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4.08.24 09:57

(122강) 두 행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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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3:39-43http://onlycross.net/videos/nuk/nuk-23394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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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설교>

 

◉ 가벼운 복음 ◉

 

 

본문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두 행악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선언을 들은 한 사람의 행악자에 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짧은 내용이 우리에게 복음과 은혜가 무엇인가를 생생히 증언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통해서 천국의 상급에 차등이 있다는 논리가 얼마나 허상적인가를 알 수 있고, 인간의 공로와 열심, 행함에 초점을 둔 신앙 또한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 은혜에서 동떨어진 것임을 깨달을 수 있기에 중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행악자와 예수님과의 대화에는 특이한 것이 없습니다. 표적도 없고 이적도 없으며 성령의 역사라고 할 만한 체험적인 것도 없습니다. 다만 모두가 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였을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희망이 없고 비참한 세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복음의 진리가 있고 무한한 구원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진심으로 느낄 수 있다면 그가 바로 복음의 내용을 아는 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께 복음은 무거운 것입니까? 가벼운 것입니까?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셨고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3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짐을 지워준 적이 없고 따라서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유대인들 스스로 말씀을 짊어지고자 했기에 항상 말씀이 무거운 것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지금의 많은 기독교인들도 복음에서 무거움을 느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처럼 스스로 말씀을 짊어지려고 하고 그것을 좋은 신앙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본문의 내용은 전혀 은혜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낙원에 있으리라”는 선언을 받은 행악자는 천국에 갔다는 것 외에는 상급도 없고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면서 구원에 차별을 두는 우를 범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의 세계와 십자가 아래의 세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 받을만한 조건이 가득한 곳이 어디입니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와 바리새인들로 가득한 십자가 아래입니다. 십자가의 세계에는 행악자들만 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패가 있었지만, 그것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면서 사회를 어지럽힌 행악자에 대한 조롱일 뿐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아래에는 율법을 지키는 온갖 신앙 행위로 가득합니다. 이들이 볼 때 “낙원에 있으리라”는 선언은 자신들에게만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낙원이 행악자에게 선언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어졌음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십자가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임을 보여주는 선언인 것입니다. 물론 두 행악자가 모두 낙원에 있게 된 것은 아닙니다. 행악자 중 하나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며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합니다. 죄로 인해 죽으면서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함께 달려있다고 해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적 실전입니다. 이 존재적 실존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폭로되었을 때 다른 행악자처럼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41절)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 행악자의 깨달음 ◉

 

 

이 행악자는 자기의 비참한 죽음을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상당한 보응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이 행한 일이 모두 죄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기에 자신의 죽음 앞에서 아무 할 말이 없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악자를 꾸짖은 또 다른 행악자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어떤 마음에서 자신과 동일하게 죽어가는 예수님을 향해서 이런 요청을 하는 것일까요? 행악자는 예수님을 행한 것에 옳지 않음이 없는 진리로 여겼습니다. 이것을 보면 행악자는 예수님이 누구시고,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말씀하셨는가를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면 이런 요청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악자는 자신이 처한 죽음의 자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라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악자의 이러한 고백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고 있는 십자가 아래의 세계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그들은 자신의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지만 세상의 마지막 때에는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든 실상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행악자의 깨달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제사장, 서기관 등 율법 전문가들도 깨닫지 못하고 보지 못한 것을 보고 깨달은 행악자에 대해서는 오직 ‘은혜’라는 단어 외에는 그 어떤 말로도 설명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2,13)고 말한 것처럼 ‘성령의 가르침’이라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고 은혜를 알게 되면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게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곧 진리라는 사실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자신에게 함께 해주시기를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가 진리이심을 아는 신자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자기 실존 ◉

 

 

예수님은 행악자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예수님을 비방했던 행악자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이 말씀은 그저 공허한 말로만 들렸을 것입니다. 그에게 구원은 고통이라는 현재의 상황에서 건짐 받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 실존을 자각한 행악자에게는 그 어떤 말보다도 희망이고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죽음을 자신의 전부로 여긴 사람에게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 외에 희망과 기쁨이 될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한 낙원은 무엇일까요? 낙원을 장소의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어딘가에 실재하는 좋은 곳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행악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완전히 목숨이 끊어지면 들어갈 천국을 상상했을까요?

 

 

행악자는 예수님을 진리로 바라봤고 예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기쁨은 진리이신 예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겠다는 선언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자신에게 함께 해주시겠다는 것으로 행악자에게는 이미 천국이 시작된 것입니다.

 

 

천국을 좋은 곳으로만 생각하고 예수를 믿었으니 그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만 매달려 있다면 그는 예수가 아닌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바라보기에 항상 자신을 챙기는 일에만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서도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상을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진리이시고 생명이라는 말에 아멘은 하지만 그 또한 예수를 진리와 생명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천국에 가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자기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기 때문에 자기 구원에 도움이 안 되는 예수는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비방한 행악자를 통해서 보여주는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네가 너를 구원하라”“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는 조롱과 비방은 그들의 시각에서는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구원자는 힘으로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존재였습니다. 그러한 구원자가 십자가에서 사형 당해 죽는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예수에 대해 이러한 생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세상을 새롭게 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고 정신이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악을 제거하고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야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이런 세태 속에서 신자인 우리가 할 일은 예수가 곧 그리스도이시고 진리이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가 진리이심을 나타내야 할까요? 그것을 한 편의 행악자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는 행악자의 말은 상식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예수도 죽는 입장에 있는데 그러한 처지의 예수님께 뭘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자신의 실존에서 죽음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죽음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은 사람만이 예수님께 자신을 부탁하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상식과 지혜로는 예수님을 선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구원의 의미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믿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는 행악자를 죽이는 사형도구였을 뿐이고 하나님의 저주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바울의 말대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행악자처럼 자기 실존에 대해 눈을 뜨는 것 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당연하다는 자기 실존에 눈을 뜨게 되면 죄 없는 예수님이 왜 자기와 함께 죽음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고 자신을 부탁할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 낙원에 있으리라 ◉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자신이 천국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예수가 자신을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이 갖고 있는 자신과 인간에 대한 큰 오해이고 예수를 비방한 행악자의 생각과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한편 강도는 죽음을 자기 행위에 따른 당연한 보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형편에서 건짐 받기를 기대하고 예수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죄 없는 몸으로 죽음의 길을 가는 예수만이 진리이시고 그 예수가 자신과 함께 해주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이 믿음이 아니면 항상 다른 것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보고 체험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진리이신 예수님이 나에게 함께 해주시는 그 기쁨의 세계, 즉 낙원을 맛보지 못하고 현실이 낙원이 되어주기만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선언은 행악자만이 아니라 백성으로 부름 받은 모든 신자를 향해 있습니다. 종말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세계가 허락되어 있음을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것으로 확인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충분하고 말씀이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되십니까? 그렇다면 확인받고 싶어 하는 구체적인 것들이 과연 영원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한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믿음의 증거물로 삼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행악자가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할 때 그가 예수님을 믿을만한 무엇을 체험했습니까? 행악자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을 뿐이지 체험한 특별한 기적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의 현실은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 그대로였습니다. 그러한 고통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고통과 죽음을 자신에게 당연한 보응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약속하신 생명의 세계를 이루시는 일은 현실의 문제에 방해받지 않습니다. 그 어떤 현실에서도 자기 실존에 대해 눈을 뜨게 하시고 예수를 바라보게 하심으로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자에게 함께 해주시는 그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본문의 말씀에서 드러나는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함께 이미 낙원에 들어간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현실의 문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누가 더 잘 사는가’라는 것으로 은혜와 사랑을 확인하지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현실의 문제를 기준으로 은혜와 사랑을 따지고 확인하고 경쟁하는 것이야 말로 아직 신앙의 세계에 들어오지도 못했으며 예수님을 아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세상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뜻을 둔 사람입니다. 이것은 땅의 것이 아닌 위의 것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사람이 신자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신자의 이름에 걸맞게 사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 답을 본문의 한편 행악자를 통해서 찾아야 합니다.

 

 

죽음을 당연한 보응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참으로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이러한 감격으로 다가오고 예수님이 나에게 함께 해주시는 낙원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2. (128강) 증인

  3. (127강) 부활의 예수님과 제자들

  4. (126강)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5. (125강) 부활과 여자들

  6. (124강) 예수님의 무덤

  7. (123강) 예수님의 죽음

  8. (122강) 두 행악자

  9. (121강) 네가 너를 구원하라

  10. (120강) 시몬과 우는 여인들

  11. (119강) 나와 빌라도

  12. (118강) 헤롯에게로

  13. (117강) 빌라도에게로

  14. (116강) 그리스도이거든

  15. (115강) 베드로의 통곡

  16. (114강) 이것까지 참으라

  17. (113강) 예수님의 기도

  18. (112강) 족하다

  19. (111강) 베드로의 각오

  20. (110강) 섬김의 나라

  21. (109강) 유월절과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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