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4.09.07 09:57

(124강) 예수님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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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3:50-56http://onlycross.net/videos/nuk/nuk-23505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50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52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54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5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설교>

 

◉ 하나님의 사랑 ◉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무조건적인 그 사랑이 십자가로 확증되었다는 것을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습니다. 만약 피조물이 자기의 노력과 헌신과 물질로 하나님을 감동하게 하셔서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과연 피조물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은 피조물의 그 어떤 정성과 헌신에도 감동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성과 헌신으로 하나님을 감동케 해서 사랑을 받겠다는 의도 자체가 불손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신을 채우기 위한 계산이 들어 있고 결국 하나님을 위한 순전한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 받음을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는 사랑의 대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것으로 확증하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과 환경에 있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일에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형편과 환경을 뚫고 우리의 마음에 도달하여 그 사랑에 무릎 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 받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죄 용서, 아니면 구원입니까? 모두 맞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벗어나야 할 사랑의 함정이 있는데, 그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랑 받음을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든 사랑을 받으려고 할 것이고, 급기야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서 자기 열심과 정성, 헌신을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분명 실패로 끝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잘못된 사랑의 함정에 매몰되어 빠져나오지 못한 채 사랑 받기 위해 힘쓰는 현실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미 죽어 버린 존재에게 생명을 주셔서 산 자로 존재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확증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고 생명에 있게 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사랑에 목매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진심으로 이 사랑을 알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 하나하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그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얘기에 무반응이고 그다지 관심도 두지 않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욕구를 채워주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현실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런 우리에게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 홀로 이루신 사건 ◉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그 죽음을 본 백부장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갑니다. 이 무리들은 바라바를 내어 주고 예수를 처형하라고 소리쳤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보면서 뭔가 두려움과 함께 죄책감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공회 의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여 장사지낸 일을 말하고, 예수님의 시체를 무덤에 넣어 장사 지낸 것을 여자들이 보고 돌아간 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이 내용들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린 주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헌신에 중점을 둡니다. 물론 죽으신 예수님을 위한 요셉의 마음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요셉이 빌라도에게 시체를 달라고 하여 예수님을 장사지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그들 모두는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고 모든 일이 끝났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눈에 가시 같은 예수를 자신들의 계획대로 처리했으니 이제 염려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빌라도도 하나님께 영광 돌렸던 백부장도, 가슴을 치며 돌아간 무리들도 여인들도 그리고 예수님의 시체를 직접 장사한 요셉도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누구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하고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아예 사람들의 생각에서 사라져 있었고 ‘예수는 죽었다’는 생각으로만 가득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소망과 염원에 따라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이 홀로 이루신 사건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후손에 대해 포기하고 기대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신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홀로 이루셨다’는 것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도,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한 용서도, 구원도 그 무엇 하나 인간이 원해서 된 일은 없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사랑과 구원을 생각하고 기다렸을 뿐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영광의 회복입니다. 용서도 예수님의 죽으심이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 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에 있게 하시는 사랑을 베푸셨고 그 일을 위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거룩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우리가 무엇을 알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물론 십자가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하기는 하지만 이미 확증된 사랑을 늘 세상을 기준해서 확인하려고 합니다. 때문에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일에 힘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단지 구원용으로만 이해될 뿐입니다.

 

 

◉ 아리마대 사람 요셉 ◉

 

 

요셉이 예수님을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었습니다. 요셉이 모든 정성을 다해 예수님을 장사한 것입니다. 이 일은 요셉에게 불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그는 공회 의원이었는데 예수를 죽이자는 공회의 결의와 행사에 찬송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처럼 공회의 일에 반대했던 그가 예수를 장사한다면 공회에서 축출 될 위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예수를 장사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그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그 같은 일이 예수님의 부활에 어떤 영향을 끼치거나 도움이 되었을까요? 그런 것은 전혀 없습니다.

 

 

요셉의 정성에 하나님이 감동을 해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요셉의 선함과 의로움을 보시고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예수님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정성을 보였건 또한 그가 어떤 사람이었건 상관없이 분명한 것은 요셉의 장사로 인해 생긴 예수님의 무덤은 요셉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예수님은 ‘죽으셨다’는 것으로 이미 종지부를 장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알기 전까지 이들에게 예수님은 단지 지나간 과거의 일이었고 한낱 추억으로 자리했을 뿐입니다.

 

 

이 내용들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신앙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홀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나의 정성이 이런 결과를 있게 했다’는 생각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는 의미가 되고, 나의 정성과 열심으로 하나님을 감동하게 해서 사랑을 받자는 것도 신앙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일 뿐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으신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고 진리와 생명의 세계에 있게 하기 위해 일하시는 나라입니다. 만약 요셉이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면서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알았다면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분명히 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안식일이 되기 전에 예수님을 장사하는 일을 마치는 것에만 마음을 두었을 뿐입니다. 안식일에는 죽은 자를 장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요셉이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다 해도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 것이지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이루어질 나라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요셉도 예수님의 다시 사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요셉이 하나님 나라를 알게 되었다면 그 나라는 인간의 선함과 의로움, 예수님을 향한 정성과 헌신, 그리고 자신의 앎과 믿음까지 그 어느 것 하나도 포함되지 않고 순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행함과 은혜와 사랑으로 인한 생명의 나라라는 것을 분명히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야 할 신앙의 중심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된 신앙을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인간으로부터 생산되는 모든 것을 삭제하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둔 순간 자신이 신앙을 위해 가치 있는 일을 했다고 착각하게 되고 그것은 하나님이 홀로 모든 일을 이루셨다는 신앙에서 멀어지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 순금 같은 신앙 ◉

 

 

욥 23:10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말합니다. 순금은 예전 성경에서는 정금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정금 같은 신앙’이란 말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정금 같은 신앙’은 어떤 신앙을 말하는 것일까요? 어떤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예수를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과연 그러한 의미의 정금 같은 신앙을 자신의 현재와 일치시킬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단련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어려움이 반복되는 분이라면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생활이 평탄하다면 하나님의 단련을 실감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욥의 말은 욥처럼 고통을 겪는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 모두를 단련하시어 순금 같이 되어 나오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평생에 계속될 일입니다.

 

 

순금, 곧 정금은 다른 물질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금을 말합니다. 흔히 생각한 것처럼 강한 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금 같은 신앙이란 하나님의 단련을 받아 그 믿음이 강해지고 그로 인해 어떤 어려움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기보다는 불순물이 제거된 순전한 금의 상태와 같은 신앙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순금 같은 신앙은 오직 하나님이 홀로 행하시고 이루셨음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불순물은 인간의 정성과 열심과 의와 행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불순물이 섞인 신앙을 정금으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단련을 통해서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원망과 불평 밖에 없음을 보게 하시고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믿음의 길로 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는 것이 정금 같은 신앙입니다. 우리를 이 신앙위에 세우기 위해 말씀으로 단련하시고 때로는 원치 않은 여러 가지 일로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우고 내 행복과 기쁨을 위한 삶이되기만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어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말씀대로 일하시고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가만히 계신 적이 한순간도 없으시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침묵하신 것처럼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 적이 없는데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침묵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며 자기 정성과 열심을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모두 종결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장사하는 것, 예수님을 위해서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는 것뿐입니다. 이들이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덤을 찾아서 예수님을 회상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에게 부활이라는 생명의 세계를 준비하셨고 그 세계를 이루어주십니다. 인간은 알지도 못했고 소망하지도 않았던 새로운 세계를 펼치시고 그 세계로 인도하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홀로 행하시고 이루셨음을 믿으면서 자신의 정성과 열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고 하나님만을 신앙해야 합니다. 이 신앙이 순금 같은 신앙입니다.

  
 




  1.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2. (128강) 증인

  3. (127강) 부활의 예수님과 제자들

  4. (126강)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5. (125강) 부활과 여자들

  6. (124강) 예수님의 무덤

  7. (123강) 예수님의 죽음

  8. (122강) 두 행악자

  9. (121강) 네가 너를 구원하라

  10. (120강) 시몬과 우는 여인들

  11. (119강) 나와 빌라도

  12. (118강) 헤롯에게로

  13. (117강) 빌라도에게로

  14. (116강) 그리스도이거든

  15. (115강) 베드로의 통곡

  16. (114강) 이것까지 참으라

  17. (113강) 예수님의 기도

  18. (112강) 족하다

  19. (111강) 베드로의 각오

  20. (110강) 섬김의 나라

  21. (109강) 유월절과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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