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4.08.31 09:53

(123강) 예수님의 죽음

조회 수 434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눅 23:44-49http://onlycross.net/videos/nuk/nuk-23444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44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48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49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설교>

 

◉ 십자가와 죄 ◉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향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예수께 나오는 사람도 의인이 아니라 죄인입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시고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오셨고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의인은 자칭 의인입니다. 얼마 전 교황이 방문했을 때 124인에 대한 시복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시복식은 죽은 사람에게 성인 이전의 단계인 복자라는 칭호를 주는 가톨릭에서 행하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복자로 인정된 사람들 가운데 가톨릭의 검증을 받아 성인의 칭호를 주는 시성식이 있습니다. 성인은 말 그대로 의인을 말합니다. 따라서 검증 기준은 생존했을 때의 신앙과 덕행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인에게 존경받고 인정받을 만한 신앙 행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인이 의인으로 여김 받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신앙과 행위를 검증해서 인간이 인간을 성인으로 인정하고 칭호를 준다는 것은 예수님을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해 오신 분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증거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 큰 중요성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가톨릭의 이러한 의식을 잘못된 것으로 비판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독교 역시 교회에서 실천하는 여러 행위들을 믿음에 의한 의로 간주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고 없고를 기준해서 신앙을 저울질하고 있으니 교인들은 교회로부터 신앙을 인정받기 위해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신이 병들었음을 알고 예수님만이 자신을 고쳐주실 유일한 의사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은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전적 무능력의 상태가 되어 예수님께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이 병든 자라는 것에 대해서는 자각하지 못하고 건강한 체 행세하면서 십자가를 말하고 있는 것은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믿음으로 열심을 내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는 것과는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왜 이렇게 죄인에 대해 강조한다고 생각합니까? 어떤 사람은 죄인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진심으로 자각하고 죄인 됨에 대해 진정성이 깊을수록 그에게 십자가의 은혜는 감당할 수 없는 감격과 힘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것이 우리의 습성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대해 말할 때는 먼저 죄인의 문제에 대해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나는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고 있는가?’‘나는 하나님께 무슨 죄를 지었는가?’ 이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는가를 보면 진심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 자신에게서 저주 받을 자의 형상으로만 드러나고 있음을 감지한다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게로 관심이 향할 것이고 특별한 체험을 신앙의 증거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이 증거로, 표적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 십자가와 사랑 ◉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 소식과 죽으심을 둘러싸고 있는 내막에 대해 들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죄 없는 분의 억울한 죽음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억울함을 우리로 인해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마 지극히 무덤덤하게 반응할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인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새로울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기 이전부터 알고 있었고 교회를 다니면서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마치 예수님에 대해 처음 들은 내용인 것처럼 반응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치 나와 상관이 없는 듯 무관심으로 반응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선내에 있던 수백의 승객들을 구조하지 못한 자들을 향해서 온 나라 국민들이 분노했습니다. 내 자식에게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너무 무책임하고 성의 없는 대응에 분노로 반응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무덤덤하게 반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일까요? 슬퍼하는 감정이 있어야 하고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슬픔과 눈물이라는 감정으로 반응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슬퍼하는 감정과 눈물을 마치 자신이 십자가의 은혜에 들어간 증거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우리에게 그런 값싼 감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자기감정을 신앙과 연결하여 스스로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중대한 착각에 머물게 할 위험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구원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입니까? 가톨릭이 죽은 누군가에게 성인 또는 복자라는 칭호를 줄 때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철저히 검증하여 고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경건하지 않은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사랑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사랑을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확증하신 것입니다. 확증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나타난 사랑 외에 하나님의 사랑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예수님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것이고 그 사랑에 감동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을 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죄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당연히 알지 못할 때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저주 받을 형상을 보게 되고 죄를 용서 해줄 구원자에 대한 필요성을 느껴서 예수님의 오심을 요구하고 하나님이 그 요구에 반응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전혀 원하지 않은 일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그 사랑에 감동하고 주를 위해 살고자 하는 뜻을 세우게 되는 모든 것 또한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행하실 수 있는 능력과 권세입니다.

 

 

창조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부활의 권세로 자기 백성을 죽음에서 건져 부활 생명에 있게 하심으로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의 죽음에서 목격하고 그 사랑에 항복한 자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라는 신분,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부활 권세의 증거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찢어진 휘장 ◉

 

 

세상은 예수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대신 바라바를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보입니다. 과연 우리는 다를까요? 세상을 살면서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만 선택하는 길로 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닐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고 예수님이 나에게 전부인 것처럼 말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세상으로 기울어지고 끌려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에 더욱 깊이 매몰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온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점령당하고 그 사랑에 매이고 그 사랑이 나를 강하게 붙들고 있는 것으로 두려움과 불안이 없이 오직 주만 바라보는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증거 하는 내용에 식상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누가의 기록을 보면 먼저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구시까지 계속되었고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졌다고 말합니다. 마태와 마가 역시 육시에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그 어둠이 구시까지 계속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에 대해서도 역시 동일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누가는 예수님이 숨지시기 전에 찢어진 것으로 말한 반면 마태와 마가는 숨지신 후에 찢어진 것으로 말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휘장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는 가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휘장은 거룩과 비거룩을 구분하고 누구도 거룩한 장소를 침범할 수 없도록 세워놓은 굳건한 담과 같은 것입니다. 그 휘장이 무너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시각적인 의미에서의 거룩과 비거룩이 무너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 역시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과는 무관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휘장이 찢어진 것은 곧 예수님의 죽음으로 법조문으로 된 율법이 폐하졌음을 알리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의 시각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성전 예배는 종결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어둠이 임한 것과 휘장이 찢어진 것을 함께 연결하여 예수님의 죽으심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이 이방인을 대상으로 기록된 성경임을 생각하면 휘장을 이방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막은 담으로 보고 휘장이 찢어짐으로 이방인도 하나님의 은혜로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됨을 선포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이 모든 죄인을 위한 죽으심이고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가복음이 이방인의 구원을 말하고 있기 때문인지 예수님이 죽으신 뒤에 맨 먼저 이방인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고백한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즉 이방인을 시작으로 하여 유대인들까지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보고 그가 의인이었음을 알게 되고 가슴을 치게 된 것입니다.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치게 되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반응인 것입니다.

 

 

가슴을 치는 것은 통회, 즉 회개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누가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회개하게 하고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증거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즉 십자가는 자기의 행악으로 인해 죽은 한 행악자와 예수님의 사형을 지휘한 이방 군인 백부장,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에 동조했고 구경꾼의 자리에 있었던 무리들까지 모두를 구원으로 이끄는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 구원의 능력 ◉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의인의 죽음으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구원을 이미 완결된 사건의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신자는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구원 받은 사람이고, 따라서 구원된 이후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힘써 살고자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이미 구원의 세계로 들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구원된 사람이라는 말도 맞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소위 세상 안에 사는 사람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저주 받을 자의 형상으로만 드러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실제 모습은 늘 ‘나는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주께서 붙드시고 주 안에 있게 하심으로 모든 죄를 덮으시고 구원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구원의 능력이 됨을 생각하며 감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은 예수님이 숨지실 때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상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신데 왜 자기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한다는 것일까요?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혼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짠다고 해도 사실적인 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일하셨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적 한계를 보여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눅 22:42)라는 기도도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인간의 자리에서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의 문제 또한 하나님께 맡겨야 할 문제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책임지실 분이라는 것이 십자가로 증거된 것입니다.

 

 

우리의 실상을 보면 늘 구원에 대해서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알고 그 죽으심을 우리의 미래와 연결한다면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우리에게 증거하고 그 세계를 신뢰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바라볼 것은 용서입니다. 모든 죄를 덮어주신 용서 안에서 우리는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전히 십자가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1.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2. (128강) 증인

  3. (127강) 부활의 예수님과 제자들

  4. (126강)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5. (125강) 부활과 여자들

  6. (124강) 예수님의 무덤

  7. (123강) 예수님의 죽음

  8. (122강) 두 행악자

  9. (121강) 네가 너를 구원하라

  10. (120강) 시몬과 우는 여인들

  11. (119강) 나와 빌라도

  12. (118강) 헤롯에게로

  13. (117강) 빌라도에게로

  14. (116강) 그리스도이거든

  15. (115강) 베드로의 통곡

  16. (114강) 이것까지 참으라

  17. (113강) 예수님의 기도

  18. (112강) 족하다

  19. (111강) 베드로의 각오

  20. (110강) 섬김의 나라

  21. (109강) 유월절과 하나님 나라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Next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