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모든 것을 보고 싶어 합니다. 직접 보면 더 확실히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보여준다는 곳이 있으면 그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진리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보여주는 것 자체를 진리로 규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가 믿음과 사랑을 말할 때도 보여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실천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보여주는 실천이 없는 믿음이나 사랑은 게으른 것이고 죽은 것이라고 하면서 보여주는 것에 몰두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무엇을 보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과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과 은혜를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교회가 보여주기 힘쓰는 믿음과 사랑은 기껏해야 인간적인 것이며 실천적인 것이고 도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낮아지심과 죽으심이 사랑이며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신앙은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적 관계와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예수님이 나타내시고 보여주신 것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관심은 내려놓으시고 예수님이 관심 두는 것에 동일한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며 우리를 이 기쁨에 있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앎이 있다면 보이지 않아도 주를 바라볼 것입니다.

 

  




  1.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2. (128강) 증인

  3. (127강) 부활의 예수님과 제자들

  4. (126강)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5. (125강) 부활과 여자들

  6. (124강) 예수님의 무덤

  7. (123강) 예수님의 죽음

  8. (122강) 두 행악자

  9. (121강) 네가 너를 구원하라

  10. (120강) 시몬과 우는 여인들

  11. (119강) 나와 빌라도

  12. (118강) 헤롯에게로

  13. (117강) 빌라도에게로

  14. (116강) 그리스도이거든

  15. (115강) 베드로의 통곡

  16. (114강) 이것까지 참으라

  17. (113강) 예수님의 기도

  18. (112강) 족하다

  19. (111강) 베드로의 각오

  20. (110강) 섬김의 나라

  21. (109강) 유월절과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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