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4.08.10 10:01

(121강) 네가 너를 구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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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3:32-38http://onlycross.net/videos/nuk/nuk-23323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설교>

 

◉ 믿음은 ◉

 

 

현대 교회의 강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가 사라졌다는 말을 간혹 듣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은 그나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의식이 있다고 할 수 있고 현대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목사에게 “당신의 설교에는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가 없습니까?”라고 말한다면 아마 거의 모든 목사는 “나는 십자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라며 반발 할 것입니다. 아니면 정말 자신이 십자가 얘기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를 하는 사람이나 설교를 듣는 사람이 주지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설교의 내용에 예수, 십자가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한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멘트 중에 하나가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입니다. 목사의 말에 교인들은 당연히 큰 소리로 아멘으로 화답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고 온 교인이 아멘으로 화답했다고 해서 예수님을 전했고 교인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인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상태에서 단지 자신이 알고 있는 믿음을 근거로 한 아멘의 수준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 곧 진리이고 생명임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십자가 길이 진리임을 믿는다면 그 길을 찾는 이가 없다고 해도, 어떤 고난이 다가온다고 해도 그 길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교회가 예수를 말하고 십자가를 말한다면 이 이야기까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작금의 교회에서 들을 수 있는 십자가는 고작 구원용일 뿐이며, 예수는 우리를 복주는 분으로 전락되어 값싼 은혜로 남발되고 있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인 우리가 성경에 대해 한시라도 놓치면 안 되는 것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를 통해서 은혜의 세계로 더욱 깊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누구라도 그리스도에게 미치게 되면 나타나는 증상은 오직 은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은혜를 삶의 중심에 두고 비록 세상의 일에는 실패했다고 해도 흔들림 없이 주의 은혜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아는 것이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우리로서는 불가능하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 행악자로 취급된 예수 ◉

 

 

본문에서 예수님은 두 행악자와 함께 해골이라는 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것도 두 행악자가 예수님의 좌, 우편에 각기 못 박힌 것으로 말함으로써 예수님이 마치 행악자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것으로 눅 22:37절에서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는 말씀대로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오셨습니다. 죄인을 죄에서 건져주시고 의로운 자로 여김 받게 하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비천한 세상으로 죄인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인들로부터 열렬한 환영과 대접을 받으시는 것이 마땅한데 오히려 행악자로 취급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자신을 죄에서 건져주시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에게는 하나 같이 죄에 대한 심각성이 없습니다. 자신의 죄의 현실을 보지 못했고 죄가 자신들을 사망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후손이라는 혈통과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당위성이 되어서 자신들을 죄로부터 분리하여 생각했습니다.

 

 

이방인의 세계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선을 따라 스스로를 죄로부터 분리하여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에게 율법이 있다면 이방 세계에는 그들이 선으로 여기는 도덕과 윤리, 즉 그들의 선한 질서와 도리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선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죄 없다고 세 번씩이나 선언한 것을 보면 나름대로 공명정대하고 도덕적인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는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죽이는 죄로부터 멀어지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빌라도가 자신에게서 죄의 심각성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자신을 죄에서 분리하여 생각하였기에 죄인을 위해 오신 메시아는 필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쓸모없는 존재로 간주될뿐더러 유대인들에게 행악자의 취급을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못 박은 자들을 두고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알지 못하고 지은 죄는 용서 될 수 있다는 일종의 면죄부를 발행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이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서도 그 어떤 양심적 가책조차도 없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옷을 나눠 제비 뽑고,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리들은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라고 비웃고,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신 포도주를 주며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조롱하는 것으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누구 하나 자기 행동을 돌아보고 가책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참하게 죽어가는 예수를 두고 즐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이런 자들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이고, 하나님의 용서가 바로 이런 자들에게 베풀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며 은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용서는 용서 받을만한 조건이 전혀 없는 인간에게 베풀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면 그에게서 나와지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입니다. 은혜에 대한 감사가 그의 마음에 채워짐으로 인해서 오직 은혜로 살게 되고 은혜만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가 인간의 선에 가려짐으로 해서 은혜가 아닌 인간의 선이 부각되고 높임 받고 자랑되는 것이 지금의 교회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선을 근거로 자신만의 정당성을 갖게 되고 그 정당성을 내세워 스스로를 죄에서 분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죄인이라는 말을 한다면 그 또한 죄인이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얻고자 하는 형식이요 위선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름 ◉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를 바라보며 관리들도 군인들도 비웃으며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를 구원하라”고 조롱합니다. 너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어야 남도 구원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조롱하는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고통의 환경에서 건짐 받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관심사였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예수가 메시아로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이들은 죄를 모르고 구원을 모르고 예수님의 죽음도 모릅니다. 그래서 죽으시는 예수를 조롱합니다. 자신을 구원할 힘도 없으면서 하나님의 아들, 유대인의 왕으로 자처했던 예수님에 대한 비웃음이고 분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죽으심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의 죄 사함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이 세상이며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아십니까? 십자가를 아십니까? 아신다고 해서 유대인과는 다른 사람일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죽어 있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오신 것이고, 우리가 있어야 할 죽음의 자리에 대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지고 생명을 주시며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의 길로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신다면 빛을 빛으로 알아보는 눈이 열린 것이고 죽음에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죽음에 있던 우리에게 베풀어진 은혜의 사건입니다. 때문에 안다는 것은 모른 자들을 향한 조롱으로 나와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감사로 나와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못 박은 자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알았다면 어땠을까요? 하나님을 믿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 사실을 알았다면 그들은 엄청난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가 모두 사함 받았음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요?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평강과 기쁨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행했던 모든 것이 죄였음을 깨닫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신이 어떤 자리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그 모든 내막을 알게 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온 마음이 집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기독교는 종교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는 자신을 드러냅니다. 자신의 정성과 헌신을 드러내며 자기 소원을 가지고 신을 찾습니다. 이들에게는 신이 누구신가가 관심거리가 아닙니다. 신이 누구이든 자신의 소원이 성취되는 것으로 목적은 달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자기 정성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먼저 뜻을 세우시고 일하셨습니다. 예수를 못 박은 자들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이미 예수님은 죄 사함을 위한 죽음의 자리에 스스로를 밀어 넣고 계십니다.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는 하나님을 위해서 인간이 한 일은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고 오로지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일하셨는가에 대한 내용으로만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게 된 신자는 자신의 존재됨에서 하나님을 확인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에 자신의 모든 것을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 세상의 요구와 조롱 속에서 ◉

 

 

네가 너를 구원하라는 것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세상의 요구이며 조롱입니다.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며 그 존재를 인정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해야 할 이유가 없으시다는 것을 모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차원이 아니라 택하신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인데 자신이 하나님을 선택하고 믿어주는 것으로 인식하기에 증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요구 속에서 기독교는 그들 요구를 따라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애쓸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증명하고자 했다면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스스로를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자기 증명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조롱에 침묵하셨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고 체험하는 것으로 신앙을 증명하고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조롱하는 자들과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기독교는 보여주는 것으로 증명하고 확인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타협이고 변질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초점을 두고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든 하나님이 누구시고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증거 하는 것에 사명을 두는 것이 아니라 교회됨을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기독교의 옷을 입은 인간의 일에 치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안다면 세상이 어떤 조롱을 던지며 비웃는다고 해도 묵묵히 예수님이 가신 길로만 걸어가면 됩니다. 자신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에서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의 기쁨을 맛보았다면 그 길로만 가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증명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는가?’라며 조롱해도 신자는 십자가에서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알았기에 하나님께 마음을 두며 주를 따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입니다.

 

 

우린 늘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갈등하고 고민하면서도 신자로서 가야 할 길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분명히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 갈 수 있도록 믿음과 힘을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고 지혜임을 알기 때문에 참된 능력과 지혜가 있기를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독교는 내적 치유, 외적 치유, 심리 안정, 기복, 윤리 실천 등을 그 본질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세상이 인정할 수 있는 것으로 보여주고 증명 받고 확인되고 싶어 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 그 모든 것은 썩어질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네가 너를 구원하라’는 것은 십자가에서 사형당한 예수를 믿는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는 안 되는 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가치 있게 여겼던 모든 것이 무너져야 합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내 멋대로 살았던 그 전부터 이미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한 뜻을 가지고 일하신 것만이 크신 은혜로 다가와야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며 이 신앙이 여러분에게 자유를 알게 할 것입니다.

  
 




  1.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2. (128강) 증인

  3. (127강) 부활의 예수님과 제자들

  4. (126강)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5. (125강) 부활과 여자들

  6. (124강) 예수님의 무덤

  7. (123강) 예수님의 죽음

  8. (122강) 두 행악자

  9. (121강) 네가 너를 구원하라

  10. (120강) 시몬과 우는 여인들

  11. (119강) 나와 빌라도

  12. (118강) 헤롯에게로

  13. (117강) 빌라도에게로

  14. (116강) 그리스도이거든

  15. (115강) 베드로의 통곡

  16. (114강) 이것까지 참으라

  17. (113강) 예수님의 기도

  18. (112강) 족하다

  19. (111강) 베드로의 각오

  20. (110강) 섬김의 나라

  21. (109강) 유월절과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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