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4.07.27 10:01

(119강) 나와 빌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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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3:13-25http://onlycross.net/videos/nuk/nuk-231325.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3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17 (없음)

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19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20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21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24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설교>

 

◎ 예수와 빌라도 ◎

 

 

헤롯으로부터 예수를 다시 넘겨받은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예수를 심문하였으나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와 있던 분봉왕 헤롯도 또한 예수가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도로 돌려보낸 것이라고 하면서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고 심문 결과를 발표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때려서 놓겠다고 한 것은 예수를 죽이려는 목적으로 고발한 무리들과의 타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가 없어서 사형 시킬 수는 없으니 채찍질하여 놓아주는 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리들은 빌라도의 말에 반발하며 일제히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라고 소리 지릅니다.

 

 

본문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당시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빌라도는 그 전례를 따라서 한 사람을 놓아 주려고 한다며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마 27:17)라고 묻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예 바라바는 제시하지도 않고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요 18:39)라고 물음으로 예수를 선택하도록 유도한 것으로 말합니다. 이에 비해 누가는 아예 ‘예수냐 바라바냐’라고 묻는 과정이 없이 무리들 스스로 민란과 살인으로 옥에 갇혀 있는 바라바를 선택한 것으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누가는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려고 한 것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빌라도가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고(20절), 무리들이 거듭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소리 지르는 대도 또 다시 세 번째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22절)고 한 것으로 말함으로 예수의 죄 없음과 놓아주고자 했던 빌라도의 노력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가 말하고 있는 상황에서만 보자면 빌라도는 예수를 선택했고 무리들은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빌라도가 비록 무리들의 요구대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넘겨주어 그들 뜻대로 하게 함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되었지만 그것은 어쨌든 빌라도의 의도가 아니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는 무리들의 요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다만 그들의 강한 요구를 끝까지 거절하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빌라도의 책임은 조금 가벼워질 수 있을까요? 어쨌든 세 번씩이나 예수님의 무죄를 말하면서 놓아주려고 한 것을 생각한다면 빌라도는 유대인에 비해서 그 책임이 가볍다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면서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으로 말합니다. 어쩌면 우리 역시 유대인과 달리 빌라도처럼 이방인이라는 입장에서 생각하면 못 마땅한 문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십자가 사건을 개개인의 선택이나 특정 민족의 선택으로 인한 것으로 바라보는 잘못된 시각일 뿐입니다.

 

 

사실 행위의 경중만 놓고 본다면 사도신경의 문구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가 아니라 ‘유대인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수정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빌라도의 후손이 기독교의 사도신경의 문구를 본다면 얼마나 억울해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은 것으로 신앙고백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죽으심은 한 개인의 선택으로 결과 되어진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어쨌든 자기들 마음대로 예수를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예수를 끌고 왔던 그들에게는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권한은 오직 빌라도에게만 있었습니다. 빌라도의 권한을 이용해서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자신들의 뜻을 이루고자 했던 것입니다.

 

 

◎ 빌라도는 누구인가 ◎

 

 

그러면 빌라도가 선택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무리들의 요구대로 예수를 넘겨주었다면 빌라도는 유대인을 선택했다고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빌라도는 자신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세 번씩이나 선언했던 빌라도가 결국 넘어서지 못한 것은 총독의 위치에 있었던 자신의 입장입니다. 끝까지 무리들의 요구를 목살하고 예수를 석방했다면 성난 무리들이 어떤 사태를 일으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빌라도는 자신에게 유리한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빌라도가 비록 예수님이 죄 없음을 알았다고 해도 예수를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로 세상에 오신 메시아로 안 것은 아닙니다. 단지 무리들이 고발한 죄와 무관함을 알았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라도는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과 위치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선택할만한 가치를 예수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을 위해 예수를 넘겨준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석방할 정치적 권한이 있었지만 빌라도 또한 ‘자기를 위해서’라는 인간이 넘을 수 없는 권세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는 것은 빌라도 한 개인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본디오 빌라도 이야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자기 사랑’이라는 권세 붙들려 살아가는 우리가 자신을 위해 예수님을 넘겨주는 빌라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죄 없으신 분으로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빌라도의 수준을 넘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구세주로 믿습니다. 또한 나의 생명이 되시고 장차 세상의 마지막이 임하면 주와 함께 부활하여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함께 거하게 된다는 것도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런 분임을 믿는다면 누가 뭐래도 예수님은 나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선택해야 하는 존귀한 분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의 삶이 그 같은 믿음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습니까?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자주 ‘매주 이렇게 설교 하는 일이 꼭 필요한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서 오직 한가지만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이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시는가?’에만 집중하고 말씀을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주 설교 하는 일이 꼭 필요한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성경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매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항상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용이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지금까지 여러분께 같은 말을 해 온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매주 설교를 해야 하고 들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알았고 복음의 의미를 알았다면 그대로 살아가시면 됩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계속 말씀을 듣고 자신을 살피며 회개하기 위해서라면 그동안 들어서 알고 있는 복음의 내용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굳이 수고스럽게 교회로 모여서 말씀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라면 친한 분들끼리 연락해서 모이고 교제하면 됩니다. 성도의 교제에 예배당이라는 장소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여서 말씀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바로 내 이야기라는 것을 늘 실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자기중심에서 살아가고 자신에 대해서는 항상 관대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있는 복음의 지식으로 자신을 본다는 것이 힘듭니다. 하지만 말씀으로 자신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더 이상 말씀이 아니라 성경지식에 머물 뿐입니다.

 

 

말씀이 나의 이야기임을 알게 되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나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사건이며 본문의 빌라도가 바로 나 자신임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처럼 빌라보가 나라는 것을 알게 되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한 최대의 수혜자 역시 나 자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혼자서도 이러한 깨달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복음의 이야기를 교환할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알았다면 그 은혜를 말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허탄한 세상의 것에 미련을 두고 있고 세상의 것으로 낙심하고 있다면 세상의 것보다 더 크고 좋은 것이 있음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를 아는 신자의 할 일입니다.

 

 

여러분이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매주 같은 말이지만 복음을 말하는 것이고 여러분이 모여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막혀 있는 교회고 모임이라면 복음이라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목사의 할 일은 교인을 관리하는데 있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이르면서 일곱 사람을 택하여 세우고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고 한 내용이 있습니다. 사도의 존재 이유가 말씀 사역에 있는 것처럼 목사의 존재 이유 역시 말씀 사역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교인을 관리하는 일에 치중하게 되면 결국 빌라도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보다는 교인들의 요구와 뜻을 따르게 되고 결국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선택이며 결정일 뿐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빌라도처럼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알고 복음을 알고 은혜를 안다면 여러분의 모임과 만남에서 은혜의 이야기가 나와져야 합니다. 누군가가 은혜에서 멀어지면 그에게 다가가 은혜에 대해 이야기 해주는 것이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만약 그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빌라도처럼 자신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은혜를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은혜가 크다 하고 은혜를 알았다고 하면서도 정작 은혜를 이야기하는 일을 가볍게 여기고 소홀히 하는 것이 진심으로 은혜를 아는 자라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예수 대신 바라바 ◎

 

 

무리들은 빌라도에게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라고 소리 지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기 위해서 민란과 살인으로 옥에 갇혀 있는 자를 놓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라바라는 흉악범보다 예수라는 존재를 더 유대사회를 흔드는 위험인물로 여겼던 것입니다.

 

 

빌라도에게는 예수보다는 바라바가 더 위험 인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유다 사회의 질서를 책임지는 사람이었기에 민란과 살인으로 사회를 어지럽히는 바라바가 위험인물인 것입니다. 하지만 무리들에게는 예수가 위험인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종교 세계를 흔드는 분이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대하는 입장이 서로 달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르지 않은 것은 그들 누구에게도 예수님은 자신을 죄에서 건지실 구세주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의해 예수님은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세상이 선택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길로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음을 알았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이 죄 없는 분임을 압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아는 수준은 예수가 사형 당할 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죄 없는 분으로 자신 앞에 서 계시는 것이 자신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살려주기 위해서 무리들의 반발도 감수할 의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의 죄 없음을 아는 수준은 어떻습니까? 죄 없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기 위함입니다. 즉 나의 문제이고 나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을 포기할 수 없어야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죄 없다고 하시면서도 여전히 나를 위해 살아가는 이것이 빌라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유대인은 자기의 종교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위험인물로 여기고 죽이고자 합니다. 유대인의 종교 세계는 율법을 근본으로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그것을 흔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알게 되면 율법을 근본으로 한 종교 세계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종교 세계를 수호하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알고 있는 종교 세계를 신앙으로 여기며 정작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하는 것이 곧 유대인이며 이 또한 오늘날 우리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선택했다 해도 당장 주어지는 현실의 혜택이 없습니다. 공정한 판단을 했다고 평가 받고 존경받는 보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무리에게 넘겨주어야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바라바 대신 예수를 선택했다고 해서 예수님에게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 없는 예수를 무고했다는 비난만 예상될 뿐입니다. 그러니 모두의 입장에서는 예수를 버려 버리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빌라도와 유대인을 보면서 예수 믿는 것은 내 자신에게 득이 되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내게 득이 되는 길을 포기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빌라도가 있고 유대인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대신 세상을 선택하고 예수는 죽인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부르셔서 은혜를 알게 하시고 예수님 때문에 죽는 길도 가도록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1.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2. (128강) 증인

  3. (127강) 부활의 예수님과 제자들

  4. (126강)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5. (125강) 부활과 여자들

  6. (124강) 예수님의 무덤

  7. (123강) 예수님의 죽음

  8. (122강) 두 행악자

  9. (121강) 네가 너를 구원하라

  10. (120강) 시몬과 우는 여인들

  11. (119강) 나와 빌라도

  12. (118강) 헤롯에게로

  13. (117강) 빌라도에게로

  14. (116강) 그리스도이거든

  15. (115강) 베드로의 통곡

  16. (114강) 이것까지 참으라

  17. (113강) 예수님의 기도

  18. (112강) 족하다

  19. (111강) 베드로의 각오

  20. (110강) 섬김의 나라

  21. (109강) 유월절과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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