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08.05 15:57

(14강) 성령으로 보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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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

본문 내용의 핵심 주제는 성령의 역할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신 이유, 그리고 성령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지금의 교회에서도 성령에 대해 많이 강조되고 있지만 인간의 이익과 편리주의에 의해서 오해되고 왜곡된 성령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성령에 대한 내용만이라도 잘 생각해 본다면 성령을 바르게 알고 믿고 의지하는 신앙의 세계에 눈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인 그리스도를 은밀한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생각이나 지식으로는 알 수 없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기에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사람이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되는 길이나 방법은 인간에게는 전무합니다. 이 말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지혜인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 수 없을뿐더러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고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갈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무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신앙이라는 명목과 이유로 행하는 그 어떤 행함에도 의의 가치가 없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누구든 자기 행함에 가치를 둔다면 그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 헛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 헛됨과 허망함을 미리 알고 느끼며 내려놓게 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이것도 우리의 지식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성령에 의한 것임을 바울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10절에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은밀한 가운데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가 성령에 의해서 우리에게 보이게 된 것입니다.

 

 

12절의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는 내용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 즉 성령으로만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알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만의 주장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성령만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요 16:12,13절의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는 말씀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사 6:9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라고 말씀하심으로 인간은 말씀에 대해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로 규정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내용들을 거꾸로 해석해 본다면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하시는 증거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된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인격이 좋고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지식이 있다고 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그 피가 우리의 의로움이며 그 피를 믿음으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이해하는 성령은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이 아니라 인간의 헛된 상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짓 성령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에서 성령의 오심과 일하심을 생각하지 못하고 방언을 하고 병이 고쳐지는 것과 같은 체험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가치의 기준을 생명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시각과 상관없이 무가치하다는 판단을 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방언이나 병 고침 등의 체험을 생명의 증거라 할 수 없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능력도 아니라면 그 또한 무가치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 체험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말에 대해 ‘성령을 터부시 한다’며 비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령을 터부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할,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오해와 왜곡의 틀을 부수고 참된 성령을 선명히 드러내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았다면 누구도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도 그리스도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복음을 아는 자 없는 기독교라는 종교만 남아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상한 것은 왜 굳이 성령이 보이시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세상은 알아보지 못하게 하시고 오직 성령 받은 사람만 알아보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요 14:17절에 보면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진리의 영으로 오신 성령을 받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알 수 없고 성령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도 알아보지 못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알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치관으로 계산해 보자면 좀 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이 유리합니다. 성령을 보이시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소수보다는 다수에게 성령이 임해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랬다면 지금의 세상은 예수를 믿는 자로 장악되었을 것이고 세상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세계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행 2:1절부터 보면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후에 성령이 오시는 오순절 사건에 대해 말합니다. 대개 그때 성령 받은 사람을 약 120명으로 말합니다. 행 1:15절에서 다락방에 모인 무리의 수를 약 120명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왜 120명에게만 임했을까요? 천 명 만 명에게 임했다면 그만큼 진리를 따르는 신자의 세력은 확대되고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수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신 것에서 진리의 세계는 힘에 대항하여 이기기 위해 세력을 구축하는 세상과 다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사심을 버리고 성령의 오심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교회 역시 세상의 힘과는 무관한 길로 가는 성령공동체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소위 교회의 사명을 하나님나라의 확장으로 말하고, 그것을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확장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도 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 옆에 있던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세워서 왕이 되실 분이고, 그 때가 되면 자신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보상 받을 것을 기대했기에 자신을 위해서도 예수님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의한 행동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에 대해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눅 22:50)하시고 귀를 만져 낫게 하십니다. 떨어진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는 것은 새로운 귀가 나게 하셨다는 것보다는 떨어진 귀를 다시 붙여 낫게 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쨌든 이것은 예수님으로서 큰 능력을 보여주신 것이 됩니다. 그 외에도 세상이 놀랄만한 능력을 많이 보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으로 강한 힘의 나라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힘없는 약자의 모습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가치관과 사고방식과 상식과 경험 등 모든 것을 동원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죽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도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알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받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자기의 삶과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 하나님을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로 인도받습니다. 성령이 가르치고 알게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소원이 되는 말씀의 깊은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 참된 성령의 오심인 것입니다. 은밀한 하나님의 지혜를 성령이 보이신다고 말씀하셨기에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일, 하나님의 일은 구 성경에서는 사람의 사정 하나님의 사정으로, 현대인의 성경과 공동번역에서는 사람의 생각, 하나님의 생각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번역하든 분명한 것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전부를 알 수 없으며 그러한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하나님을 안다는 생각은 내려놓고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보내어 그리스도를 보이시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해석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방언이나 병 고침과 같은 체험이 아니라 인간이 알 수 없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알아가는 것으로 얼마든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 6:29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는 말씀도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보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시지만 이 일 조차도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을 보내어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해석하면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증거로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합시다’라는 말은 우리가 할 수 없는 말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이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모두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세상은 납득하지 못합니다. 인간에게는 생각이 있고 자발적 의지가 있어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행동하는 것으로 규정하는데 보이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성령을 말하면서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고 행동하게 된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그 생각과 마음과 행동이 조종당하는 것처럼 인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알게 된다는 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과 생각이 조종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에게 장악되어 자기만을 사랑하는 존재로 전락한 인간이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죄임을 알게 되고, 그 죄로 인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에 마음이 열리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성령이 오기 전에는 그리스도도 세상에서의 자기 확대를 위해 필요한 분으로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관심도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에 따라 주어지는 것으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믿음은 오로지 자기를 위한 것일 뿐입니다. 자신을 위해 예수를 선택하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게 되면 인간이 왜 무능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고 믿음 또한 인간의 소관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하고자 하는 자기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어 하나님이 하게 하신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행했다고 생각한 모든 것에 대한 자기 공로를 주장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마음이 그리스도로 향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 결과이며 이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9절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할 수 없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성령으로 보이신 결과일 뿐입니다.

 

 

성령으로 보게 하시고 알게 하심으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눈이 열리게 된 것이고,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서 지금까지 주를 믿어 온 모든 삶에 하나님의 은혜만 있을 뿐 자신의 공로와 힘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을 여러 가지의 기준으로 나눕니다. 돈과 지위, 그리고 도덕적 인격과 행실 등 많은 것이 기준 되어서 차별을 받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을 성령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로 나눌 뿐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에게만 오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선택한 자와 선택하지 않은 자로 나누어진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으로 인해서 세상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지혜인 그리스도를 보게 되고 그리스도가 진리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모든 삶의 방향을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에서는 약자가 되는 것이고 조롱으로 돌아오는 길이라 해도 잠시 동안의 시간일 뿐임을 자각하면서 영원한 세계인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에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보이신 것을 보는 자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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